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말 오랜만에 여행다운 여행을 다녀왔다. 국내 여행도, 당일치기 여행도 즐거운 여행이지만 역시나 해외여행만큼 큰 감흥을 주지는 못하는 거였다. 알아듣기 어려운 낯선 언어의 대화, 익숙한 듯 다른 픽토그램 표지판, 힘들고 서투르게 찾아가는 맛집과 숙소. 이 모든 어려운 것들에서 '이게 바로 여행이지!'하고 느꼈다. 물론 이 모든 이국적인 풍경을 사진에 담아 왔지만, 정작 나를 미소 짓게 하는 여행의 참맛은 여행 사진에는 등장하지 않는 ‘돌발 에피소드’였다.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나서 기록하거나 기억해주지 않으면 잊힐 수도 있는 재미있는 에피소드! 나는 그 에피소드가 우리의 여행을 특별하게 만드는 앙꼬 같다고 느낀다.
이번 여행은 감탄스럽게도 출발할 때 공항에서부터 에피소드가 탄생했다. 우리가 인천공항에서 환전을 하고 짐을 정리하려고 잠깐 벤치에 앉았는데, 갑자기 공항 직원이 오더니 우리 옆에 놓인 가방이 테러 폭발물 의심이 된다며 자리를 피해 달라는 것이었다. 그 가방은 몇 시간째 주인이 찾아가지 않고 방치되어 있는 허름한 백팩이었다. 우리는 물론 80퍼센트 정도의 '설마 진짜 폭탄은 아니겠지'하는 마음으로 자리를 떴고, 곧 그 자리엔 폴리스라인이 설치되고 특공대원 같은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왔다. 우리는 서둘러 탑승수속을 하러 갔기에 끝까지는 못 봤지만, 뉴스에 크게 나오지 않은 걸 보니 다행히 폭발물은 아니었나 보다. 이것이 우리 여행의 첫 에피소드였고, 우리는 벌써부터 이렇게 스펙터클 할 수 있냐며 즐거워했다. 사실 내 여행메이트는 에피소드 부자라서 함께 있으면 신기하고 재미있는 일이 생길 거라고 기대는 했지만 공항에서부터 에피소드 탄생이라니, 정말 시작부터 흥미로운 여행이었다.
이번 여행은 공항에서의 에피소드가 유독 있나 보다. 후쿠오카 공항에 도착해서 이제 수하물을 찾고 나가려는데, 공항 보안요원들이 우리가 흔히 보던 무서운 셰퍼드가 아니라 장난기 가득해 보이는 비글 강아지와 함께 우리를 막아서더니 냄새를 맡게 하는 것이었다. 셰퍼드는 아무래도 위협적이니까 비글과 함께 친근하게 다가가면 승객들을 조금 더 협조적으로 검사할 수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보안요원이 비글과 함께 활짝 웃으며 다가왔던 장면을 다시 회상하고 보니, 일본은 정말 보안요원들마저 친절했다. 물론 그 웃음 뒤에는 ‘당신은 의심스러우니 짐 검사 좀 하겠다’는 저의가 있겠지만은…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검사하지 않고 우리만 검사한 것을 보면 그 비글이 우리한테서 뭔가 냄새를 맡았던 것 같다. 과연 어떤 흥미로운 냄새였을지 궁금하지만, 그건 그 비글 친구만 알겠지…?
여행 가면 ‘남는 건 사진뿐‘이라는 말에 기억력 나쁜 나는 어느 정도 공감하지만, 백 프로 동의하지는 않는다. 사진으로 남기지 못했지만 우리가 기억하는 ‘에피소드’라는 막강한 존재가 있다. 사진은 사진첩과 드라이브를 찾아봐야 볼 수 있지만, 마음속에 저장해 놓은 ‘에피소드’는 우리가 원하면 언제든지 꺼내볼 수 있다. 십 년 전 친구들과의 유럽여행에서 다른 나라로 넘어가는 기차를 놓칠 뻔해서 전력질주 했던 에피소드는 친구들과 만나기만 하면 두고두고 회자된다. 신기하게도 이야기를 꺼낼 때마다 각자가 기억하는 다른 장면들이 덧붙여져서 ‘아 진짜? 그때 그랬어?’ 하며 스토리가 더 생동감 넘치고 풍성해진다. 당시에는 기차를 놓칠 수도 있다는 생각에 진짜 머릿속이 새하얘질 정도로 긴장되고 아슬아슬했던 기억이었는데, 이제는 잊을 수 없는 추억이 되었다. 그런데 만약 조금 더 여유로운 마음가짐과 한층 더 저질이 된 체력을 갖게 된 지금, 같은 상황에 놓인다면 나는 '그냥 기차표 다시 끊어야지 뭐' 하며 전력질주 따위는 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에피소드라는 건 그 당시 그때 그 상태의 나였기 때문에 가능했던, 다시 맛볼 수 없는 경험이다. 다음에 여행메이트를 만나면 물어봐야겠다. ‘너는 무슨 에피소드가 가장 기억나?’ 그럼이 친구는 또 내가 잊고 있던 이야기를 꺼낼 것이다. 그렇게 우리는 그때를 다시 사는 기분을 느끼며 ‘여’ 기서도 ‘행’ 복할 수 있다. 그렇게 여행은, 계속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