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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키위주스 May 22. 2019

드링킹, 그 치명적 유혹 - 캐롤라인

인터넷 서점 서핑 중 우연히 발견해서 호기심에 이끌려 선택한 책이다. 캐롤라인 냅은 한때 심각한 거식증을 겪었고 진성 알콜중독자이기도 했으며 ‘남자보다 개가 더 좋아’란 책을 쓸 정도로 개에 대해 깊이 집착한 경험도 있는 인물이다. 저자가 유난히 술에 몰입했던 원인은 결핍과 갈망, 외로움 때문이다. 저명한 정신과 의사인 아버지와 화가인 어머니, 의사인 쌍둥이 자매를 둔 그녀의 삶은 적어도 겉으로 보기엔 부러울 것 없는 것처럼 보였지만, 너무나도 반듯한 가정의 규율과 절제, 냉정하리만치 차가운 부모님의 애정 표현이 어린 시절부터 버거웠고, 무거운 압박으로 다가왔다고 한다. 이런 것들에서 벗어나고자 저자는 술을 마시기 시작했다. 이 책의 원제는 'Drinking : A Love Story’인데 저자는 말 그대로 20여년간 술과 매혹적이고 지독한 사랑을 나누었고 결국은 알콜중독에서 벗어나는데 이 책은 그 과정을 이야기하는 자전적 수기이다. 


큰 기대없이 읽기 시작해서 캐롤라인 냅의 설득력과 호소력을 지닌 진솔한 이야기에 빠져들었다. 그녀의 글은 솔직하고 위트있으며 지적이고 예리하다. 어느 순간부터는 캐롤라인이 처한 상황에 몰입되고 감정이입이 되는 걸 느꼈다. 그래서 그녀의 아픔이 내게도 아프게 다가왔다. 책을 거의 다 읽었을 때 그녀가 2003년에 폐암으로 사망했다는 걸 우연히 알게 되었는데 진심으로 가슴 한 켠이 아렸다. 누군가에게 이런 느낌을, 더구나 독서과정을 통해 저자에게 이런 느낌을 가져본 게 얼마만인지 모르겠다.


이 책은 술에 대해, 술을 향한 사랑과 갈망에 대해, 자신의 성장 환경과 가족간의 관계의 문제에 대해, 저자가 A.A(Alcoholics Anonymous, 익명의 알콜중독자들)라는 모임에서 만난 다른 알콜중독자들에 대해 이야기한다. 책을 읽는 내내 중독, 그 자체에 대해 계속 생각하게 된다. 중독하면 흔히 일 중독, 게임중독, 도박중독, 알콜중독, 성 중독, 쇼핑중독 등을 떠올리지만 중독의 영역이 그게 전부는 아니다. 대상이 무엇이든 집착이 지나치고 그 결과가 자기파괴적이라면 무엇이든 중독이라 불러도 무방할 것이다. 관계에, 인정에 집착하는 것도 중독이라면 중독일 것이고.


사람들은 내면의 공허함 때문에 무엇인가에 의존하고 집착하고 중독에 빠진다. 아이비리그 출신의 엘리트 저널리스트인 저자도 남들이 부러워하는 외적 환경과 조건을 소유하고 있지만 채워지지 않는 공허함에 힘들어했다. 그 마음의 헛헛함, 외로움, 두려움으로 인해 알코올에 빠졌던 담담한 묘사에 내가 공감하고 감정이입을 할 수 있었던 건, 나 역시 외형적으로는 안정적이고 문제 없는 삶을 살고 있지만 내적으로는 갈대처럼 이리저리 흔들리고 휘청일 때가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 책을 읽으며 나도 즐기고 내 주변의 많은 이들이 즐기는 술에 대해 조금은 다른 각도에서 심각하게 생각해봤고, 내가 지금 집착하는 대상은 어떤 것들이 있을까 돌아보는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캐롤라인 냅의 다른 책도 읽어야겠다. 



  


..실제로 밑바닥 빈곤층은 알코올 중독자 가운데 예외적인 부류로, 전체의 3~5퍼센트에 지나지 않는다. 대다수는 질병 진행의 초기 혹은 중기에 몰려있고, 오랜 시간 동안 삶의 많은 영역에서 문제없이 자기 역할을 해낸다. 내 친구 헬레나는 술을 끼고서 생물학 박사 논문을 완성했다. 지니는 쟁쟁한 로펌에서 승진을 거듭했다. 시라는 유력 환경단체를 창립하고 운영했다. (...) 극도로 눈썰미가 예리하거나 그 또한 알코올 중독에 시달리는 사람이 아니라면 알아차릴 수 없었을 것이다. 내가 실제로는 날마다 지독한 숙취에 시달리며 컴퓨터 앞에 앉아 있다는 사실을, 하루가 기울어 갈 무렵이면 당장 달려나가 술을 마시고픈 생각에 몸을 비튼다는 사실을, 좀 더 정확히 말해서 내 인생이 온통 뒤죽박죽 엉망진창이라는 사실을. 밖으로 보이는 나와 현실의 나. 외부와 내부. 나는 술 때문에 일을 그르친 적이 없고, 전화로 병결을 통보한 적도 없으며, 숙취로 조퇴한 적도 없다. 하지만 내부의 나는 허물어지고 있었다. 안팎의 부조화가 너무 컸다. (27, 29)


어느 독자는 내게 이런 편지를 보냈다. "당신이 안정되고 행복한 삶을 찾지 못하기를 바라는 마음도 있습니다. 당신이 행복해지면 무엇을 쓰겠습니까? 당신의 칼럼도 말랑말랑하고 흐리멍덩해지지 않을까요?" 편지를 읽고 나는 웃었지만, 그 질문만은 꽤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내가 가진 우울증이 과도한 음주와 어느 정도 연관되어 있다는 건 알았지만, 직업의 특성상 절망의 경험은 필수불가결한 일이라고 여겼다. 그러니까 글을 쓰는 사람으로서 음주는 일종의 직업적 불행이라 생각한 것이다. 테너시 윌리엄스는 와인을 마시지 않고는 글을 쓰지 않았다고 했다. 윌리엄 스타이런도 술을 마셨지만, 글을 쓰기 위해서가 아니라 생각을 하기 위해서였다. 그의 말에 따르면 술은 그의 정신이 "술 깬 상태에서는 다다를 수 없는 비전을 품게" 해주는 수단이었다. (...) 술은 내 업무의 일부로 여겨졌고, 내가 고통받는 영혼이자 우리 같은 사람들보다 한 차원 깊은 인생을 사는 예술가들이었고, 술은 그런 인생과 예술에서 자연스럽게 뻗어나오는 곁가지였다. 그것은 창조적 불안의 부산물인 동시에 해독제였다. (30)


...나는 여성 잡지나 병원 팸플릿에 실린 약물과 알코올 남용에 대한 테스트 문항들을 풀기 시작했다. '예'라고 대답해야 할 항목이 매우 많았다. 당신은 술이 나오는 파티에 가면서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자' 미리 한두 잔을 마시는 일이 있는가? 예. 술을 벌컥벌컥 들이켜는 일이 있는가? 음... 그렇지. 스트레스를 받으면 술을 더 마시는가? 당연한 일. 어떤 문항들은 너무 뻔한 걸 물어서 한심해보이기도 했다. 혼자서 술을 마시는 일이 있는가? 그야 당연하지. 나는 혼자 사는걸. 이런 걸 테스트 문항이라고 만들다니.


내가 자신을 좀더 정밀하게 살펴보고자 한다면, 나는 그와는 다른 날카로운 질문들을 던졌을 것이다. 당신은 어떤 허기나 욕구에 휘둘리는 느낌을 받는가? 저녁 식탁에 놓은 와인을 보면 믿을 수 없는 애인을 바라보듯이 안타까움과 탐욕에 찬 눈길을 던지게 되는가? 누군가 당신에게 그 병의 술을 따라준다면 잔에 술이 차는 양을 유심히 관찰하고 다른 사람들의 잔에 담긴 양과 비교하는가? 그리고 술이 충분히 따라질 때까지 숨을 꾹 참고 있는가? 그 잔에 든 술과 병에 남은 술에 불안하게 집착하는가? 그것들이 걱정되고 신경 쓰이고 탐나고, 그것을 모조리 독차지하고 싶은가? 식사가 끝나기 전에 술이 다 떨어질지도 모른다는 생각, 그래서 홀로 아무런 보호장치 없이 남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견딜 수 있는가? (76)


"아냐, 됐어. 벌써 충분히 마셨어" 충분하다니? 알코올 중독자에게 그것은 생경한 미지의 언어다. 충분히 마시는 일이란 없다. 우리는 언제나 술이라는 보험을 찾고 또 찾는다. 첫 잔을 마시고 따뜻한 취기가 오르기 시작하면 그 다음에는 그것을 지속시키는 것, 그걸 강화하고 증대하는 것, 그걸 잃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 내가 아는 리즈라는 여자는 알코올 중독을 '탐욕의 병'이라고 불렀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술에 대해 느끼는 허기, 집착, 불안, 끝없는 결핍감을 일컬은 말이었다. 알코올 중독자에게 술이란 많을 수록 좋고 많아야 한다. 석잔을 마실 수 있다면 왜 두 잔만 마시는가? 넉 잔을 마실 수 있는데 왜 석 잔만 마시는가? 도대체 왜 멈추는가? 그리고 어떻게 멈추는가? (77)


어떤 사람들은 일정량의 술에 만족하는데, 어떤 사람들은 아무리 마셔도 만족하지 못한다는 사실은 알코올 중독의 질병 이론(알코올 중독자의 몸은 생리학적으로 알코올에 대해 알코올 비중독자와 다르게 반응한다는)을 지지해주는 가장 강력한 증거다. 나는 술을 마시기 시작하면 멈추는 방법을 모른다. 온몸에 강렬한 결핍감이 들어차기 때문에 그만 마셔도 되겠다는 생각 같은 것은 들지 않는다. 내 친구 빌은 알코올 중독이 질병이라는 생각을 좀처럼 이해하지 못하는, 그래서 굳은 의지만 있으면 술따위야 얼마든지 조절할 수 있다고 빋는 어머니에게 이런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어머니, 다음에 설사가 찾아오면 그걸 한번 조절해보세요." 거칠지만 의미있는 비유다. (78)


내가 아는 모든 알코올 중독자에게서 공통되는 신념의 방정식이 있다. 그것은 '불편 + 술 = 불편없음"이라는 것이다. 이렇게 해서 자기 변화의 수학이 탄생된다. "술을 마시면 '내가 원하는' 내가 되었어요." 마치 술이 주는 특별한 수학 공식 없이는 다른 사람은 물론 자신에게도 사랑받을 자신이 없는 듯했다. (...) 어떻게 보면 술의 행로는 매우 단순하다. 어느 순간까지 알코올은 모든 것을 개선한다. 하지만 그 순간을 넘어서면 모든 것을 망쳐버린다. 그리고 아직 개선도정에 있는 동안 술이 우리를 다른 자아로 고양하는 능력은 그야말로 놀랍다. (87)


샘이 훌륭한 술친구였던 또 다른 이유는 그가 항상 약속에 늦었다는 것이다. 그와 술집에서 약속한 날이면, 기다리는 동안 한두 잔을 마셔둘 수 있었다. 그를 기다리며 와인을 마시다 보면 몸과 마음의 긴장이 스르르 풀리면서 차분하고 편안한 느낌에 휩싸였다. 창가에 앉아 캐슈너트를 집어드는 순간의 나는 누가 보아도 조용히 데이트 상대를 기다리는 젊고 예쁜 여자인 것 같았다.


샘과 함께 술을 마실 때면 시간에 대한 감각이 바뀌었다. 처음 20~30분쯤 약간 어색한 시간이 흐르고 나면, 우리는 곧 술과 대화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러다가 문득 정신을 차리면 어느새 2~3시간이 지나 있었다. (...) 나는 그런 순간이 좋았다. 이 세상이 아주 단순한 것들로 환원되는 순간. 나하고 샘, 그리고 술잔 두 개만 있으면 되는 그런 순간들이. 술은 내가 마음의 문을 열고 다른 사람과 관계를 맺게 하는 최고의 방법, 가장 빠르고 간단한 방법이었다. 알코올이 주는 힘은 엄청났다. 술을 마시고 나면 갑옷이라도 두른 듯 여유롭고 강력한 버전의 나로 다시 태어났다. (89)


AA모임에 나가면 가장 먼저 듣는, 그리고 가장 먼저 우리 가슴에 사무치는 이야기가 있다. 그것은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는 순간부터 우리의 인격이 성장을 중지한다는 이야기다. 술은 우리가 성숙한 방식으로 A지점에서 B지점으로 이동하려면 겪어야 하는 힘겨운 인생 경험을 박탈한다. 간편한 변신을 위해 술을 마신다면, 술을 마시고 자기 아닌 다른 사람이 된다면, 그리고 이런 일을 날마다 반복한다면 우리가 세상과 맺는 관계는 진흙탕처럼 혼탁해지고 만다. 우리는 방향 감각도 잃고 발딛고 선 땅에 대한 안정감도 잃는다. 그러다 보면 어느덧 자기 자신에 대한 가장 기본적 사항들 (두려워하는 것, 좋아하는 느낌과 싫어하는 느낌, 마음의 평안을 얻는데 필요한 것)도 알 수 없게 된다. 술에 젖지 않는 맑은 정신으로 그것을 찾아 나선 적이 없기 때문이다. 알코올은 우리에게 보호막을 둘러쳐서 자기 발견의 고통이 다가오는 것을 막아준다. 그 보호막은 극도의 안온감을 주지만 극도로 교활한 것이기도 하다. 왜냐하면 그것은 완전한 허상이기 때문이다. 완전한 허상이면서도 진정한 실체처럼 간절하게 느껴지기 때문이다. (98)


알코올 중독자들은 거의 자동으로 인간관계가 엉망이다. 우리는 자기 존재감을 느끼며 당당하게 관계 속으로 걸어 들어가지 못하고, 술에 취해 질척질척 흘러들어 간다. 우리는 다른 모습으로 변신하는 데 너무 익숙해져서, 우리 자신의 핵심 버전, 그러니까 우리가 본래 가지고 나왔고, 다른 사람들과 의미 있는 관계를 맺을 수 있게 해주는 버전의 자기 모습을 잃어버린다. 우리는 친밀한 관계를 극도로 불편해하는데 여기서 알코올은 그런 불편함을 막아주는 한편, 그것을 진실로 극복하는 걸 또한 막아버리는 이중적 작용을 한다. 우리는 감정을 솔직히 대면하는 것보다 거기서 한 발짝 물러서는 데 훨씬 더 익숙하다. 갈등을 느끼는가? 마셔라. 불안한가? 마셔라. 울화가 치미는가? 마셔라. (112)


알코올 중독자들은 삶을 구역화한다. 그러므로 내 행동은 아주 전형적인 사례였던 것이다. 알코올 중독자들이 이중 인생 (심지어 삼중, 사중 인생까지도)을 영위하는 것은 하나의 삶을 사는 방법을 모르기 때문이라고. 그 하나의 삶이란 자신이 누구인지, 자신이 진정 원하는 것은 무엇인지에 대한 선명한 이해에 기반을 둬서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114)


그에게서 받고 싶었던 것은 어린 계집애들이 아버지에게 바라는 종류의 칭찬과 승인이었다. 하지만 주인공이 어린 소녀가 아니라 젊은 여자일 때, 그리고 술에 취했을 때는 그 소박한 소망이 복잡한 양상을 띠게된다. 그날 점심을 할 때 나를 휘감은 감정은 조바심이었다. '그를 기쁘게 해야 해. 그에게서 내 존재를 인정받아야 해. 그러려면 성적 접근을 해도 상관없어. 내가 아는 방법은 그것뿐이니까.'


누군가의 애정과 승인을 간절히 바랄 때,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렇게 행동한다. 대학 시절에 여학생이 교수와 남자 선배들에게 아양을 떠는 모습을 보았다. 어린 시절부터 영화나 TV에서 본 것이 그런 것이기도 했다. 나 또한 여자가 가진 가장 현실적인 힘은 성적 매력이라는 생각을 마음 한구석에 갖고 지내다가, 부지불식간에 그런 인식에 근거해서 행동한 것이다. 그러므로 몇주 후 로저가 나를 불러 차 안에서 키스했을 때, 충격과 혼란 속에서 한편으로는 기묘한 승리감을 느낄 수 있었다. 그때 내 느낌은 '생각대로 됐어. 내가 이겼어' 였다. (118)


알코올 중독자들은 책임 회피의 귀재들이다. 자신이 느끼는 감정을 늘 타인이나 사물 탓으로 돌리는 것, 이것은 알코올 중독자를 가려내는 징후이기도 하다. 이들은 관계가 꼬이고 엉켰을 때 자신이 잘못한 부분을 좀처럼 인정하지 못한다. (...) 술에 취해 사는 동안에는 자신이나 다른 사람에 대해서 그런 종류의 정직함을 얻지 못한다. 술은 진정한 감정과 진정한 공포와 진정한 의문을 마비시킨다. 정직해질 수 있는 용기를 빼앗아간다. 우리는 진정한 자신을 움켜쥐지 못하고, 자꾸만 자기 자신을 괴로운 상태로 몰아넣는다. (120)


근무시간이 지나면 집에 돌아와 소파에 앉았다. 할 일은 줄을 서서 기다렸다. 자신감도 없고 실패가 두려운 내게 이 모든 일은 너무 버거웠고, 그 어떤 것도 해내지 못했다. 그래서 마비감과 무력감, 자기혐오에 젖은 채 앉아있을 뿐이었다. 그러다가 6시가 되자 바람을 쐐야겠다 싶어 외투를 걸치고는 와인을 사러 폭설을 뚫고 주류 판매점으로 걸어갔다. 그날 밤 매트리스 소파에 앉아서 사온 술을 거의 다 마셨다. 그리고 잠들기 전 일기장에 끼적거렸다. '너무나도 외로워서 견딜 수가 없다. 제발 이 느낌을 없애줘." (131)


나는 우울한가? 외로운가? 미쳤나? 상관없다. 그냥 전화할 뿐이다. 취했으니 전화하는 것이다. 취했으니 전화기를 찾는다. 취했으니 어떤 인간적 접촉을 갈망하는 것이다. 혼자 술 마시는 일이 역설적인 것은 우리가 정서적으로 자신의 진정한 모습을 만난다고 착각하게 된다는 것이다. 혼자 술 마시던 시절, 술이야말로 내 진정한 감정의 문을 열어주는 유일한 도구라고 느꼈다. 술을 마시고 녹아내린다. 술을 마시고 흐느낀다. 술을 마시고 다른 사람에게 전화걸어 고통을 호소한다. '우울해. 외로워. 나를 좀 도와줘.' 하지만 술은 기만의 도구다. 술이 빚어내는 감정은 환각이다. 다음날이 되면 우리는 무엇 때문에 전화를 걸었는지 기억하지 못한다. 아침에 때어나면 분명한 사실 하나는 머리가 아프다는 것 뿐이다. (143)


알코올 중독자들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술을 마실 때도 혼자 마신다. 사실 나는 술을 끊기 전까지는 이런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지금 돌이켜보면, 여러사람 속에 섞여 있으면서도 알코올 때문에 사람들에게서 고립되었던 장면들이 언뜻언뜻 떠오른다. 그날 아침, 숙취로 시달리던 내 머릿속에는 전날 밤 동료와 그렇게 오래도록 술을 마셨으면서도 그들과 눈길 한 번 제대로 주고받지 않았으며, 진정성이나 유대감 어린 대화를 한 마디도 나누지 않았다는 걸 깨달았다. (146)


... 나는 알코올 중독은 병리적 문제라기 보다는 도덕적인 문제에 가깝다고 생각했다. 이것은 알코올 중독에 대한 우리 사회의 기본적이고도 심각한 오해 가운데 하나다. 우리는 술때문에 문제를 빚는 것은 의지박약의 증거고, 자제력 부족의 결과라 생각한다. 그러므로 그것은 '나쁜' 것이다. (...) 그곳의 강연자들은 내가 수많은 밤 그토록 비이성적으로 술을 마셔댄 것은 강력한 물질적 매커니즘이 작용한 탓이라고 역설했다. "두뇌 기능이 손상되어 좋은 기분을 전해주는 물질을 만들지 못하는 것입니다. 술을 끊는다면 그러한 균형을 되찾을 수 있습니다. "

알코올 중독의 길에 들어서고 나면, 다시 안전하게 술을 마실 길, 정상적이고 사교적이고 자신을 통제할 수 있는 음주로 돌아갈 길은 보이지 않는다. 많은 알코올 중독자가 이런 일을 설명할 때 '오이와 피클'이라는 비유를 든다. 알코올 중독자들은 피클이 된 사람들이다. 오이가 피클이 되지 못하게 막을 수는 있지만, 피클이 된 것을 오이로 되돌릴 수는 없다. (156)


3년동안 술을 끊고 나서 다시 올코올 중독에 빠지게 된 사연을 말했다. 그는 '이제 절제된 음주를 실험해봐도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이 들어서 스카치 한 병을 샀다. 한 잔을 마셔보니 별일 없었다. 그 자리에 거꾸러지지도 않았고, 광기가 폭발하지도 않았다. 그래서 한 잔 더 마셨다. 그리고 또 한잔... 그렇게 저녁나절이 흐르고 나자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한탄했다. "실험은 실패야." 스카치 병은 남김없이 비워졌다.


이런 이야기는 전형적인 사례다. 절제된 음주를 하려는 온갖 노력은 알코올 중독의 보편적인 징후 가운데 하나다. 증류주는 마시지 않고, 맥주만 마시겠다고 맹세하기도 한다. 몇가지 규칙도 세운다. 혼자서는 마시지 않는다. 아침에는 마시지 않는다. 직장에서는 마시지 않는다. 주말에만 마신다. 오후 5시 이후에만 마신다. 술 마시러 가기 전에 우유나 올리브유를 한 잔 마셔서 위벽을 보호하고 지나치게 취하는 일을 막는다. 술 한 잔 마실 때마다 물 한잔을 같이 마신다 등 자신에게 음주를 조절할 능력이 있다는 걸 보여주고자 어떤 일이든, 그야말로 어떤 일이든 시도한다. (158)


술꾼은 늘 다른 술꾼을 찾는다. 우리가 원하는 그 말을 해줄 사람을 찾는다. '술 마시러 가자.' '한 잔 더 할까?' '그러지 말고 한 잔만 더 하자.' 이는 정말 쉬운 일이다. 두려울 만큼 간단하다. 처음에는 술이 가까이 있고, 술 마시는 일이 어렵지 않아 술을 마신다. 그런데 그 길로 가고 또 가다보면 스스로 술 마실 환경을 만들어서 술을 마신다.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언제나 주변에 알코올이 마련된 환경을 꾸린다. 저녁 식칵, 찬장, 냉장고, 친한 친구네 집의 찬장과 냉장고가 모두 그런 환경이 된다. 술 마시는 사람하고만 친구가 된다. 앉은자리에서 와인을 여섯 병 마시는 일쯤 아무렇지도 않게 생각하는 사람들, 음주의 해악을 부정할 수 있게 도와주는 사람들이 우리 주변에 남게된다. (189)


진성 알코올 중독자는 대개 무력한 사람들이다. 적어도 우리 중 대다수가 마음속으로는 그렇게 느낀다. 그렇 것은 겉으로 봐서는 알 수 없다. 특히 적응형 알코올 중독자는 더욱 그렇다. 그들은 개인적 능력의 지표가 되는 직장, 가족, 은행 계좌 같은 온갖 부속물을 무사히 유지한다. 하지만 뒤로 한 발짝 물러서서 그 휘장의 안쪽을 보면 사정은 전혀 달라진다. 알코올 중독에 빠져 있으면서 자기 인생을 능동적으로 살아갈 힘이 있는 사람은 없다. 그들의 힘은 모두 술에서 나오는 것이다. (209)


알코올 중독자는 적어도 네 명의 타인에게 영향을 미친다. 우리는 부모님, 애인, 동료뿐 아니라 우리와 인연이 있는 그 어떤 사람에게도 걱정을 끼칠 수 있다. 그들에게 화를 내고, 우리의 잘못을 덤터기 씌우며, 그들을 저 멀리 밀쳐버린다. 우리는 그들을 마음속에 들이지 않고, 그들에게 우리를 이해시키지 않는다. 그들이 우리와 너무 가까워지면 우리의 본 모습에 기겁할거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다 보니 중증 알코올 중독자의 에너지는 많은 부분이 겉에 두를 휘장을 만드는 데 쓰인다. 멀쩡해보이는 휘장, 사랑스러워보이는 휘장, 가치 있어 보이는 휘장, 온전해 보이는 휘장을. 그렇게 해서 내면과 외면이 어긋난다. 버전 A와 버전 B, 이중 생활은 갈수록 교묘해지고 더 깊은 곳까지 뿌리 박힌다. (228)


기다려라. 견뎌라. 사람들이 전해준 가르침을 새기고 또 되새겨라. 자신이 알코올 중독 여부에 의문이 생기면 이렇게 생각하라. '내가 알코올 중독자라면 술을 마시면 안 되고, 알코올 중독자가 아니라면 술을 마실 필요가 없다.' 얼마나 깔끔한 논리인가. 이렇게 말하라. '알코올 중독자가 아닌 사람들은 새벽 2시 반에 잠에서 깨어 자신이 알코올 중독자인지 아닌지 묻지 않는다.' 이 역시 훌륭한 현실 점검 논리다. (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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