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행사 출신 마케터의 스타트업 생존기 ①
지난 8월 3년 넘게 다닌 회사(대행사)를 퇴사했다.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여러 고민이 있었지만 결과적으론 내게 필요한 선택이었다고 생각한다.
퇴사를 결심하기까지 여러 고민이 있었다. 그 중에서도 커리어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가 나아가고 싶은 커리어의 방향과 대행사에서의 경험 사이에 간극이 느껴졌다. 관련해서 내가 했던 고민들을 이어지는 글을 통해 간단히 공유해 보고자 한다.
이전 회사는 직원이 170명 정도 되는 꽤 규모가 있는 디지털 광고대행사였다. 운이 좋게도 회사는 내가 입사한 후 빠르게 성장하기 시작했다. 입사 당시 60명 정도였던 인원이 1년도 채 되지 않아 120명 수준으로 2배가 넘게 늘어났다. 회사의 빠른 성장 속도에 맞춰 다양한 기회들이 생겨났다. 그리고 나는 운이 좋게도 그러한 기회들을 발판 삼아 동연차 대비 빠르게 성장할 수 있었다. 물론 그 기회라는 게 마냥 쉬운 일들은 아니었기에 중간중간 도망치고 싶은 위기가 찾아오기도 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도망치지 않았고 당시의 경험들은 내 커리어에 있어 굉장한 밑거름으로 남았다. 지금 돌아봐도 참 감사한 시간이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작년 하반기부터 스스로가 더 이상 성장하고 있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담당하고 있는 캠페인은 안정적으로 운영되고 있었고 프로젝트 내 인력도 충분했던 덕에 맡고 있던 업무도 빠르게 위임할 수 있었다. 결과적으로 안정화가 끝난 이후 내가 해야 할 실질적인 업무는 많지 않았다. 가끔씩 프로모션 등 리소스를 집중해야 하는 시기를 제외하고는 담당 파트의 업무를 관리하고 조율하는 정도의 리소스만으로도 캠페인이 문제 없이 운영될 수 있었다. 즉, 일이 별로 없었다. (오해하면 안될 게 내가 일이 많지 않았을 뿐 회사는 전체적으로 굉장히 바빴다. 당시 밤샘 근무를 일삼던 다른 팀 동료들을 보며 약간의 죄책감을 느꼈다...)
회사가 빠르게 성장하던 시기에는 하나의 일이 마무리되면 곧장 새로운 일들이 생겨났다. 새로운 일들은 항상 챌린지로 다가왔고 때문에 이를 하나씩 해결해 나갈 때마다 스스로 성장하고 있다는 느낌을 받을 수 있었다. 하지만 회사의 성장이 완만해지면서 새로운 일보단 기존에 하고 있던 일을 안정적으로 유지하는 게 더 중요해지기 시작했다. 그렇게 똑같은 캠페인만 담당한 지 1년 반. 작년부터 느꼈던 성장의 정체감이 조금 더 피부로 와닿기 시작했다. 물론 같은 프로젝트에서도 새롭게 배울 것들이 있긴 했지만 대부분의 업무는 루틴하게 이루어졌고, 무엇보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해당 캠페인에서 내가 할 일은 많지 않았다. 이 상태로 시간이 계속 흐른다면 몸이야 편하겠지만 내 커리어에 있어서는 오히려 독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때부터 마음 속으로 퇴사를 고민하기 시작했다.
지난 4월 마켓핏랩에서 주관하는 그로스해킹 관련 컨퍼런스에 다녀온 적이 있다. 해당 컨퍼런스는 나에게 꽤나 큰 충격을 안겨주었는데 이것이 내 퇴사 결심에도 어느정도 영향을 미쳤다.
당연한 이야기이지만 대행사의 업무는 '마케팅'이라는 한정된 영역에서만 이루어진다. 특히 퍼포먼스 마케팅을 대행하는 대행사의 경우 그 영역이 '페이드 매체'라는 보다 좁은 범위에 국한되고 만다. 하지만 컨퍼런스에서 진행된 여러 세션들을 들으며 처음으로 마케팅이 아닌 '제품(Product)'의 중요성에 대해 실감할 수 있었다. 그 전까지는 우리가 마케팅만 잘 해낸다면, 페이드 매체의 효율만 극대화할 수 있다면 비즈니스 성장에 큰 임팩트를 만들어낼 수 있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하지만 비즈니스의 진짜 성장이란 결국 마케팅 뿐 아니라 제품까지 잘 연계되었을 때 가능하다는 사실을 그때 깨달았다. 그리고 동시에 마케팅말고 제품까지 함께 아우를 수 있는 역량을 키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마케팅도 디테일하게 파고들수록 전문성이 필요한 영역이고, 그 디테일의 차이가 캠페인 성과에 영향을 미친다는 사실은 실제 현업에 있었던 만큼 누구보다 잘 알고있다. 하지만 나는 마케팅 전문가 보다는 비즈니스 성장을 만들 수 있는, 굳이 말하자면 '그로스 전문가'가 되고 싶은 마음이 더 컸다. 결과적으로 내가 '지금 당장' 하고 싶은 일은 더 이상 대행사에 있지 않았다. 나는 인하우스에 가고 싶었다.
대행사의 주된 퇴사 사유는 아무래도 높은 업무 강도로 인한 번아웃인데, 앞에서도 말했지만... 나는 다행히도 그런 케이스는 아니었다. 내가 대행업에 회의감을 느낀 이유는 결국 이 일이 '대행'이라는 사실 때문이었다.
대행을 맡긴다는 건 정말 우리 브랜드의 마케팅 전략을 함께 고민해 줄 '파트너' 역할을 찾는 경우도 있겠지만, 경우에 따라 내부에서 소화하기에는 손이 많이가고 업무 자체의 '질'이 낮은 과업을 단순히 '실행'해 줄 곳이 필요한 경우도 많다. 후자의 경우 대행사에서 주도적으로 업무를 이끌어 나갈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다. 업무를 주도적으로 하는 것과 단순히 주어진 일을 차질 없이 수행하는 것 중 당연히 전자의 경험이 시간이 흘렀을 때 커리어적으로 훨씬 의미있는 자산으로 남는다. 하지만 내가 대행사에서 어떤 유형의 광고주를 맡게 될 지는 순전히 운에 달려있다. 운이 나쁜 경우 1년 내내 검색광고의 키워드 확장만 수 만개씩 하다가 시간이 가버릴 수도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대행사에서는 '주어진 일을 차질 없이 수행하는 것'만으로도 나름의 역량을 인정받을 수 있다. 나는 어느 순간 내가 이런 내부에서의 인정에 스스로 안주해버릴까봐 그게 두려웠다. 복잡한 문제에 도전하지 않고 적당히 해야 할 일만 무난하게 해내는 그런 직장인이 되고 싶지 않았다. 그렇게 나는 퇴사를 하기로 결심했다.
위와 같은 이유들로 퇴사한 후 나는 현재 작은 스타트업에서 마케터로 일하고 있는 중이다. 글을 쓰고 있는 시점에서 일한 지 이제 2주 정도 밖에 지나지 않았지만 이곳에서 하는 일이 아직까지는 너무 새롭고 즐겁다. 스타트업인 만큼 앞으로 해결해 나가야 할 문제들도 많지만 이것들을 해결했을 때 스스로 이전보다는 분명 더 성장해 있을 것이란 확신이 든다. 앞으로 이어지는 글들에서는 스타트업에 적응해 나가는 과정과 그 과정에서 생길 크고 작은 이야기들에 대해서 적어보고자 한다. 앞으로의 회사 생활이 나의 기대만큼 이어질지는 모르겠지만 어떤 식으로든 내 커리어에 있어 중요한 전환기로 남을 것은 분명할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