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사람이 번갈아 가며 쓴 이야기
**이 글은 두 사람이 몇 문장씩 돌아가며 공동집필한 이야기입니다.**
눈부신 햇살, 시원한 바람, 저 구름 한 점 없는 가을 하늘을 닮은 나의 그녀를 찾기 딱 좋은 하루, 모두가 나들이를 생각하는 오늘, 나 또한 에메랄드 빛 잔잔한 바다에 왔다. 완벽한 하루였을 것이다. 다만 이 상황이 배 위에서 청첩장 모임을 하자는 미친 친구 녀석의 아이디어 덕에 생긴 게 아니었다면.
그 녀석은 항상 이런 식이다. 지금 주꾸미 낚시를 하면 주꾸미가 아주 줄줄이 올라온다나 뭐라나… 정말 귀가 얇은 녀석이다. 선장님이 알려준 대로 낚싯줄을 던지고 주꾸미를 기다리고 있는데 왜인지 한 마리도 내 떡밥을 물지 않는다. 너무 심심해서 옆 친구들을 보고 있는데, 아, 오늘의 멤버 소개를 하지 않았군. 청첩장 모임에 온다고 어제 막 제주도에서 올라온 정현이는 바다라면 질색하지만 주꾸미는 나름 좋아하니까 마지못해 모임에 참석했다고 한다. 몇 년 전 나랑 대판 싸운 민규는 사실 오지 않았으면 했는데, 눈빛을 보면 걔도 내가 오는 걸 몰랐던 게 분명하다. 그래도 이 기회에 서먹함을 좀 풀어보려고 말을 몇 마디 걸어 봤지만 반응이 영 시원치 않다. 마지막으로 오늘 모임의 주최자 예비신랑 기성이는 주꾸미 몇 마리를 잡아 올리더니 우리 쪽은 쳐다도 안 보고 낚시만 즐기는 중이다.
이대로는 이 완벽한 날씨를 즐길 수 없을 것 같아 우선 기성이가 잡은 주꾸미 몇 마리를 넣고 라면을 끓여 한 잔 하자고 제안했다. 오랜만에 봐서 어색했는지 다들 나의 한마디에 라면 물만 올려놓고는, 기성이가 가져온 꽤나 비싼 술부터 꺼내 한 잔 두 잔 홀짝이기 시작했다. 역시나 가장 먼저 취한 건 기성이었다. 술에 취해 항상 이야기하던 레퍼토리를 꺼낸다. 여자친구, 이제 예비 신부인 그 여자를 어떻게 만났는지, 그리고 자기가 고백한 이야기며 백일만에 대판 싸우고 헤어질 뻔한 이야기까지... 그나마 새로운 이야기는 엊그저께 했다는 프러포즈 얘기였다.
"내가 호텔을 몰래 빌려서 프러포즈 딱 준비해 놓고, 호텔 레스토랑 가자고 거짓말까지 잘했는데 말이야. 아니 엘리베이터에서 나도 모르게 카드키를 꺼내버려서 딱 걸렸지 뭐야! 야, 웃지 마! 너희는 잘할 줄 알지? 두고 볼 거야, 내가!"
주변에서 한 번쯤은 들어본 프러포즈 실수를 내 친구가 하다니, 다들 술에 취해서 그런지 정말 별 거 아닌 이야기에 빵 터져버렸다. 그러다가 '꽈당!'하고 내 의자가 뒤로 넘어졌다. 그러자 열만 내던 기성이까지 웃음이 터졌다.
'에고, 넘어진 김에 맑은 하늘이나 한 번 봐야지. 응? 하늘에 저건 뭐지?'
처음에는 갈매기 떼인가 싶었는데 자세히 보니 이쪽을 향해 빠르게 움직이고 있는 먹구름이었다. 분명 구름 한 점 없는 맑은 날이었는데, 순식간에 어둑어둑해지더니 빗방울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우리는 차려놓은 술상을 얼른 선장실 안으로 옮겼다.
"선장님 이게 무슨 일이죠? 방금까지 분명 날씨가 맑았는데..."
"원래 바다 날씨는 한 치 앞을 볼 수 없어유. 얼른 배를 돌려 육지로 돌아가야겠슈."
바로 그때, 한참을 던져놔도 그토록 움직이지 않던 내 낚싯대의 찌가 움직였다. 그것도 아주 세차게…! 내가 당황하니 민규가 얼른 낚싯대를 잡으며 소리쳤다.
"선장님 이거 한 번만 잡고 갑시다! 영식이 맨날 우리 때문에 낚시 끌려다녔는데 한 번도 못 낚았단 말이에요!"
"그래유, 그럼 일단 빨리 낚싯대 올려봐유!"
나는 급한 마음에 건네받은 낚싯대를 세게 당겨 올릴 뻔했지만, 너무 세게 당기면 줄이 끊어진다고 했던 선장님 말이 퍼뜩 생각나 신중하게 천천히 당기기 시작했다. 아까 잔잔했던 바다와 달리 이제 조금씩 파도가 일렁이기 시작한 바다에서 내가 낚아 올린 건 바로… 대왕 주꾸미였다! 나는 그제야 기성이의 마음이 이해되기 시작했다. 기성이가 낚싯대만 잡고 있었던 이유, 그리고 왜 청첩장 모임을 이곳에서 하자고 했는지…
"어휴 내가 이 배만 20년 운전했는디 이따만한 사이즈는 처음 보는구먼! 이것은 거의 문어여!"
"야~ 축하한다, 영식아! 너도 드디어 낚시의 재미를 알게 됐지? 근데 처음이 이 정도라니… 정말 대박
아니냐!"
하지만 나는 선장님의 칭찬도, 친구들의 축하도 들리지 않았다. 나는 그저 내가 잡은 대왕 주꾸미를 두 손 가득 잡은 채 짜릿함에 빠져 있었다.
바로 그때였다.
'콰르릉!'
분명히 하늘에서 난 소리였는데 배 전체에 진동이 울리는 느낌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날씨가 심상치 않구먼유. 이제 얼른 돌아가유!"
선장님이 이렇게 말하며 돌아서자마자 갑자기 배가 기우뚱했다. 순간 내 몸이 기울며 시야가 45도 돌아갔다. 모두들 주저앉으며 주변에 잡을 것을 찾아 잡았지만, 배 가장자리에 있던 나는 무언가를 잡을 새도 없이 순식간에 바다에 빠졌다. 풍덩 소리와 함께 나는 본능적으로 눈을 질끈 감고 숨을 참았다. 거센 파도의 위력에 수영은커녕 온몸으로 저항할 새도 없이 깊숙이 가라앉는 것이 느껴졌다. 이럴 줄 알았으면 다이어트를 더 열심히 하는 건데. 그럼 몸이 더 천천히 가라앉지 않았을까. 얼마나 깊이 들어온 건가 가늠해 보려고 살며시 눈을 떠봤다. 그 순간 '살아야겠다'는 희망 어린 결의가 생겼다. 저 위에 희미하게나마 배와 사람들이 보였기 때문이다.
'침착하게, 다리를 움직여보자…! 할 수 있어! 조금만 더, 조금만 더!'
내가 수영을 배웠다면 더 빨랐을까…? 사람들의 형상이 눈앞에 보이는데 이상하리만치 가까워지지가 않았다. 그럴수록 조급해져서 다리는 정신없이 발버둥 치고, 숨은 더 가빠져만 갔다. 더 이상은 못 가겠다 느껴지고 이젠 포기 밖에 답이 없다 생각하자마자 온몸에 힘이 쭉 빠져나갔다.
'젠장… 내 인생이 이렇게 끝날 줄 알았으면 수영이라도 좀 배워놓을 걸… 낚시 따위는 시작도 하지 말걸...'
바로 그때였다. 오른손에 힘이 느껴졌다. 눈을 뜨니 내 손을 잡고 있는 하얀 손이 보였다. 피부가 하얀 친구라면, 민규...? 서먹한 사이였지만 생사를 눈앞에 두고는 그런 게 중요한 게 아니었다. 이대로 나를 살려만 준다면 나는 민규에게 백번 미안하다 사과하고 고맙다며 뽀뽀까지 퍼부을 수도 있었다. 나는 나를 잡아 이끄는 손에 몸을 맡기고 정신을 잃지 않으려 안간힘을 썼다. 그러다 어느 순간 갑자기 몸이 가벼워지며 바다 위로 빠져나왔고, 고개를 젖혀 거친 숨을 내쉬었다. 지금껏 살면서 이렇게 상쾌한 공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는 두리번거리며 나의 구원자를 찾았다. 그런데 엥, 하얀 손의 주인공은 민규가 아니었다. 내 생명의 은인은 웬 난생처음 보는 여자였다. 당황해서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어버버버 하고 있는 나와는 달리 그녀는 단호하게 소리쳤다.
"얼른 왼손에 있는 대왕 주꾸미를 놓아줘요!"
그 말에 나도 모르게 왼손을 펴 대왕 주꾸미를 놓아줬고, 갑자기 마법처럼 순식간에 하늘이 맑아졌다.
이 지역 출신인 그녀가 해준 말에 따르면, 날씨를 조종하는 영험한 대왕 주꾸미 한 마리가 있다고 한다. 믿거나 말거나지만 사실 그녀의 이야기가 귀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나를 구해준 그녀가 마치 인어처럼 아름다웠기 때문이다. 그녀의 배 위로 올라가 홀린 듯 그녀를 바라보며 이야기를 듣다 보니, 봉봉 소리와 함께 작은 배가 다가왔다. 배 위에서는 친구들이 나를 보며 손을 흔들고 있었다. 방금 전까지 돌아가고 싶던 친구들 곁이었지만 이상하게 마음이 조급해졌다. 결국 나는 그녀를 보고 말했다.
"저기... 저기... 음... 여기 혹시 화장실이 있나요?"
그녀는 나를 보고 한참을 웃더니 간이 화장실을 안내해 주었다.
이것이 그녀와 내 인연의 시작이었다. 나중에 내가 그녀에게 로맨틱하지 않은 말로 플러팅 한 것에 대해 실망하지 않았냐고 물어봤더니, 그녀는 실망할 틈도 없이 너무 웃겼다고 했다. 방금까지 생사의 기로에 있던 사람이 화장실을 찾는 게 너무 귀여웠다면서. 솔직히 운명이라는 걸 믿지 않지만, 지금 그녀의 말을 들으니 이런 생각이 들었다.
'수영을 못해서 참 다행이야. 아니었으면 이 사람과 못 만났겠지? 내 청첩장 모임에도 낚시 만한 게 없겠다, 아무래도. 와, 그 주꾸미가 인연도 만들어주는 진짜 영험한 녀석이었던 건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