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휴뮤 Dec 04. 2023

우리가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베네딕트 컴버배치의 '차일드 인 타임'을 보고

순전히 베네딕트 컴버배치를 믿고 선택한 이 영화는 딱히 재미가 느껴지는 영화는 아니었다. 하지만 가끔 그런 영화가 있지 않은가. 영화 자체는 재미없는데 영화를 보면서, 그리고 보고 나서 내 머릿속에 떠오르는 사고의 세계가 확장되고 마음이 채워지는 영화. 이 영화가 그랬다. 



딸아이의 실종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남편의 실수로 어린 딸아이가 실종됐다. 남편이 딸을 데리고 마트에 갔는데, 잠깐 계산하는 사이에 동화책 코너 앞에서 놀던 아이가 사라진 것이다. 부부는 끝내 딸을 찾지 못하고 상실감에 하루하루를 보내며 사이가 안 좋아지고 결국 별거하게 된다. 부부는 아이를 너무나 그리워해서 아이가 나오는 꿈을 꾸는 것은 물론 현실에서 딸아이의 환영을 보기도 한다. 아이가 실종되고 몇 년 후에는 남편이 길을 가다 지나가는 유치원생이 딸과 너무나도 닮았길래 따라가서 얼굴을 확인하고 자신의 딸이라고 확신하지만, 조사 결과 그 아이는 신분이 확실한 남의 집 아이였다. 아이가 실종된 부부가 어떤 마음으로 삶을 살아가는지를 끊임없이 보여주는 것이 이 영화다. 



오직 신 만이 아는 상황 


영화를 보는 내내 아이가 실종된 상황에 처한 부부의 감정에 이입되어 봤는데, 분명 아이가 어딘가에 있고 어떤 일이 벌어지고 있을 텐데 부모의 입장에서 그걸 모른다는 게 너무 답답했다. 오직 신만이 지금 어떤 상황인지를 알고 있는 상황. 이런 생각을 나는 고등학생 때 한 적이 있었다. 옛날 일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임에도 이 일은 내게 꽤 인상 깊은 일이었는지 아직까지도 기억이 난다. 그때 나는 어떤 중요한 물건을 깜빡하고 학교에 놓아두고 오는 바람에 집에 와서 답답해했던 적이 있는데, 한밤중에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든 것이다. ‘그 물건이 학교 사물함에 잘 들어 있는지는 오직 신만이 알겠지? 지금 그 물건의 상황을 아는 건 오직 신뿐이라는 게 신기하네.’ 마침 비가 억수로 쏟아지고 천둥 번개가 치던 어두컴컴한 밤이었기 때문에 더 그런 이상한 생각을 했던 것 같다. 그러니까 당시 나는 살면서 처음으로, 무언가 잃어버렸고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느끼는 감정을 깨닫게 된 것이다. 내가 잃어버린 것이 어디 있는지, 내가 과연 그것을 찾을 수 있을지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는 미지의 상황. 특히 그 잃어버린 대상이 이 영화에서처럼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라면, 알 수 없어 미칠 것 같은 그 느낌이 답답함을 넘어 기이하게 느껴질 것 같다.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시간여행 


‘타임’이라는 단어가 영화 제목에 들어가면 왠지 시간 여행이 소재일 것 같은 기대를 하게 된다. 이 영화는 판타지나 SF 장르라고 되어있지는 않았지만 영화를 보는 내내 어떤 신기한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멈출 수 없었다. 물론 역시나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지만, 관객의 기대를 조금이나마 채워주려 는 듯 간접적인 판타지 요소는 있었다. 아이를 잃어버렸다는 죄책감에 시달리던 남자는 별거하는 아내가 있는 시골 마을에 찾아가는데, 기차역에서 내려 걸어가는 길에 딸아이의 환영을 보고 쫓아간다. 그러나 아이는 보이지 않고, 그 길의 끝에 시골 마을의 외딴 펍에 다다른다. 여기서 남자는 창문을 통해 20대쯤 되어 보이는 젊은 여자와 눈이 마주치고 이상한 느낌을 받는다. 그리고 후에 남자가 자신의 어머니와 대화하는 과정에서, 어머니가 젊은 시절 바로 그 펍에서 창문을 통해 어떤 남자와 눈이 마주쳤는데 생각해 보니 지금의 남자(자신의 아들)와 정말 닮았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 아들을 낳기도 전에 아들이 성인이 된 모습과 마주친 적이 있다는 것이다. 이런 이야기는 이성적으로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지만 우리가 살면서 가끔 경험하는 믿을 수 없는 일들이 있다는 것에 공감하게 한다. 이를테면 태몽 같은 것 말이다. 믿을 수 없지만 믿고 싶어 하는 이야기들. 내가 경험했던 이야기 중 하나는, 우리 아빠가 어머니(나의 친할머니)가 돌아가시기 직전 우리 집 강아지가 이유 없이 허공에 대고 짖어대며 식탁을 몇 번이나 빙빙 돌았다는 것이다. 믿거나 말거나 우리는 이처럼 우리의 느낌과 믿음에 의존해 비이성적이지만 신기한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이런 것들이 우리가 경험하는, 경험할 수 있는 시간여행이 아닐까? 



천진난만을 잃어버린 어른 


아이가 실종된 사건이 일어난 한 편 이 영화를 이끌어가는 또 다른 이야기는, 남자의 절친한 친구가 점점 미쳐가는 것이었다. 그 친구는 정부 관료로, 고위 관료들이 신경 쓸 정도로 꽤나 잘 나가던 사람이었다. 그 런 그가 어느 날 한적한 시골의 숲이 딸린 외딴집으로 잠적하고, 도시에 있는 직장으로 돌아올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의 하루는 온종일 숲을 뛰어다니며 숲에 자신만의 아지트를 짓고 나무를 타고 올라가는 놀이를 하는 것이었다. 그러면서 말도 행동도 얼굴도 정신이 이상한 사람처럼 변해갔다. 그가 이렇게 미쳐갔던 이유는, 정부의 윗선으로부터 정의와 반대되는 정책을 수립하도록 협박과 강요를 받았고 결국 위에서 시키는 대로 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정부에서는 이 친구가 정부에 등을 돌리고 진실을 폭로할까 봐 그가 자유를 찾아 떠나온 숲 속까지 따라와 그를 감시하고, 그는 결국 그 압박감을 이기지 못하고 숲에서 나무에 목을 매달아 자살한 채로 발견된다. 친구가 자살하기 전, 아이를 잃어버린 주인공 남자가 미쳐가는 자신의 친구를 살피기 위해 찾아왔을 때, 이 친구는 '우리가 마음껏 뛰어놀던 어린 시절의 순수함을 잃어버렸다'라는 이야기를 한다. 나도 가끔 놀이터의 어린아이들을 보면서 ‘쟤네는 좋겠다, 아무 생각 없이 뛰어놀 수 있어서...’ 하고 생각하는데, 모든 어른들이 공감하는 이야기일 것이다. 이런 고찰은 피터팬을 소재로 한 영화 <웬디>에도 등장한다. 어떤 것에도 구속받지 않고 자유롭게 뛰어놀 수 있는 어린 시절을 우리는 잃어버렸다. 이것은 절대 다시 되찾을 수 없는 것이다. 이 사회의 규율에 발맞춰 살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어린 시절의 그 자유는 잃어버린 채 살아가야 한다. 



상실감에 대처하는 방법 


어쩌면 이 영화는 ‘잃어버린 것’에 대한 이야기일지도 모른다. 사랑하는 아이를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 자유로운 어린 시절을 잃어버리는 것. 그리고 그 잃어버린 것을 절대 다시 찾을 수 없는 상황에 처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생각하게 한다. 당신이라면 어떻게 할 것인가? 무언가를 영영 잃어버렸을 때, 너무나도 간절히 찾고 싶지만 다시는 찾을 수 없다면? 이 영화의 주인공들은 그 이루 말할 수 없는 상실감, 그리고 그것을 극복해 가는 과정을 담담하게 보여주고 있다. 영화의 결말에서 아이를 잃은 부모는 매일 일상에서 환영이 보일 정도로 그리운 딸아이를 결국은 찾을 수 없었지만, 계속해서 딸아이와 서로를 사랑하기로 한다. 계속 사랑하는 것이 이들이 택한 방법이다. 그리고 어느 순간 어린 남자아이의 환영을 본다. 그리고 아들이 태어난다. 또 다른 사랑할 대상이 찾아온다는 것, 이것이 이 영화의 결말이다. 우리는 상실감에 깊게 빠져 있을 때 극복하려고 무진장 애를 쓰지만 결국 극복할 방법을 찾지 못하고 계속 더 깊은 수렁에 빠지게 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 이유는, 우리가 애쓴다고 해서 상실감이 극복되는 게 아니고, 살다 보면 삶이 자연스레 우리를 극복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상실감을 느끼지 않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살다 보면 삶이 우리를 다른 감정의 방향으로 인도하는 어떤 순간이 찾아올 것이다. 우리는 그저 계속 사랑하면 된다. 잃어버린 것도, 지금 내게 주어진 것도, 앞으로 찾아올 것도. 





작가의 이전글 스키장에서 발견한 머피의 법칙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