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시의 "한" 두렌데로 승화하다.
무대의 조명이 서서히 암전 상태에 이르자 공연을 기다리며 조심스레 목을 가다듬는 관객들의 기침 소리가 여기저기에서 들려온다. 곧이어 농밀한 어둠의 고요를 타고 탄식에 가까운 남자 가수의 한 소리가 소극장을 가득 메운다, 심연의 깊이에서 나오는 한마디의 탄식과 느린 박자로 울려 퍼지는 발 구르는(Zapateado, 구두의 뒷굽을 이용해 바닥을 가볍게 차는 행위) 소리는 극장의 적막에 방심했던 관객들의 가슴을 두드리며 서서히 한 줄기 빛으로 내려온다. 제법 연륜이 보이는 남자 무희는 관객들이 소리의 주체에 대해 궁금증을 가질 적당한 시점에 빛을 등진 실루엣으로 서서히 모습을 드러낸다. 외줄기 빛이 무대에 쏟아지고 청각만으로 무대를 감상하던 관객들이 어둠에 묶어 두었던 몸을 푸는 모습들이 곳곳에서 보인다. 공연장엔 여전히 얼굴이 보이지 않는 남성의 음울하고 깊은 탄식의 노래가 울려 퍼진다. 나는 이미 공연의 시작에서 영혼의 소리를 듣게 된다.
그라나다의 봄은 도시의 골목에서 벌어지는 플라멩코 축제로부터 시작된다. 플라멩코 의상을 입은 체 엄마의 손을 잡고 공연장으로 향하는 어린 소녀부터 플라멩코와 함께 한 시간이 제법됐을 법한 장성한 여성에 이르기까지 나풀거리는 플라멩코의 의상이 고색의 골목길을 화려하게 수놓는다. 공연을 보기 위해 몰려든 관중의 환호와 가설무대의 멀찍한 뒤편에서 호객을 요량으로 거리의 악사가 풀어내는 어깨를 들썩이게 하는 바이얼린 소리, 그리고 거대한 비눗방울을 만들어 내며 사람들의 시선을 모으는 상인, 아이들의 관심을 끌 만한 완구와 풍선을 몸에 짊어지고 행인들의 관심을 끌기 위해 안간힘을 쓰는 사람들의 분주한 모습에서 그라나다의 정열을 느낄 수 있다. 무대 위 무희들은 짙은 화장과 원색의 화려함에 눈길을 돌릴 수 없는 드레스 그리고 찰랑거리며 무희의 움직임에 따라 율동하는 프린지 귀걸이로 관객들의 시선을 한 몸에 받고 있다. 사람들은 저마다 봄볕이 반짝이는 공간으로 나와 무희들의 모습을 촬영하고 환호하고 박수를 친다. 플라멩코 무희들의 춤사위와 음악으로 그라나다의 봄이 완성되는 느낌이다, 그라나다의 봄이 플라멩코의 아픈 역사와 함께 시작된다.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방의 전통무용이자 민요인 플라멩코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프라멩코의 정신적 기반인 “두엔데Duende”를 이해해야 한다. 한국인의 정서에 ‘한“이 흐르고 우리의 민요가 한의 정서에 기반을 두듯 ”두엔데“는 플라멩코를 살아 숨 쉬게 하는 근본이자 정신이다. 두엔데는 절정의 정신적인 체험을 의미한다. 바닥을 차고 손뼉을 부딪치며 춤추는 무희와 팔메로스(Palmeros, 박수와 추임새, 그리고 탄식으로 노래하는 사람)가 어우러져 격정적인 춤을 추면 어느 순간 접신接神의 경지랄 수 있는 절정에 이르게 되는데 이를 ”두엔데“라 설명할 수있다. 플라멩코는 정열적인 춤사위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는 아픈 배경을 가진 문화의 산물이다. 인도의 가난을 피해 15세기 스페인 남부에 정착한 집시Gypsy들은 이방인으로서 그들이 받아야 할 억압과 폭력적인 사회에 대한 저항으로 '플라멩코'라는 그들의 표현 방식을 만들어 냈다. 통상 '집시'로 불린 이들은 ”평원의 도망자Ruma-Calk“라 자칭했다. 15세기말까지 유목으로 삶을 지탱하며, 방랑의 시름을 잊기 위해 노래하고 율동하며 즉흥적인 여흥에 몰두해 삶의 시름을 잊던 집시들의 예술 활동은, 세월이 흐름에 따라 리듬이 가미되고 율동은 진화하고 무어족과 가톨릭의 문화가 융화되며 긴 세월에 거쳐 스페인 안달루시아 지역의 토착문화에서 세계적인 문화유산으로 성장하게 됐다.
화려한 의상과 춤으로 관객을 매료시키는 플라멩코
플라멩코의 노래 Cante의 주제는 비루한 삶으로부터 인간의 존엄을 지키기 위한 저항정신이나 연인과의 사랑 등을 노래한다. 저항정신을 담은 대표적인 노래는”큰 말의 자장가 Nana del Caballo Grande” 로 억압과 폭력에 맞선 데 라 이슬라(Camarón de la Isla)는 이 노래에서 집시들이 말을 타고 도망치는 장면을 묘사하는데 “검은 말아/네가 죽은 기수를 어디로 데려가는 거니?/짙은 밤은/길을 볼 수 없게 하고/바람이 쌩쌩 분다/바람이 쌩쌩 분다.”고 노래하며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자신의 처지를 한탄하고 있다.한편으로는 사랑을 노래한 솔레아Soleá는 플라멩코의 대표적인 장르로, 연민, 슬픔과 같은 인간사의 정서를 표현하고 있다. 솔레아의 가사는 정해진 형식이 없이 다양한 변화를 추구할 수 있지만 가사에는 “네가 나를 사랑하지 않는다 해도/그건 중요하지 않아/내게 정말 중요한 건 /내가 널 사랑한다는 거야”와 같은 가사가 들어간다.
기타의 선율에 몸을 맡긴 무아지경의 댄서, 두렌데의 순간이다.
우리의 선조들은 익살스러운 말이나 행동을 섞은 해학을 통해 사회현상에 대한 비판과 저항을 표현했고 이는 민초들이 삶을 지탱하게 해 준 힘이었다. 춘향전, 별주부전의 소리와 춤처럼 플라멩코 역시 삶이 버겁기만 했던 하층민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킨 문화유산이다. 견뎌내야만 했던 하층민들의 어려운 삶이 해학과 소리로 승화돼 문화예술로 탄생하는 일은 시, 공간의 거리를 떠나 세계 곳곳에서 각광받는 인류의 유산으로 계승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