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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휴뮤 Oct 28. 2023

여행, 슬픔과 멀어지는 순간

홍콩의 밤 풍경과 불빛들을 기억하며

몇 년 전 홍콩 여행에서 밤 페리를 타고 Carole King의 'So Far Away'를 듣게 됐는데, 문득 내가 한국에 두고 온 일상과 정말 멀리 떨어져 있다는 생각을 하며 핸드폰 메모를 켜고 이런 글을 적었다.


가끔씩은,

나에게 슬프게 다가오는 것들에 대해서

무상(無想)으로 대할 필요가 있다.

여행지에서 이렇게

마치 이 세상에 나를 제약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는 듯한 자유를 느끼게 하는,

그런 물리적 환경에서

그 순간을 즐기며 말이다.


이때의 홍콩 여행을 같이 간 친구들과는 꼭 여행 가서 야경을 보면서 함께 좋은 음악을 듣는 관습 같은 것이 있다. 그 음악들이 우리만의 여행 테마곡이 되곤 했다. 하지만 이 날만은 다른 때와는 다르게 각자 이어폰을 꽂고 자기만의 시간을 가졌다. 다들 자기만의 힘든 때를 보내고 있던 시기라 그랬을까. 지금은 다 해결된 고민들이니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밤바람을 맞으며 고민을 나누던 근심 어린 얼굴들이 생각난다. 당시 나는 준비하던 시험을 그만두고 취준 시장에 뛰어들어 막막한 때였다. 이런 우리에게 여행은 자유와 일탈 그 자체였다. 여행지에서 이동하는 중간중간 각자의 고민을 이야기하는 시간도 있었지만, 어느새 홍콩 거리의 분주하고 화려한 감성에 젖어 일상의 고민 따윈 잊어버리고 예쁜 사진을 찍고 맛있는 음식에 집중하기 바빴다.


여행이 우리에게 주는 위로는 이처럼 간단하면서도 굉장한 무게를 가지고 있다. 나를 정의하고 내가 관계 맺고 있는 일상이 아닌, 전혀 다른 세계에서 아무런 제약 없이 자유롭게 살아가는 삶을 체험하게 만들어주는 것이 바로 여행이다. 여행지에서 내 안의 고민과 슬픔을 까맣게 잊어버리는 순간, 나는 오로지 지금 이 순간만을 즐기는 자유인이 되어 홀가분해진다.


한 편으로 여행은 힘들었던 시절을 아주 웃긴 기억들로 색칠해 180도 분위기를 전환시켜 주기도 한다. 홍콩 여행 당시 한 친구는 갓 입사한 회사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아 힘들어했다. 여행의 마지막 날 밤, 우리는 미리 찾아두었던 분위기 좋은 펍에 갔는데 그 친구는 맥주를 무진장 들이켜고 다른 테이블의 외국인 친구들과 합석까지 하며 정신없이 마셔댔다. 우리는 ‘쟤가 저렇게 처음 보는 사람들과 와하하 어울리는 친구가 아닌데 신기하다’ 하며 그 진풍경을 정말 재미있게 구경했다. 그리고 숙소로 돌아오는 길 내내 타지의 거리 곳곳에 그날 밤의 여파를 쏟아내는 친구의 모습을 보면서 다 같이 웃겨 죽는 줄 알았다. 물론 이 모든 아름다운 광경을 동영상으로 남겼고 아직까지도 우리는 모이기만 하면 꼭 그날 밤의 그 친구 이야기를 하며 놀려댄다.


나는 어쩌면 그때의 홍콩 여행이 이 친구의 소심한 구석을 조금은 대담한 성격으로 바꿔준 것이 아닐까 싶기도 하다. 그 친구는 홍콩 여행 당시 그렇게 힘들어하던 그 회사에 끈질기게 다니고 있으며 연봉협상을 하고 30대 초반에 과장까지 달았으니 말이다. 내가 좋아하는 책의 한 구절 중에 '시간은 좀처럼 사람을 바꾸지 못하지만, 공간은 기필코 사람을 바꾼다'라는 말이 있다. 여행은 그러한 공간의 마법에 빠질 수 있는 곳이다.


해외여행을 자주 가진 못하더라도 여행지에서 깨달았던 바를 일상에서도 한 번씩 상기하면서 살아가고 싶다. 일상이나 인간관계에서 지치고 힘들 때, 마치 여행지에서 느꼈던 감정처럼 ‘내게는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아무 생각 없이 ‘무상(無想)’으로 대하는 것이다. 즐겁고 웃긴 일들에 초점을 맞추고 사는 것. 재밌었던 그때 그 여행의 느낌처럼 말이다. 여행의 다른 말이 '여기서 행복할 것'이라는 말도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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