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극히 문과적 감성에서 분석한 결과
여행을 가서 하루의 가장 황홀한 순간은 노을 지는 하늘을 바라볼 때였다. 노을은 무조건 예쁘지만 그래도 특히 노을이 인상적이었던 여행지를 꼽아보자면 2017년의 하코다테, 그리고 2021년의 부산이었다.
2017년 친구들과 함께한 여행의 제목은 ‘빅픽쳐(Big Picture)’였다. 친구 C를 매개로 전혀 모르던 사이인 친구 H와 내가 함께 하게 된 여행이었는데, 우리 셋의 우연하고도 운명적인 만남이 이 여행을 위한 빅픽쳐였다는 생각에 그렇게 지었다. 우리는 취향도 잘 맞고 감성적으로 통하는 부분이 있어서 여행지의 어딜 가나 같은 것을 보고 기뻐하고 감동받곤 했다. 가나자와부터 도쿄, 홋카이도까지 여행하면서 우리가 가장 인상적으로 꼽았던 야경은 하코다테였다. 원래 야경으로 유명한 곳이기도 하지만, 야경을 보러 언덕을 걸어 올라가면서 보았던 핑크색 노을, 그리고 케이블카를 타고 올라간 전망대의 정상에서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 보았던 보랏빛 노을은 두고두고 잊지 못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일본 특유의 고즈넉한 분위기에 기모노를 입은 사람들과 세일러복을 입은 학생들이 풍경 속에 어우러져 있던 그 그림 속의 한 장면 같은 노을이 아직까지도 내 마음속에 인상 깊게 각인되어 있다.
2021년의 부산 여행은 일 때문에 잠시 부산에 내려가있는 친구가 놀러 오라고 해서 갑작스럽게 가게 되었다. 난생처음 가보는 부산이었는데 친구의 완벽한 가이드로 너무나도 좋은 풍경과 맛있는 음식을 경험해서 감사한 여행이었다. 특히 첫날 해운대에서 보았던 노을은 너무나 오랜만에 여행지에서 느껴보는 낭만이었기에 더 크게 다가왔다. 그날따라 날씨도 덥지 않고 맑은 하늘이었고, 도시의 건물들을 배경으로 펼쳐진 바다와 하늘을 채우는 핑크빛과 주황빛 노을은 나에게 무한한 행복감을 안겨주었다. 보고만 있어도 마음이 채워지는 그 느낌이 참 황홀했다. 어둠이 내리기 전까지 나는 하늘을 하염없이 바라보았고 고맙게도 친구가 그런 나를 열심히 예쁘게 사진 찍어주었다.
사실 여행지에서의 노을은 하루의 끝을 알리는 신호나 마찬가지인데, 노을을 보는 동안은 아무 생각도 들지 않고 그저 노을이 예뻐서 그 순간에 빠져 버린다. 노을이 다 지고 어둠이 내린 후에야 행복한 오늘이 끝나가는구나 하고 깨닫곤 했다. 노을은 사람의 마음을 빼앗기게 하는 신비한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다.
노을이 그렇게 아름답다고 느껴지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나는 그 이유가 노을의 ‘순간적’이라는 성격에 있다고 느낀다. 상상해 보자. 만약 붉은 노을과 푸른 하늘의 시간대를 맞바꾼다면? 아침부터 저녁 무렵까지 계속 하늘이 분홍색 또는 주황색 노을이고, 저녁 무렵 밤이 되기 직전 잠깐 새파랗게 푸른 하늘이 짠 하고 나타났다 사라진다고 상상해 보자. 물론 과학적으로 말이 안 되는 상상이지만, 노을이 가진 찰나의 매력이 얼마나 큰 것일지 짐작해보고 싶었다. 나는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다니는 푸른 하늘도 좋아해서, 만약 노을과 푸른 하늘의 시간대가 뒤바뀐다면 하루종일 볼 수 있는 노을보다 잠깐 스쳐 지나가는 푸른 하늘을 무척 좋아했을 것 같다.
이런 상상에 따르면, 노을은 시각적으로 오묘하고 예쁜 색을 띠는 매력을 갖고 있지만 찰나의 순간에 그 아름다운 색이 보였다가 이내 사라진다는 사실이 우리를 더욱 감동시키는 것 같다. 그런 점에서 노을은 우리 삶의 행복한 순간과 닮아 있다. 우리의 삶은 수많은 일상적인 순간, 하늘로 따지면 하루종일 볼 수 있는 평범한 푸른 하늘로 이루어져 있다. 그러다가 어떠한 행복을 마주하는 순간, 노을을 보았을 때처럼, 우리는 그 황홀함에 빠져 헤어 나오지 못한다. 그런데 그 행복이라는 감정은 지속적인 것이 아니다. 물론 만족스러운 삶을 살고 있다면 매일 매 순간이 행복할 수 있지만, 그건 푸른 하늘을 감상할 때와 비슷한 행복이다. 여기서 내가 노을에 빗대어 말하는 행복이란 특별하고 소중하고 어쩌면 다시 오지 않을 수도 있는, 그 순간에만 느낄 수 있는 행복을 말하는 것이다. 예를 들면 여행지에서 꿈만 같은 풍경을 마주했을 때, 간절히 원하던 일이 이루어졌을 때, 내가 좋아하는 사람이 나를 좋아한다는 걸 알았을 때, 그 순간은 우리 인생에서 노을 같은 순간일 것이다.
여행에서 노을을 감상하며 연발 감탄사를 쏟아내는 것처럼, 일상에서도 그런 행복한 찰나를 소중하게 느꼈으면 한다. 다시 오지 않을 순간이니까. 살다 보면 인생이 좋을 때도 있고 나쁠 때도 있다. 노을을 하루에 한 번만 볼 수 있지만 그 순간이 정말 황홀하게 느껴지는 것처럼, 우리 인생의 좋은 순간도 많진 않더라도 그 순간만큼은 황홀함을 깊이 느꼈으면 좋겠다. 그런 찰나의 순간이, 인생을 아름답다고 느끼게 하는 것이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