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뮤 Dec 23. 2023

내게는 과자를 먹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

일드 ‘호타루의 빛’의 건어물녀 따라 하기

‘과자’라는 주제를 핑계 삼아, 다이어트를 뒤로 하고 마켓컬리에서 얼른 스윙칩을 주문했다. 그것도 5개나. 스윙칩은 내 최애 과자고, 2위는 썬칩이다. 썬칩도 똑같이 5개. 우리 가족들은 다들 썬칩을 좋아하기 때문에 금방 동난다. 썬칩은 예전에 단종 사태 이후로 더 애정을 가지게 된 것 같다.


사실 나는 감자과자를 별로 좋아하지 않았는데, 미드 ‘슈츠’에서 변호사들이 로펌에서 밤샐 때 야식으로 레이즈 감자칩을 먹는 것을 보고 갑자기 좋아하기 시작했다. 역시 무언가에 빠지는 데는 그것의 본질과 전혀 관계없는 황당한 계기가 있다. 그리고 스윙칩은 언제부터 좋아했는지 모르겠다. 기억이 안 난다. 역시 무언가를 좋아하는 건 아무 생각 없이 어느새 그렇게 되어 있는 법이다.


내게는 과자를 먹는 특별한 방법이 있다. 사실 그렇게 특별할 것은 없지만 내게는 기분이 아주 좋아지게 하는 의식과도 같은 방법이다. 우선 아주 힘든 일을 끝냈거나 기분이 안 좋은 하루였어야 한다. 그리고 코미디 요소가 있는 영화, 드라마, 만화를 준비한다. 로맨틱 코미디나 판타지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볼 수 있는 작품이어야 한다. 그리고 가장 중요한, 내가 좋아하는 과자, 초콜릿, 음료(보통 녹차나 커피 등 차 종류가 알맞다. 하지만 기분이 안 좋은 날엔 특히 맥주를 준비하는 게 좋다.) 등 먹을 것들을 다 준비해 놓는다. 지금부터 나는 이 자리에 누워 일어나지 않고 굴러다닐 거니까. 내가 지금부터 즐길 모든 것들은 내 두 팔을 뻗으면 손에 닿는 거리에 있어야 한다.


이는 내가 ‘호타루의 빛’이라는 일본 드라마 속 주인공 호타루를 따라 해온 것으로, 어느 순간 내게 일종의 엔터테인먼트 행위로 자리 잡았다. 음악을 듣거나 드라마와 영화를 보는 것처럼 집에서 재미있는 일을 하고 싶을 때 하는 취미활동 중 하나가 된 것이다.


호타루는 일명 ‘건어물녀’다. 건어물녀는 밖에서는 일처리를 똑 부러지게 하는 커리어우먼이지만 집에만 오면 바닥에 널브러져서 편안한 운동복 차림으로 과자와 맥주와 만화책을 즐기며 툇마루를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여성을 뜻한다. 대학생 때 나는 이 드라마를 보면서 연애세포가 말라버린 게으른 건어물녀 호타루의 엉뚱하고 귀여운 매력에 푹 빠질 수밖에 없었고, 내 이상향으로 삼기까지 했다.


이 드라마는 생각해 보면 전에 소개했던 내 최애 만화 ‘너는 펫’과 참 닮았다. (이 드라마도 만화가 원작이지만 왜인지 드라마만 봤다. 호타루 캐릭터에 찰떡인 배우 아야세 하루카 때문인 것 같다.) 두 작품에서 모두 여자 주인공이 직장에서는 멋있고 젊잖게 일하는데, 그런 모습만 알고 사랑해 주는 남자가 있는 반면, 집에 와서는 전혀 다른 허당인 모습을 하는데 그런 실체를 알고도 사랑해 주는 또 다른 남자가 있다. 여기엔 공통적으로 ‘나의 바보 같은 모습을, 아니 나의 그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해 줄 수 있는’ 남자를 원하는 여자들의 판타지 같은 바람이 투영되어 있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사회적인 가면을 쓰고 산다고 하는데, 드라마 ‘호타루의 빛’은 가면을 벗은 격식 차리지 않은 모습이 더 사랑스러울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다. 대학생 때 나는 이 드라마에 너무 감명받은 나머지, 꾸미는 것에 관심을 멀리하게 되었다. ‘그래, 나는 화려하게 꾸미지 않아도 추레한 차림의 나라도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을 만날 거야!’ 하고 생각하며… 이래서 TV는 바보상자라는 말이 있나 보다. 헛된 망상을 심어주니까. 드라마에서야 예쁘고 귀여운 아야세 하루카니까 어떤 모습이라도 사랑스러울 수 있는데, 과연 현실에서도 그럴까? 연인이 화장을 지운 다크서클 가득한 민낯에 낡아빠진 옷을 걸쳐도 사랑스러울 수 있는 건, 그 사람의 꾸민 모습을 먼저 보았기 때문에 가능하다고 생각한다. 아름다운 외관을 보았고, 그것과 연결된 내면을 알게 되고 사랑하게 되었고, 그렇게 그 사람을 전체로서 인식하게 되었기에 꾸미지 않은 모습은 이 사람의 일부일 뿐이라고 생각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럼에도 나를 있는 그대로 사랑해 주는 사람에 대한 환상과 희망은 지울 수 없다. 만화와 드라마는 내게 헛된 꿈을 갖게 했지만, 한 편으로는 내게 낭만주의와 낙관주의 가치관을 선물해 주었다. 살면서 힘들 때 나는 내가 좋아하는 만화와 드라마를 정주행 했고, 내가 그 주인공이라고 ‘착각’하며 귀엽고 힘차게 다시 파이팅을 외쳤다. 그 작품들마저 위로가 되지 않을 만큼 힘이 들었을 때에야 비로소 그게 착각이라는 것을 깨달았지만. 마치 어느 순간 산타가 실재하지 않은 것을 깨달은 아이처럼 말이다.


그래도 나는 해리포터가 실재하지 않지만 마법세계에 대한 동경과 환상을 끊을 수 없는 것처럼 만화와 드라마 속 세계처럼 해피엔딩이 올 것이란 믿음을 무작정 갖고 있다. 그래서 오늘도 내가 좋아하는 드라마 속 한 장면처럼 내 최애 과자인 스윙칩을 와그작 와그작 먹으며 인생만화를 정주행 하려 한다.

작가의 이전글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