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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위주스 May 14. 2019

죽음의 수용소에서 - 빅터 프랭클

Man's Search for Meaning : An Introduction to Logotherapy


  

이 책은 오스트리아의 저명한 정신분석학자 빅터 프랭클이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보낸 3년 간의 기억을 종합하여 1946년 써낸 책이다. 저자는 극한의 상황에서 본인 자신과 주변 사람들이 겪은 비인간적인 대우를 심리학자이자 의사로서 '아우슈비츠에 매우 증오심을 품은 유대인'의 입장이 아닌, '아우슈비츠에서 인간의 정신상태를 진지하게 고찰한 유대인' 의 입장에서 서술한다. 


책의 후반부는 '로고테라피'에 대해 간략히 설명하고 있는데 로고테라피는 저자가 창시한 정신 치료요법이다. 로고테라피란 삶의 의미를 통해 치료를 하는 요법이다. 삶의 원천이 권력이나 쾌락이 아니고 '의미'라는 믿음으로 인간은 살아가야 할 ‘의미'를 찾는 데 주력해야 하며 의미야말로 인간 존재의 가장 강력한 자극이자 행복의 근원이라고 주장한다.


저자는 아우슈비츠 강제수용소에서 입소되는 순간부터 입고 있던 옷가지와 소지품, 신분 증명이 될 만한 모든 문서, 연구하던 심리학 논문까지 빼앗겨 버렸다. 머리카락을 비롯한 온 몸의 털을 모두 깍인 후에 샤워장으로 내몰린 프랭클 박사는 샤워기에서 독가스가 아니라 진짜  물이 나온다는 사실에 안도의 한 숨을 내쉬던 순간, '잃을 것이라고는 벌거숭이 알몸' 밖에 없는 적나라한 실존을 경험했다. 그렇게 시작된 수용소에서의 삶은 그 전까지 자신을 규정하던 모든 가치를 부정당하고 인간으로서의 기본적인 권리조차 무시되는 극한의 시간들이었다. 매일 구더기가 들끓는 잠자리에 들며 사시사철 맨 발로 고된 노동에 시달리다 겨울에는 얼어터진 발을 감싸려고 그나마 부실한 담요를 찢어야 했다. 늘 뜻하지 않게 닥쳐오는 죽음 앞에서 동료가 아니라 자신이 살아 남았음을, 허기를 채우기에 턱없이 부족한 한 조각의 빵을 깨물며 확인하는 상황에서도 저자는 물에 빠진 사람이 지푸라기라도 붙잡는 심정으로 천성인 낙관주의를 최대한 발휘하려고 애썼다고 한다.


수용소에서도 사람들에게서 떨어져 혼자 있을 수 있는 시간이 있었다. 그리고 심지어는 그래야 할 필요가 있을 때도 있었다. 잘 알다시피 사람이 하는 모든 일이 항상 다른 사람의 시선을 끄는 강요된 공동생활을 하다 보면 때로는 잠깐만이라도 사람들에게서 벗어나 혼자 있고 싶다는 생각이 가하게 들 때가 있다. 수용소에 갇힌 사람들은 혼자 있게 되기를, 혼자서 사색에 잠길 수 있게 되기를 간절히 원했다. 그들은 자기만의 개인적인 공간, 혼자 있는 고독을 열망했다. 그런데 소위 말하는 '요양소'로 옮긴 후, 나는 한 번에 5분 정도 혼자 고독을 즐기는 흔치 않은 행운을 누리게 되었다. (p 98)


여기서 말하는 요양소란 흔히 생각하는 '몸과 마음을 편히 쉬게 하는' 곳이 아니다. 강제수용소에서조차 격리된 50여명의 정신착란증 환자가 수용된 막사이고 하루에 평균 6명이 죽어 나가는 곳이다. 하루에 5분 정도 혼자 고독을 즐기는 장소가 매일 죽어 나가는 시신을 보관하기 위해서 나뭇가지를 엮어서 세운 임시 천막이라니! 이가 득실거리는 시체가 옆에 있어도 죽음의 공동체 생활에서 잠시 벗어난 5분간의 고독이 달콤했고 잠이 들었다가 꿈에서 깰 때도 있었다고 하는 부분을 읽으면서 많은 생각을 했다. 저자와 비교할 수준의 상황은 아니지만 24년 전, 막 자대배치를 받았을 때의 내 이등병 군생활 시절 생각도 났다.


저자가 열악한 환경과 노동에 시달리면서도 짧은 순간이나마 사랑하는 아내를 떠올리면서 커다란 위안과 용기를 얻곤 했다는 부분도 인상적이었다. 당시 그는 수용소에서 헤어진 아내의 생사조차 확인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하지만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명상함으로 여전히 행복이 무엇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고 한다. 마음 속에서 이루어진 사랑하는 아내와의 대화는 그의 영혼을 죄수의 실존에서 다른 세계로 옮겨 놓을 수 있었던 것이다. 더 나아가 그는 아내가 살아있는지 아닌지 조차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는다. 그래서 자신의 아내가 이미 죽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 날에도 조금도 동요되지 않고 아내와의 정신적 대화를 계속 해나갈 수 있었다고 한다. 프랭클 박사는 강제 수용소 안에서 사랑이야말로 인간이  열망할 수 있는 궁극적이고도 지고의 목표라는 진리를 볼 수 있었다고 회고하고 있다.  


이 책을 통해 부조리하고 악한 인간의 본성에 대해, 극단적인 고통 속에서도 인간이 지닌 강한 생명력에 대해, 긍정과 의미에 대해, 인간의 존엄에 대해 생각해볼 수 있었다. 난 평소 생활하면서 힘이 들다 느끼는 경우가 많지 않은데 삶이 버겁고 힘겹다고 느껴질 때면 이 책 <죽음의 수용소에서>를 다시 펼쳐들고 싶다. 사람을 겸허하게 하는 힘이 이 책에 있다.



  




- “성공을 목표로 삼지 말라. 성공을 목표로 삼고, 그것을 표적으로 하면 할수록 그것으로부터 더욱 더 멀어질 뿐이다. 성공은 행복과 마찬가지로 찾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찾아오는 것이다.” (10)


- 왜 살아야 하는지를 아는 사람은 그 어떤 상황도 견뎌낼 수 있다. (19)


- 밖에 있을 때 지적인 활동을 했던 감수성 예민한 사람들은 육체적으로는 더 많은 고통(그런 사람들은 흔히 예민한 체질을 가지고 있으니까)을 겪었지만 정신적인 측면에서 내면의 자아는 다른 사람들에 비해 비교적 적게 손상 받았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들은 정신적으로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가혹한 현실로부터 빠져 나와 내적인 풍요로움과 영적인 자유가 넘치는 세계로 도피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있었다. (75-76)


- 미래의 목표를 찾을 수 없어서 스스로 퇴행하고 있는 사람들은 과거를 회상하는 일에 몰두한다. (129)


- 수용소에서 수감자가 입은 정신병리적 상처를 정신요법이나 정신위생학적 방법을 이용해 치료하려면 그가 기대할 수 있는 미래의 목표를 정해줌으로써 내면의 힘을 강화시켜주어야 한다. (131)


- 미래–그 자신의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린 수감자는 불안한 사람이다. 미래에 대한 믿음을 잃어버리는 것과 더불어 그는 정신력도 상실하게 된다. 그는 자기 자신을 퇴화시키고,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 퇴락의 길을 걷는다. 일반적으로 이런 현상은 아주 갑자기, 위기라는 형태를 띠고 일어난다. (133)


- 그것은 대부분의 수감자들이 성탄절에는 집에 갈 수 있을 것이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고 있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그 시간이 다가오는데도 희망적인 뉴스가 들리지 않자 용기를 잃었으며, 절망감이 그들을 덮쳤다. 이것이 그들의 저항력에 위험한 영향을 끼쳤고, 그 중 많은 사람들이 사망하기에 이른 것이다. (136)


- 정말 중요한 것은 우리가 삶으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가 아니라 삶이 우리로부터 무엇을 기대하는가 하는 것이라는 사실을, 삶의 의미에 대해 질문을 던지는 것을 중단하고, 대신 삶으로부터 질문을 받고 있는 우리 자신에 대해 매일 매시간마다 생각해야 할 필요가 있었다. 그리고 그에 대한 대답은 말이나 명상이 아니라 올바른 행동과 올바른 태도에서 찾아야했다. (138)


- 사람은 어느 정도 긴장 상태에 있을 때 정신적으로 건강하다. 그 긴장이란 이미 성취해 놓은 것과 앞으로 성취해야 할 것 사이의 긴장, 현재의 나와 앞으로 되어야 할 나 사이에 놓여 있는 간극 사이의 긴장이다. (175)


- 두 번째 인생을 살고 있는 것처럼 살아라. 그리고 당신이 지금 막 하려고 하는 행동이 첫 번째 인생에서 그릇되게 했던 바로 그 행동이라고 생각하라. (182)


- 소위 자아실현이라는 목표는 실현시킬 수 있는 것이 절대로 아니다. 자아실현을 갈구하면 할수록 더욱 더 그 목표에 이르지 못하게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자아실현은 자아초월의 부수적인 결과로서만 얻어진다는 말이다. (184)


- 우리는 삶의 의미를 세 가지 방식으로 찾을 수 있다. (1) 무엇인가를 창조하거나 어떤 일을 함으로써 (2) 어떤 일을 경험하거나 어떤 사람을 만남으로써 그리고 (3) 피할 수 없는 시련에 대해 어떤 태도를 취하기로 결정함으로써 삶의 의미에 다가갈 수 있다. (184)


- 사랑은 다른 사람의 인간성 가장 깊은 곳까지 파악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사랑하지 않고서는 어느 누구도 그 사람의 본질을 완전히 파악할 수 없다. (184)


- 만약 그 시련이 피할 수 있는 것이라면 시련의 원인, 그것이 심리적인 것이든, 신체적인 것이든, 정치적인 것이든 그 원인을 제거하는 것이 인간이 취해야 할 의미 있는 행동이다. 불필요하게 고통을 감수하는 것은 영웅적인 행동이 아니라 자기학대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188)


- 하지만 행복은 얻으려고 한다고 해서 얻어지는 것이 아니라 어떤 일의 결과로서 나타나는 것이다. 사람이 행복하려면 ‘행복해야 할 이유’를 가지고 있어야 한다. 그리고 일단 그 이유를 찾으면 인간은 저절로 행복해진다. (221)


- 각각의 장면에 다 뜻이 있고 의미가 있지만 영화의 전체적인 의미는 마지막 장면이 나오기 전까지는 드러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를 구성하고 있는 각각의 부분, 개별적인 장면들을 보지 않고서는 영화 전체를 이해할 수 없다. 삶도 이와 마찬가지가 아닐까? 삶의 최종적인 의미 역시 임종의 순간에 드러나는 것은 아닐까? (228)


- 인간이 시련을 가져다 주는 상황을 변화시킬 수는 없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신의 태도를 선택할 수는 있다. (233)


- 이런 견지에서 본다면 나이든 사람을 불쌍하게 여길 이유가 전혀 없을 것이다. 오히려 젊은 사람들은 나이든 사람들을 부러워해야 한다. 물론 나이든 사람에게 미래도 없고, 기회도 없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그들은 그 이상의 것을 가지고 있다. 미래에 대한 가능성 대신 과거 속에 실체, 즉 그들이 실현시켰던 잠재적 가능성들, 그들이 성취했던 의미들, 그들이 깨달았던 가치들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세상의 그 어떤 것도, 그 어느 누구도 과거가 지니고 있는 이 자산들을 가져갈 수 없다. (238)


- 어떤 상황에서 심지어는 가장 비참한 상황에서도 삶이 잠재적으로 의미 있는 것으로 남아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각 개인의 가치는 언제나 그 사람과 함께 있다. 왜냐하면 그것이 그 사람이 과거에 실현시킨 가치에 기반을 두고 있는 것이기 때문이다. 현재 그 사람이 쓸모 있느냐 없느냐 하는 조건에 기반을 둔 것은 절대 아니다. (2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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