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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슬기 Aug 06. 2018

브라 없는 여름은 천국이라네!

노브라 6년차 아줌마의 브래지어 이야기

                                                                                                              

"나 갔다 올게~"
"응, 잘 하고 와~"

재택 발주 후 오후 출근을 하는 목요일 아침, 남편은 집을 나서는 나를 배웅하며 인사했다.
그리고 던지는 한 마디.

"너 오늘도 안 했니?"

저벅저벅 걸어와 가슴 위로 두 손을 털썩- 얹어 만져보는 그에게 그럴 리 없다는 얼굴로
"티 나? 티 안 나던데- 왜? 티 나니?" 묻는 나에게 그가 대답했다.

"아니, 티 안 나. 그냥, 이제 아예 안 하고 다니는구나 싶어서."
"왜? 싫어? 안 하고 다닌 지 꽤 됐는데- 너무 더워서 못 해. 숨 막혀서 못 해~~"
"그래! 우리 슬기는 페미니스트니까 그 정도는 해야쥐! 싫긴 내가 왜 싫어~ 내가 싫어한다고 안 할 사람도 아니고,"
"그렇지. 그건 그렇지. 그런데 내가 페미니스트라고 생각해? 그래? 자기는 그렇게 생각해?"
"자기가 페미니스트가 아니면 누가 페미니스트겠니- 당당하게 세상의 부당함을 외치며 맞서 싸워나가렴! 내가 응원할게!!"
"ㅋㅋㅋ 그래! 그럼 나는 오늘도 이렇게 나가마!! 잘 있다가 출근해라잉~ 나는 간다~~~"

그가 생각하는 페미니즘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브라를 하지 않고 다니는 여자=페미니스트라면 '네, 저는 페미니스트가 확실합니다.'
노브라에 제대로 시동을 걸기 시작한 지 어느새 만 6년 차-
열에 아홉, 아니 한 달 중 28~29일은 브라를 하지 않고 생활을 하는 나는야 N0-브라-女이니까.

-_-v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는 브라를 입기 시작한 시절부터 노브라 인생을 추종했다. 브라는 오로지 집 밖에서만! 집에 들어오면 양말보다도 먼저 벗어던지는 것이 브라였고, 브라 입기를 싫어했다. 후크를 채우는 즉시 찾아오는 갑갑함도 숨이 막히지만 브라가 찌르고 조이며 상처를 내는 어깨와 명치의 생채기들도 참을 수 없는 괴로움이었기에- 두 살 아래 남동생이 있어도, 아빠가 있어도, 내 집에 있는 시간만큼은 절대적으로 브라에서 벗어나는 시간, 편하게 숨을 쉬는 시간, 나를 옥죄고 아프게 하는 그놈의! 브라에서 해방되는 시간이 필요했다.

                                                                                                                 


몇 년 전, 브래지어를 24시간 착용한 여성의 유방암 발병률이 전혀 착용하지 않는 여성보다 125배나 높다는 연구 결과가 발표되면서 브라의 해악이 크게 다뤄졌다. '유방암 발병의 원인으로 볼 수 있다 VS 아직 충분히 입증되지 않았다' 확실히 답을 내지 못 하더라도 분명한 사실은 브래지어가 가슴에 지속적인 압박을 가해 노폐물 배출에 중요한 역할을 하는 림프의 흐름을 막는다는 것.

브래지어가 유방암 발병률을 높일 수 있다, 척추 관절 염증을 유발할 수 있다와 같은 거대 증상은 차치하더라도
브래지어로 인한 소화 불량과 수면 장애, 수족 냉증은 대다수의 여자들이 너무도 흔히 겪고 있는 증상 중 하나일 뿐이며 브래지어를 착용할 때마다 생기는 벌건 자국과 상처는 접촉으로 인한 '화상' 증상의 하나로 피부가 유난히 예민하고 약한 저는 피가 나고 진물이 맺히는 상처를 달고 살며 샤워를 할 때마다 쓰라림에 치를 떨어야 했다.

아무리 생각을 하고 생각을 해도 '해서 좋은 점'보다 '해서 나쁜 점'이 가득가득한 이 흉물을 매일매일 수없이 입고, 또 입은 것은 이것을 입지 않고 다닐 수 있다는 생각, 이것을 입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 자체를 해본 적이 없기 때문인데- 브라를 하지 않고 외출을 할 수 있다는 일생일대의 혁명!! 여자로서의 대변혁기를 맞이할 수 있게 도와준 것은 1년간의 모유 수유였다. 출산 후 만 12개월, 완모를 하면서 나는 자연스레 브래지어를 입지 않는 생활을 시작했다.






                                                                                                                


아이는 엄마의 상황과 장소를 고려하지 않고 밥을 찾기 때문에 외출 중에 수유를 해야 할 때가 많은데, 부끄러움이 많은 성격 탓인지 출산 후 정리가 되지 않은 뱃살 탓인지 나는 아무리 수유실이라 하더라도 훌렁훌렁 윗옷을 들추고 맨살을 드러내기가 참 민망했다. 하나 장만해 둔 수유 브라는 대체 이게 뭐가 편하다는 건지 알 수가 없고, 수유하기 더 편한 속옷, 적절한 속옷은 없을까? 찾다 발견한 것이 바로 이 브라탑.

와이어와 후크가 없으니 수유할 시간이 지나 가슴이 퉁퉁 부어도 심하게 졸리지 않고, 집에서는 가제 손수건을 쏙 넣어 새는 젖을 막기도 편리, 밖에서는 배보일 걱정 없이 먹이기도 편리, 무엇보다 숨이 턱턱 막히는 브래지어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해방감에 완전히 심취해서 꼬박 1년 뒤, 첫돌을 기념하며 단유를 하게 된 후에도 계속 브라탑을 입었다.

반팔 안에 민소매를 하나 더 입기는 너무 더운 여름만 제외하고 봄, 가을, 겨울 세 계절을 브라탑과 함께 하는 시간을 1년쯤 보낸 뒤였을까, 유난히 추위를 많이 타던 어느 겨울 처음으로 히트텍을 사서 입게 되었는데, 어머나 세상에. 고무줄로 고정된 캡조차 없는 속옷을 입으니 더 좋아! 더 편해!! 두꺼운 니트를 입거나 얇은 옷 여러 개를 겹쳐 입는 겨울이니 캡이 없는 속옷을 입어도 외관상 전혀 티가 나지 않았다.

                                                                                                                


'우와 우와, 세상에, 이렇게 편하게 숨을 쉬며 다닐 수도 있는 거구나!!
브라탑 없이 다닐 수도 있는 거구나!!!'

또 한 번의 신세계를 경험하며 겨울에는 브라탑 대신 히트텍을, 봄/가을에는 브라탑을, 여름에는 브래지어를 착용했고, 그렇게 1년, 2년, 3년이 지나면서 나는 조금씩 더 과감해지기 시작했다.





                                                                                                               

꼬박 1년 전인 작년 여름, 나는 브라 없는 여름 외출을 시작했고, 그렇게 생활하는 나의 일상을 고백했다. 대단한 결심을 해서라기보다는 어느 날 우연히 브라 없이 나갔던 한 번의 경험이 '얼레? 한여름의 노브라도 괜찮은데? 아무도 모르는데??' 깨달음을 불러왔고, 당시 한참 '노브라'가 방송계의 이슈로 떠올라 쏟아지는 기사를 보며 떠오른 생각들을 끄적끄적 옮겨 적은 것인데, 이 글을 읽고 난 이웃/지인들의 반응은 크게 두 부류-

"어머! 저도요! 저도 안 입고 다닐 때 많아요!" → 알고 보니 같은 노브라 족.
"어머, 정말요? 저는 전혀 몰랐어요!!" → 매주 만나면서도 몰라보심.

모든 사람들이 내 가슴만 쳐다볼까 노심초사 불안했던 시기를 지나 '역시, 아무도 모르는군! 누가 남의 가슴, 젖꼭지만 그렇게 쳐다보겠냐고!' 뻔뻔해지자 올여름은 작년보다 한 단계 더 진화하여 중요한 미팅을 나갈 때도, 교회에 갈 때도, 옷이 더 얇아져도 에헤라디야~ 나는 노브라~~ 더위가 두렵지 않은 녀자라네~~

                                                                                                           

룰루랄라 브라 없는 해방의 여름을 만끽했고, 그러던 어느 날 옷장 속의 브라를 꺼내 들고 "엄마 이건 뭐야?" 묻는 7살 딸아이에게 대답했다.

"응, 그건 브래지어라고- 이렇게 가슴에 하는 거야."
"왜? 이걸 왜 하는 건데?"
"응, 여자들은 가슴이 이렇게 튀어나와있어서, 이게 흔들흔들 움직이는 게 불편할 때 입는 거야.
이걸 입으면 이게 가슴을 잡아줘서 막 달리고 뛰어도 가슴이 덜 흔들리거든."
"아, 그래서 엄마 운동 갈 때 갖고 가는 거야?"
"응, 달리기할 때 이거 안 하면 가슴이 덜렁거려서 불편하거든.
그런데 이게 자꾸 여기를 아프게 해서(고작 20분 달리기할 때만 입는데도 생기는 상처를 보여줌), 이제 이거 죄다 버려버리고 스포츠브라를 사려고."
"스포츠 브라? 그건 뭔데?"
"그냥 짧은 민소매처럼 생긴 게 있어. 운동할 때 입으라고 만든 거."
"그래? 그럼 얼른 사. 여기 빨갛게 다 까졌네, 아프겠다."






성인 여성 97.7%가 브래지어를 착용하고 하루 종일 브라를 입고 있는 20대 여성 비율이 66~80%가 되는 대한민국에서 노브라는 여전히 금기시되지만, 오늘 이상한 일이 내일도, 그다음 날도, 그다음 해, 그다음 세대에도 지속되란 법은 없다. 여자들에게 선거권을 준다는 것이 정신 나간 짓으로 여겨지던 그때를 지나 오늘이 있는 것처럼, 여자와 북어는 팰수록 맛이 난다는 말이 당연하게 통용되던 시대를 지나 지금이 있는 것처럼.


오늘의 내 생각을 바꾸고, 오늘 내 옆에서 잠을 자는 사람의 생각을 바꾸는 것.
오늘의 나에게 "엄마, 이건 뭐야? 이건 왜 입는 거야?" 묻는 아이들에게 해줄 대답을 바꾸는 것이
우리 아이들이 살아갈 세상의 모습을 바꾸는 일이 아닐까.

우리 집의 7살 꼬맹이가 쑥쑥 자라 가슴이 나오고 성인이 되었을 때에는 그저 '입어야 한다'는 이유로 입고 싶은 생각이 1도 없는 브라를 억지로 반드시 입어야 하는 세상이 아니라 내가 한껏 볼륨을 살려 S라인을 뽐내고 싶을 때, 오늘은 뽕을 듬뿍 넣어 나의 가슴을 마구 부풀리고 싶을 때 기분 좋게 브라를 꺼내 입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그런 날을 꿈꾸며 오늘도 나는 브래지어 없는 하루, 브라 없는 여름의 천국을 누리고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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