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01. 왜 내 월급만 제자리걸음일까?

인플레이션이라는 거대한 파도

by blue in green

24년 동안 직장생활을 하며 성실히 일해왔다. 매년 연봉 협상을 하고, 통장에 찍히는 숫자가 조금씩 커지는 것을 보며 나름의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어느 순간부터 기이한 현상을 목격했다. 분명 숫자는 늘었는데, 삶의 여유는 그 숫자를 따라오지 못하는 기분이었다. 경제 공부를 시작하며 나는 그 정체가 ‘인플레이션’이라는 이름의 거대한 파도였음을 깨달았다.


돈의 가치가 녹아내린다는 것의 진짜 의미

인플레이션을 단순히 ‘물가가 오르는 현상’으로만 정의하면 그 본질을 놓치기 쉽다. 인플레이션의 진짜 얼굴은 ‘내 지갑 속 돈의 가치가 떨어지는 현상’이다.


우리는 어린 시절 100원이라는 동전 하나로 얻을 수 있었던 수많은 즐거움을 기억한다. 새우깡 한 봉지, 시원한 하드 하나, 혹은 버스 요금까지. 하지만 지금의 100원은 마트 카트를 빌리기 위한 담보물 이상의 기능을 하지 못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7txnrn7txnrn7txn.png

새우깡이 더 맛있어지거나 양이 획기적으로 늘어난 것이 아님에도 가격이 15배 넘게 뛴 이유는 무엇일까. 그것은 새우깡의 가치가 변해서가 아니라, 그것을 사기 위해 필요한 ‘돈’의 가치가 그만큼 흔해지고 가벼워졌기 때문이다. 물건의 가격이 오른 것이 아니라 화폐의 구매력이 녹아내린 것이다. 이것이 자본주의 시스템이 작동하는 기본 원리다.


정부의 물가 vs 나의 물가, 왜 다를까?

많은 사람이 뉴스에서 "물가 상승률이 3%로 안정되었다"는 보도를 볼 때 분통을 터뜨린다. "내 장바구니 물가는 10%도 넘게 오른 것 같은데 도대체 무슨 소리냐"는 것이다. 이 괴리는 왜 생길까?


정부가 발표하는 '소비자물가지수(CPI)'는 수백 가지 품목의 평균치다. 여기에는 우리가 매일 사는 식료품뿐만 아니라, 몇 년에 한 번 사는 TV나 냉장고 같은 가전제품도 포함된다. 기술 발전으로 가격이 잘 오르지 않거나 오히려 떨어지는 공산품들이 전체 평균을 깎아먹는 착시를 일으키는 것이다.


반면, 우리가 피부로 느끼는 '체감 물가'는 밥상 물가, 교통비, 외식비처럼 매일 지갑을 열어야 하는 필수 소비재에 집중되어 있다. 이들은 인플레이션에 가장 민감하게 반응한다. 그러니 통계청의 숫자와 내 지갑의 현실 사이에 괴리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우리는 평균의 함정에 빠지지 말고 나의 현실 물가를 직시해야 한다.

Gemini_Generated_Image_ty4na0ty4na0ty4n.png


인플레이션은 왜 발생하는가: 두 가지 핵심 축

다시 원론으로 돌아와서,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경제학적 원인을 살펴보자. 크게 두 가지 경로가 있다.


첫째는 수요 견인 인플레이션(Demand-pull Inflation)이다. 시중에 돈이 너무 많이 풀려 사람들이 너도나도 물건을 사려고 줄을 설 때 발생한다. "사려는 사람은 많은데 물건이 부족하니" 가격이 오르는 것이다. 이는 보통 경제가 성장하고 고용이 잘 되는 호황기에 나타난다.


둘째는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Cost-push Inflation)이다. 물건을 만드는 데 들어가는 원재료 값이나 인건비가 올라서 기업이 어쩔 수 없이 제품 가격을 올리는 경우다. 최근 우리가 겪고 있는 고물가는 전 세계적인 공급망 차질과 에너지 가격 상승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전자가 ‘기분 좋은 성장’의 부산물이라면, 후자는 ‘고통스러운 생존’의 결과물에 가깝다.


직장인이 직면한 무서운 함정, ‘화폐 환상’과 ‘실질 임금’

직장인에게 인플레이션이 가혹한 이유는 명목 임금과 실질 임금의 괴리, 그리고 이를 인지하지 못하게 만드는 심리적 함정 때문이다.


우리는 매달 통장에 찍히는 ‘명목 임금’의 숫자에 집중한다. 연봉이 4% 올랐다면 나 자신이 작년보다 4%만큼 더 나은 삶을 살 자격을 얻었다고 믿고 기뻐한다. 경제학에서는 이를 '화폐 환상(Money Illusion)'이라고 부른다. 돈의 실질적인 구매력은 보지 못하고 겉면에 쓰인 숫자(명목 가치)에만 현혹되는 현상이다.


이 환상에서 깨어나려면 반드시 물가 상승률이라는 차가운 현실을 대입해야 한다. 만약 물가가 5% 올랐다면, 나의 실질적인 구매력은 오히려 1% 후퇴한 셈이다. 나는 1년 동안 성실히 코드를 짜고 시스템을 운영하며 가치를 창출했지만, 자본주의라는 시스템은 인플레이션을 통해 내 노동의 대가를 조용히 갉아먹었다. 인플레이션은 정부가 공식적으로 걷어가는 세금은 아니지만, 결과적으로 내 자산의 가치를 하락시킨다는 점에서 ‘가장 무서운 은밀한 세금’이다.

Gemini_Generated_Image_1190ga1190ga1190.png


부의 재분배: 누구는 웃고 누구는 운다

인플레이션은 단순히 모두를 가난하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부의 위치를 강제로 이동시킨다. 여기에는 명확한 승자와 패자가 존재한다.

패자: 현금을 금고에 쌓아둔 사람, 고정된 연금을 받는 은퇴자다. 시간이 갈수록 현금의 가치는 떨어지기에 이들은 앉아서 자산을 잃는다.

승자: 부동산, 주식, 금 같은 실물 자산을 보유한 사람, 그리고 돈을 빌린 채무자다. 갚아야 할 돈의 ‘실질 가치’가 가벼워지기 때문이다.

Gemini_Generated_Image_salpeksalpeksalp.png

현금 1억 원의 가치는 10년 뒤 약 40%가 증발한다. 단순히 원금을 지키는 것이 자산을 지키는 것이 아님을 이 숫자들이 증명한다.


돈이 휴지 조각이 되었을 때

인플레이션이 통제 불능 상태가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질까? 역사는 끔찍한 하이퍼인플레이션(Hyperinflation)의 사례들을 보여준다.


가장 유명한 것은 1차 세계대전 직후의 독일이다. 당시 빵 한 조각을 사기 위해 수레에 돈뭉치를 싣고 가야 했고, 사람들은 가치가 없어진 지폐를 벽지로 쓰거나 땔감으로 태웠다. 최근에는 짐바브웨가 '100조 달러'짜리 지폐를 발행하는 촌극을 빚기도 했다. 물론 이는 극단적인 사례지만, 화폐라는 것이 국가의 신용을 잃었을 때 얼마나 허망하게 무너질 수 있는지 보여주는 강력한 경고다.

Gemini_Generated_Image_b597k9b597k9b597.png


파도를 멈출 수 없다면 서핑을 배워야 한다

인플레이션은 자본주의라는 거대한 엔진이 돌아가는 한 멈추지 않는 숙명과도 같다. 적절한 인플레이션은 경제의 활력이 되기도 하지만, 준비되지 않은 개인에게는 재해에 가깝다.


그저 열심히 일하고 저축하면 노후가 보장될 것이라는 믿음은 이제 위험한 환상이 되었다. 내 자산이 인플레이션이라는 용광로 안에서 녹아내리지 않게 하려면, 우리는 화폐 너머의 가치를 보는 법을 배워야 한다. 돈의 흐름을 이해하고, 내 자산을 지켜낼 ‘서핑보드’를 준비해야 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Gemini_Generated_Image_unsp09unsp09unsp (2).png



다음 글에서는 이 인플레이션이라는 괴물을 통제하기 위해 국가가 휘두르는 가장 강력한 무기, ‘금리’에 대해 이야기해보려 한다. 금리가 움직일 때 우리의 대출 이자와 집값은 왜 요동치는지, 그 인과관계를 하나씩 짚어보자.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