익숙함은 괜찮은 게 아니야
이젠 익숙하지 뭐
때때로 사람들은, 특히 어른들은 익숙하기에 괜찮다는 말을 하곤 한다. 회사에서 상사에게 된통 까이고 돌아온 저녁, 아르바이트 손님의 모욕적인 삿대질을 어떻게든 웃어넘기고 돌아가는 퇴근길, 주말 저녁 만날 사람 없이 멍하니 바라보는 방 안 천장의 장면이 수 없이 반복되고 난 후다. 오랜만에 만난 친구의 괜찮냐는 물음에, 안부를 물어오는 부모님의 전화에, '나 지금 괜찮은가?'라는 스스로의 질문에 어깨를 으쓱하며 덤덤하게 내뱉는 익숙함이라는 말은 그들에게 어떤 의미일까.
겉으로 보기에 그들은 삶에서 부딪쳐온 갖은 풍파를 견뎌내며 더 단단해진 것처럼 보인다. 손바닥에 박힌 굳은살처럼 그들을 콕콕 찌르는 세상의 비수에 무뎌진 것이다. 그들은 강해 보였다. 그렇게 아픔에, 외로움에 무뎌지면서 강해진 사람이 비로소 어른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익숙함이란 인생 좀 살아본 어른들의 쿨함이었다. 수십 번 부딪쳐 봤기에 아무렇지 않은 듯 의연하게 넘겨내는 것이 어른이고 익숙함이라고 믿었다. 내게 익숙하다는 말은 '나는 이만큼 강해졌으니 이제 괜찮아.'라는 뜻이었다.
올해 스물다섯 살이 되었다. 아직 어른이라고 하기엔 모자라지만 이 정도 살다 보니 내게도 익숙한 것들이 생겼다. 때문에 스스로 조금은 강해졌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누군가 '너 정말 괜찮아?'라고 물어온다면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할 것 같다. 이제야 깨달았다. 익숙한 건 괜찮다는 뜻이 아니었다.
익숙한 건 괜찮은 게 아니야
익숙함은 지금까지 수 차례 겪어 왔다는 뜻이었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 않다는 뜻은 아니었다. 아무리 열 번을 찔려봤어도 같은 곳을 찔리면 똑같이 아픈 게 사람 마음이었다. 익숙하다는 말 뒤에는 사실 이 악물고 차오르는 울음을 꾹 참으며 어떻게든 버티려고 애쓰는 그들이 있었다. 친구와 가족들이 걱정하지 않도록, 스스로가 나약해지지 않도록, 아프다는 말을 손에 꽉 쥐어 등 뒤로 숨긴 다음 애써 웃으며 내놓는 말이 "익숙해."였다. 익숙하다는 말은 괜찮다는 말이 아니라 '나 사실 아픈데 지금 참고 있어.'라는 말이었다.
왠진 모르지만 어른들은 익숙해야 했다. 그들은 강한 척해야 했다. 그들은 익숙해서 괜찮다고 웃어넘기며 내일을 일어나야 했다. 세상은 어른들의 아픔을 용인하지 않았다. 어느 순간부터 어른은 그래야만 했다. 나이 좀 먹고 세상 물정 좀 배웠으면 힘들어도 참고 괜찮다고 말하는 게 어른의 미덕이 되어 있었다. 실제로 나이 먹고 하는 푸념은 어디서도 환영받지 못했다.
어렸을 때 넘어져서 상처가 생기면 재빨리 약을 바르고 반창고를 붙였다. 상처가 덧나지 않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런데 어른이 되고 나면 전처럼 상처를 들여다보지 않게 된다. 상처는 아프고 신경쓰이지만 어른이니까 애써 괜찮은 척 덮어놓는다. 근데 상처라는 건 어릴 때는 금방 아물지만 나이가 먹을수록 아물기까지 더 오랜 시간이 필요하다. 오히려 어릴 때보다 어른이 되고 나서 생긴 상처를 더 신경 써야 한다는 뜻이다. 안 그러면 상처가 금방 덧나 우릴 더 아프게 할지 모른다. 그러니까 익숙하다고 애써 괜찮은 척 버티지 말고 안 괜찮다고 말해라. 나 지금 힘들다고, 아프다고, 울 것 같다고 말해라. 우리는 나이가 들수록 더 솔직해질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