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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뮤 Dec 24. 2023

이제 와 말하지만 당신이 정말 좋았어요

기억에 남는 그 사람에 대하여

어떤 사람이 기억에 남는다는 것은 그 사람이 내게 어떤 강렬한 감정이나 인상을 남겼고, 한 때 내가 하는 생각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음을 의미한다. 그래서인지 지금까지 내 인생에서 ‘기억에 남는 사람’이 누굴까 생각했을 때, 신기하게도 가족이나 친구들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의 이 소중한 사람들은 잔잔하게 내 삶에 스며들어 있는 사람들이니, 굳이 ‘기억’할 필요가 없다. 이들과는 계속해서 감정을 나누고 함께 현재를 살아가면 된다. 반면 내 기억에 남아 있는 사람은 과거의 사람이다. 지금 그 사람과 함께 밥을 먹거나 이야기를 나누지 못한다. 그리고 특히나 나의 경우엔, 내가 상대에 대해 느꼈던 좋은 감정을 온전히 전달하지 못했던 사람들이 더 기억에 남는다. 말하자면 ‘난 당신이라는 사람이 정말 좋아요’라는 표현을, 물론 이렇게 직접적으로는 아니지만, 미처 다 전달하지 못할 만큼 교류가 적었던 사람들이 기억에 남는다. 단순한 호감을 넘어 많이 좋아했지만 상대방은 내가 그랬는 줄 아마 모를 것이다. 마치 짝사랑과 같았던 두 사람에 대한 기억을 적어보고자 한다. 짝사랑이 아니라 ‘짝사랑과 같은’ 이유는, 나는 남자를 좋아하고, 내가 쓰려는 이야기는 모두 여자에 대한 기억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사람은 중국어 회화 수업에서 만난 여자분이다. 나는 이 분의 연락처도 갖고 있어서 가끔 카톡 프로필이 업데이트되면 ‘오!’하면서 흥미롭게 훔쳐보기도 하지만, 연락할 용기는 없다. 우리는 중국어 회화 수업에서 같은 조가 되어 중국어로 연극을 같이 한 사이다. 조 모임을 할 때 말고는 따로 만난 적이 없다. 아쉽다. 용기 내서 밥 한 번 먹자고 할 걸 그랬나... 이 분을 잘 몰랐을 때의 첫인상은 도도했다. 무표정일 때가 많고 무표정도 도도하고 시크한 느낌이었다. 그런데 반전이 있었다. 알고 보니 굉장히 잘 웃는 사람이었다. 게다가 나랑 유머코드가 정말 잘 통했다.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우리 조에 엉뚱하고 조금 이상한 남자분이 한 명 있었다. 이 분이 가끔 이상한 말을 할 때 우리는 약속이나 한 듯이 동시에 웃음을 터뜨렸다. 또 같이 연극 대본을 만들고 연습을 하면서 다른 조원들은 그렇게 크게 웃지 않는데 우리만 웃겨 죽겠어서 깔깔거리는 순간들이 많았다. 같이 빵 터지며 웃느라 배 아파본 경험은 고등학교 때 이후로 거의 처음이었다. 별 것 아닌 일에 깔깔대는 게 이렇게 기분 좋고 재미있는 일이었나 새삼스럽기도 했다. 몇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그분의 일자 뱅 앞머리를 한 단발머리, 까무잡잡한 피부, 볼살이 귀엽게 통통한 얼굴, 진한 핑크색 틴트를 발라 촉촉해 보이던 붕어같이 도톰한 입술이 떠오른다. (다시 말하지만 나는 남자를 좋아한다...) 그 귀여운 입술이 도도하게 닫혀있다가, 웃음거리를 만난 순간 입꼬리가 씰룩거리다가 웃음이 빵 터지며 깔깔대곤 했다. 그렇게 한참을 웃고 나면 두 볼이 빨갛게 상기되고 신나고 흥분한 상태가 되는데, 그래도 모자라서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끅끅대는... 하, 다시 돌아가고 싶은 순간이다. 살면서 가끔씩 몇 번이나 이때의 감정과 기억이 떠올랐지만, 이 분께 직접 이야기한 적은 없다. 우리는 아마 유머코드만큼이나 성격도 비슷해서 먼저 친구 하자는 말을 서로 못 꺼낸 것일지도 모른다. 이렇게 아쉬울 줄 알았으면 친구 하자고 할 걸 그랬나 보다. 하지만 과거로 돌아간다 해도, 우린 아마 깔깔 웃고, 연극을 마치고, 이렇게 헤어졌을 것 같다. 그저 그때 같이 웃었던 그 순간이 좋았던 거니까. 왠지 우리 둘 다 그거면 됐다, 참 좋았다-하고 생각할 것 같다.


두 번째로 기억에 남는 사람은 고등학교 때 법과 사회 선생님이다. 당시 나이 많은 선생님들 사이에서 서른 초중반 정도였던 젊은 여자 선생님인데, 포스가 남달랐다. 이 분은 정말 강의를 잘하고 말투가 굉장히 멋있었다. 옷 입는 것도 보이시하게 재킷과 바지를 주로 입으셨고, 법학 용어를 말하며 재판 사례를 변호사처럼 이야기하는 것도 정말 멋졌다. 너무 멋있어서 나는 이 선생님은 어릴 때부터 저렇게 말을 멋있게 한 걸까, 아니면 선생님이 되어서 저런 말투를 익히게 된 것일까 궁금하기도 했다. 나는 이때 법사선생님의 영향으로 법학을 좋아하게 되었고 대학교에 와서도 법학 수업을 많이 들었다. 이 선생님이 특히 매력적이었던 것은 멋있는 동시에 귀여운 면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었다. 하얗고 볼살 있는 조금 넓적한 얼굴에 쌍꺼풀이 없는 눈이어서 마치 통통한 고양이를 연상케 했다. 지금 생각해 보니 레드벨벳 슬기의 통통한 모습을 생각하면 될 것 같다. 당시엔 레드벨벳이 없었으니 몰랐지만. 웃을 때 코를 찡긋하는 기분 좋은 표정을 짓는 것도 좋았다. 그리고 판서하는 글씨체가 정갈하고 예뻤다. 그래서 나는 이때 내가 그때까지 쓰던 글씨체를 버리고 이 분의 글씨체를 따라 하기 시작했다. 누구의 글씨체를 따라 연습을 하기는 또 난생처음이었던 것 같다. 그 정도로 당시 나는 ‘법사쌤 덕후’였다. 그래서 이 분의 모든 것이 궁금했고, 어쩌다 교무실에서 이 분의 컴퓨터를 훔쳐보고 ‘브로콜리너마저’ 라는 인디밴드 음악을 즐겨 들으신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나도 그때부터 브로콜리너마저의 팬이 되었다. 기억을 더듬어보니 또 생각나는 게 있다. 나는 학교 안에서 돌아다닐 때 법사선생님과 마주치길 기대한 적이 많았다. 마주쳐서 눈을 맞추고 인사하고 나라는 존재를 알리는 게 기분이 참 좋았다. 이 선생님에 대한 나의 감정은 무엇이었을까? 멋있는 강의에 대한 존경심, 30대 여성에 대한 동경, 귀여운 모습에 대한 팬심 등 많은 감정들이 합쳐져선 이 분에 대한 강렬한 감정과 기억을 만들어냈던 것 같다. 이 분은 내가 이렇게 당신을 많이 좋아하고 생각했는지 모르겠지만, 내게는 10대 시절 내 머릿속의 많은 부분을 차지했던 사람으로 기억한다.


돌이켜보니 나는 여자분들 덕질을 많이 해왔다. 십 년이 넘게 가수 보아의 덕질을 하고 있는 것도 그렇고, 매력적인 여자를 보면 팬이 되길 자처한다. 내가 바라는 이상향을 좇는 것일까? 아니면 미학적 관점에서, 또는 인간적으로 호감을 느끼는 것일까? 어떤 이유에서건 무언가를 좋아했고 좋아하는 것은 분명 기분 좋은 일이다. 짝사랑처럼 애틋한 기억이지만 아쉬움보다 따뜻함이 더 많이 느껴지는 기억들이다. 그래서 이렇게 글로도 남겼으니, 몇 년이 지나도 몇십 년이 지나도 내 기억 속 그 자리에 따스하게 머물러주었으면 좋겠다. 제가 많이 좋아하니까, 그대로 거기에 오랫동안 머물러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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