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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류작가지망생 Dec 20. 2020

시-세이 ; 사물의 나이

집으로 가는 길

집으로 가는 길




누군가 품던 안개꽃들이
바람 따라 이리 저이 휘둘려
가로등 아래 무리 짓다
안경알 위에 내려앉는다

얇게 가늘게 납작하게
너는 녹아내리고
무력한 입김으로
네 흔적을 쓰다듬는다

흐릿한 초점 너머로
또다시 형체를 잃어가고
차마 닦아내지 못해
비틀비틀 발을 내딛는다

창문을 두드려 인사하면
두 손 빨개지도록 놀았던
너도 어느덧 나이를 먹어
차갑고 서러운 것이 되었다


- 삼류작가지망생






 어느 일요일 늦은 저녁,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눈이 내리기 시작했다. 주택가 언덕배기에 늘어진 가로등 사이로 잘은 얼음 알갱이들이 허공에 서로 휘감겨 오르내리길 반복했다. 나는 패딩 후드를 눌러쓰고는 냉기에 중량까지 더해져 잔뜩 날이 선 바람을 헤치며 언덕을 올랐다. 십오 분 정도 걸었을까, 왼편 수풀 담장 너머 놀이터에서는 깔깔거리는 요란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이가 몸뚱이에 비해 앙증맞은 다리로 놀이터 이곳저곳을 폴짝폴짝 뛰어다니고 있었다. 이내 발이 미끄러져 바닥에 털썩 엎어졌다가도 무슨 일 있었냐는 듯 아무렇지 않게 일어나 다시 소리를 지르며 맨손으로 눈을 만지작거렸다. 보호자로 보이는 여성이 아이의 온몸에 눌어붙은 눈을 털어내고는 집으로 돌아갔다. 둘의 그림자가 아파트 현관문 너머로 사라지고서야 나는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나도 저런 때가 있었는데'


 감상에 젖어있던 차에 안경알 위로 눈송이 하나가 떨어졌다. 그제야 하늘의 풍경이 눈에 들어왔다. 어둑한 밤하늘 위를 가득 메운 함박눈은 세상 모든 것들 위에 차곡차곡 쌓여갔다. 나는 그 자리에 멈춰 섰다. 비슷한 풍경에 비슷한 기분을 느껴본 적이 있었다.


 어린 시절, 한 층에 열세 개의 현관문이 달린 복도형 아파트 15층에 살았다. 20층이 마지막이었으니 아파트 한 동에는 총 260가구가 있었을 것이다. 총 8층 높이의 거대한 주차장 위에 지어진 탓에 아파트 정문은 경사가 40도에 육박하는 차도와 연결된 언덕의 꼭대기였고 후문은 주차장으로 내려갈 수 있는 엘리베이터와 연결되어 있었다. 우리 동 앞마당은 차도와의 높차가 심한 탓에 3면이 막혀있는 구조였다. 차도로 나가기 위해서는 왼쪽으로 나있는 도로를 타고 조금 돌아서 가거나 철제 계단을 타고 3층 정도의 높이를 올라가야 했다. 그런 지형적 특성상 다른 동 아이들이 몰려와서 놀고 행패를 부리거나 외부 차량이 지나가면서 방해하는 일 없는 온전하게 독립된 놀이공간이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였을 거다. 늦은 밤, 어머니가 잠든 나를 흔들어 깨우고는 얼른 일어나서 밖에 나가보라고 했다. 나는 비몽사몽인 상태로 발을 질질 끌며 현관문을 나왔다. 머리보다 조금 더 높게 있는 난간 너머로 눈송이들이 빼곡하게 차있었다. 서울에 이례 없는 폭설이 내린 날이었다. 마당 쪽에서는 소란스러운 소리가 들려왔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난간 중간중간마다 주먹만 하게 나있는 긴 틈 사이로 아래를 보며 나는 애들한테 금방 내려가겠다고 소리쳤다. 제대로 된 바지와 패딩, 스키 장갑을 착용하고 내려가서는 밤새 눈사람을 만들고 눈싸움을 했다. 그 어린 나이로 새벽까지 놀았던 건 처음이었다. 그 시간까지 논다는 것은 뭔가 비도덕적인 행위였지만 그날만큼은 용인되었다. 마당에서 올려다본 복도 난간에는 아이들을 내려다보는 머리들이 송송송 나와있었다.


 대부분의 아이들이 결국 추위를 견디지 못하고 집으로 돌아갔다. 코가 시뻘게져서는 멀건 콧물을 들이마시면서도 나는 집에 들어갈 생각이 전혀 없었던 것 같다. 경비아저씨가 마당의 눈을 치우면 치운 쪽 가득 쌓인 눈더미에 손을 푹 찔러 도장을 남기고, 몸보다 큰 초록 빗자루로 경비아저씨를 따라 눈을 치우기도 했다. 나는 결국 다음날 감기에 걸렸다.


 다른 사람들보다 유달리 눈을 좋아했던 그때 그 아이는 어른이 돼서도 여전히 눈을 좋아한다. 사람들이 도로가 미끄럽다며 출근길이 늦어져 지각할 걱정이 앞설 때에도 나는 일부러 우산을 펴지 않고 다녔다.


 '그렇게 눈이 좋아?'

 눈 내리는 모습을 구경하며 웃고 있던 내게 누군가 물었다.

 '너무 좋아'

 '왜 그렇게 좋아?'

 '좋으니까'

 '어린애 같아'


 눈을 보고 좋아하는 모습이 그 사람에게는 호들갑스럽고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이라니. 서글픈 마음이 들었다. 사물도 나이를 먹는구나. 나이를 먹으면서 상황이 바뀌고 가치관이 바뀌면 사물도 같이 나이를 먹고 대우가 달라지는구나 싶었다. 이후로는 여전히 눈이 내리면 괜히 가슴이 설레고 두근거리더라도 굳이 티를 내지 않았다. 그들에게도 그들 나름대로 눈이 차갑고 서러운 것이 된 이유가 있을 터지만 그게 내가 나이를 먹어야 할 이유가 되진 않는다. 그럼에도 그들이 내게 유난스럽다고 할까 봐, 고작 눈 내리는 거 가지고 호들갑 떨지 말라는 말을 들을까 봐 '눈 내리네' 정도의 감상만 내비치며 아무렇지 않은 척 행동했다. 이제는 뭐라 하는 사람들이 없었지만 해가 지나갈수록 눈은 온기를 잃어갔고 나는 덤덤해지고 있었다.


 아직도 눈을 좋아하지만 예전만큼은 아닌 걸 보니 나도 나이를 먹고 있는 것 같다. 내가 사랑하는 것들, 좋아하는 것들의 주름살이 느껴진다. 조금만 찬찬히 늙어가도 좋으련만 세상은 그렇지 않은 듯하다. 고독한 외로움이 가득 찬 늦은 밤에 눈이 찾아오면 편의점 커피 하나 사들고 마중을 나가야겠다. 세월이 흘러 늙어버린 서로의 이야기로 밤을 지새워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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