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을 핑계로 그들에게서 애써 고개 돌렸기 때문에
김승섭 교수의 책 『아픔이 길이 되려면』에는 리처드 클랩(Richard Clapp)이라는 한 보스턴 보건대학원 교수에 대한 이야기가 실려있다. 리처드 클랩 교수는 2001년 봄, 캘리포니아의 IBM 공장에서 일했던 노동자 200명의 직업병 소송을 위한 연구를 해줄 수 있겠냐는 전화를 받는다. 대기업이라는 거대 자본에 맞서 연구를 진행하기 위해서는 대기업을 비롯한 관련 언론들의 수많은 압박을 감수해야 함에도 리처드 클랩 교수는 이 제안을 받아들인다. 그는 바로 소송을 위해 여러 문헌과 자료들을 조사하여 노동자들의 직업병을 증명할 수 있는 결과물을 법정에 제출한다.
하지만 역시 우려했듯이 클랩 교수는 이 과정에서 대기업 측이 고용한 변호사들의 시비 전화에 길게는 하루 8시간 이상씩 시달려야 했고 언론들에 편파적인 보도에 의해 교수로서의 명예가 실추당하기도 했다. 그리고 끝내 그는 소송에서 패배하고 만다. 하지만 소송의 결과와 상관없이 리처드 클랩 교수의 행보는 그 자체로 힘없는 약자들에게 희망적인 메시지를 전달한다. '나는 당신들 곁에 있다.'는 작지만 강한 울림을 말이다. '왜 이런 일을 하냐.'는 한 미국 저널 인터뷰어의 질문에 대한 클랩 교수의 답변은 마음 한 구석에서 울컥하는 무언가 올라오게 만든다.
내게 어릴 적 TV에 나오는 만화영화 속 주인공들을 동경의 대상이었다. 정의와 이타심으로 똘똘 뭉쳐 타인을 위해 스스로의 손해와 희생을 주저하지 않는 그들은 어린 나의 우상이었다. 나도 그들과 같은 어른이 되고 싶었다. 하지만 나이를 먹고 머리가 조금 크고 난 후에 만화영화 속 세상은 현실과 다르다는 것을 깨달았다. 세상은 생각보다 냉정했고 이기적일수록 살아남기 쉬웠다. 만화영화 주인공들처럼 살다 간 미련하다며 손가락질받기 십상이었다. 나는 결국 마음 한편에 남아있던 일말의 동경을 뒤로하고 어릴 적 나의 우상이었던 그들에게 작별을 고했다. "현실은 원래 이런 거야."라고 말하며.
그렇게 나는 현실에 적응해 나갔다. 이렇게 사는 게 당연한 것이라 생각했다. 그러다 만화영화 대신 틀었던 뉴스에서 사회에서 벌어지는 여러 비극적인 소식들을 접했다. 내가 현실과 타협하고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평범한 일상을 이어나가고 있는 사이 누군가는 정체성을 부정당하고 누군가는 일자리를 잃고 누군가는 갑작스레 소중한 자식을 떠나보내며 무너진 일상 아래에서 흐느끼고 있었다. 내가 친구들과 술을 마시고 여행을 다니고 할 일 없이 침대에 누워 하루를 낭비하고 있을 때에 그들은 사회의 차가운 시선과 외면 속에서 억울함과 부당함을, 가족을 잃은 슬픔을 견디며 몸을 떨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나는 만화영화 속 주인공이 아니었다. 내게 그들을 위해 무언가 노력해야 할 의무는 없었다. 내겐 내 시간을 쏟아 하고 싶은 일이 있고 누리고 싶은 삶이 있었다. 그러기 위해선 그들이 얼마나 아프든 간에 나는 내 삶에 집중해야 했다. 비겁한 게 아니었다. 당연한 거였다.
하지만 내가 스스로의 욕망에 충실한 삶을 이어나가고 있는 와중에도 클랩 교수처럼 약자들의 편에서 그들의 힘이 되어주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약자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고 권익을 보호하기 위한 단체를 만들고 연구를 진행하고 억울함과 부당함을 변호하고 아픈 상처를 치료해줬다. 그들은 때론 자신의 손해를 감수하고 희생하면서 상처받은 약자들의 곁을 지켰다. 개중에는 나와 같은 또래들도 있었다. 비록 미약한 보탬일지라도 그들은 나름대로의 방법으로 움직임에 동참했다. 그들은 마치 만화영화 속 주인공들처럼 미련하면서도 용감하고 씩씩하며 무엇보다 강했다.
그들은 어떻게 그렇게 강할 수 있었을까. 단순히 그들이 나보다 더 똑똑하고 능력있는 사람들이었기 때문에? 그들에게 그럴 수 있는 사회적 지위와 힘이 있었기 때문에? 나는 중요한 건 그런게 아니란 걸 알았다. 나는 그저 비극의 둘레 밖에서 그들을 방관하며 내 편안하고 안정적인 일상을 영위하고 싶었을 뿐이다. 그들에게 관심을 쏟을 시간에 놀고, 먹고, 하고싶은 일을 하며 쉬고 싶었을 뿐이었다.
문득 영화 '동주'의 마지막 장면이 떠올랐다.
"당신 말을 들으니까 정말로 부끄러운 생각이 들어서 못하겠습니다. 이런 세상에 태어나서 시를 쓰기를 바라고 시인이 되기를 원했던 게 너무 부끄럽고… 앞장서지 못하고 그림자처럼 따라다니기만 한 게 부끄러워서 서명 못하겠습니다……." ― 영화 「동주」中
난세에 태어나 시를 쓰고자 했던 스스로를 부끄럽다고 고백하는 동주의 울먹임이 머릿 속을 울렸다. 동주가 왜 그토록 스스로를 부끄러워 했는지 알 것 같았다. 나에게도 동주와 같은 부끄러움이 발끝에서부터 밀려왔다. 글을 쓰고자 문학을 공부한 내가 사회에 나가 기여할 수 있는 바는 무엇일까. 차라리 내가 좀 더 열심히 공부해서 법학이나 의학을 공부했다면, 하다못해 심리학이나 상담학이라도 공부할 수 있었다면 더 의미있는 일들을 할 수 있었을텐데…, 타인의 비극을 방관하지 않았다면…, 작은 일이라도 할 수 있는 일을 찾으려 노력했다면…, 수많은 가정들이 부끄러움과 뒤섞여 머릿 속을 부유했다.
나도 안다. 내가 잘못한 게 아니라는 사실을. 하지만 내게 타인의 아픔을 공감할 수 있는 일말의 감수성이 남아있다면 나는 부끄러워야 했다. 나는 부끄럽다.
참고
김승섭, 『아픔이 길이 되려면』, 동아시아, 20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