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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삼류작가지망생 Jan 04. 2021

시-세이 ; 도시의 은하수

불꽃놀이

불꽃놀이




용산역으로 향하는 1호선 열차
검은 도화지에 지렁이 하나 기어오르더니
파편들이 사방으로 흩어진다

조각들을 쓸어 담고 쓸어 담아도
빠져나가고 빠져나와 반짝 빛났다가
금세 사그라져 입김에 스민다

별을 동경한 유성들의 새까만 잔해는
바닷속 어딘가를 유영하고 있을까
양식장 눈먼 물고기의 밥이 되었을까
아틀란티스의 낭설가가 되었을까

별의 존재로 얹힌 물결 위로
아스라이 춤추는 빛망울들이
제 존재를 스스로 증명하지 못하듯
역에 내리지 못한 채 흘러가지만

괜찮다

유수 아래 별이 없다고 하여
아름답지 않은 것은 아니며
아직 열차칸에 앉아있다해서
목적지가 없는 것은 아니니

모든 별들아 여행자들아
유성들아 불빛들아 불꽃들아
미광들아 암광들아

괜찮다

삶의 이유를 찾는 삶
이 또한 삶의 이유일지니


- 삼류작가지망생






 하루빨리 어른이 되고 싶었던 적이 있었다. 아침 8시에 등교해서 저녁 10시에 하교하는 매일 반복되는 삶이 끝났으면 했다. 각종 이유들로 구속받는 것에 지쳐있었고 좋아하는 것들을 즐기는 작은 순간 하나하나가 어른들에게는 인생을 낭비하고 버리는 시간이 되어버리는 게 싫었다. 돈벌이가 되지 않더라도 꿈꾸는 것을 하며 살아가는 것이 궁극적인 삶의 목표라고 생각했지만 어른들은 집과 차, 결혼과 가정, 아내와 자식, 노후와 장례를 걱정해야 한다며 그렇게 살면 나중에 후회할 거라고 했다.


 헛소리라고 생각했다. 스테이지가 정해진 게임을 같은 캐릭터로 여러 번 플레이하는 것도 아니고 어떻게 다 똑같을까. 세상에서 똑같은 시간에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은 생김새와 똑같은 성격으로 태어나 똑같은 부모 아래 똑같은 환경에서 똑같은 음식을 먹고 똑같은 교육을 받아 똑같이 성인이 되는 사람은 단 하나도 없는데. 사소한 꿈조차 갖지 못하고 세월이 흘러버린 어른의 비겁한 변명 같았다.


 특히나 꿈을 좇는 자들의 노력을 고작 '패기'나 '객기' 정도로 치부하는 사람들은 더더욱 이해할 수가 없었다. 걷는 것이 삶의 수단에서 목적이 된 그들은 늘 하나같이 똑같은 조언을 했다. 현실적으로 살아야 한다고. 그리고는 지금까지 걸어온 길이 본인의 의지가 아니라 어쩔 수 없었던 결과라는 듯한 어투로 꿈을 포기하는 방법에 대해 늘어놓았다. 현실이라는 단어를 꿈의 반의어처럼 사용했고 그런 화법에 질린 탓인지 나중에는 반박할 여력도 없어 '네, 맞아요' 라며 그냥 맞장구치고는 흘려 넘겼다.


 그들은 왜 그렇게 꿈을 부정적이고 회의적이고 비관적인 시선으로 바라보는 걸까. 꿈을 좇는 사람들에게 멍청하다, 책임감이 없다며 그만 포기하라고 하는 걸까. 과거의 이야기들을 들어보면 그들도 한 때는 꿈을 좇던 때가 있었고 현실과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시기들이 있었는데도 말이다.


 쓰고 싶었던, 아직도 쓰고 싶은 소설 중에 그들을 모티브로 한 캐릭터가 있었다. 고시원에서 4년째 고시를 준비하다가 영업사원이 된 캐릭터의 설정을 쌓기 위해 썼던 습작 중에서 그는 이런 대사를 한다.


 '편의점 진열대에서 포장지 배가 빵빵한, 군침이 도는 사진이 박힌 초콜릿 과자를 보고 맛있겠다 싶어서 딱 사 와서 뜯어. 근데 막상 열어보니 그 안에 있던 질소가 3분의 2이고 알맹이는 3분의 1밖에 없어. 맛도 그렇게 환상적이지 않고 평범하겠지. 그래도 달콤해서 계속 먹다 보면 충치가 생길 거야. 조금만 썩었을 때는 레진이나 금으로 때우면 그만이지만 시기를 놓치면 결국은 뽑아야만 해. 안 그러면 신경을 타고 다른 이까지 다 썩을 테니. 어릴 땐 괜찮아. 유치니까, 다시 자라니까. 문제는 나이 먹고 그 지랄이 났을 때야. 한 번 망가진 치아는 돌아오지 않아. 임플란트를 하건 틀니를 끼든 간에 조금이라도 제 기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돈도 몇 백씩 깨지겠지. 돈이 없으면 어떻게 하냐고? 답은 간단해. 안 먹으면 돼. 그게 꿈이고 현실이야'


 글이 진행될수록 악의 가득한 그의 생각과 대사가 점점 현실성을 잃어갔다. 그의 시작점과 도착점의 변화과정을 직접 쓰고 있는 나조차도 납득할 수 없었고, 행동의 흐름을 컨트롤할 수 없을 정도로 그는 여러 선택의 분기점에서 엇나가기를 반복했다. 결국 이 캐릭터가 내적으로 지닌 열등감과 가치관을 다듬기 위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고시를 준비했던 지인들에게, 지인들의 지인들에게 다양한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그 원천은 꿈 자체에 대한 부정에서 오는 것이 아니라는 걸 깨닫게 되었다.


 그들은 돈 때문에, 재능 때문에, 가족 때문에, 시선 때문에, 갖갖은 생계와 관계와 모종의 이유로 꿈을 포기했는데 같은 나이의 다른 누군가는 꿈을 대단한 것으로 여기며 여전히 포기하지 않는다. 끝끝내 그 사람이 꿈을 이루게 되면 그들이 꿈을 버린 선택은 잘못된 선택이 되는 것이다. '내가 그때 포기하지 않았더라면 저렇게 될 수도 있었을 텐데', '그때 포기하지 말 걸', 자신의 삶을 부정당하지 않기 위해 꿈꾸는 사람들을 끊임없이 아래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나는 늘 그들을 꿈을 포기한 자들이라고 표현했지만 그들은 단지 삶의 목표를 꿈이 아닌 다른 것으로 선택한 것뿐이었다. 꿈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숭고한 삶이며 포기하면 안 될 것이고 궁극적인 삶의 목표라고 말하는 자들에 의해 한때는 꿈꾸었던 자들, 하고자 하는 꿈조차 없던 자들의 삶을 무의미한 것으로 만든 것은 아닐까.


 저 높은 하늘 위 떠있는 별빛이 강물 위 흔들리는 빛망울보다 위대하지 않다. 수풀 사이를 날아다니는 반딧불이 꽁지에 나는 빛이 골목길 가로등 속 LED보다 대단하지 않다. 생각을 정리한 이후에는 소설 속 캐릭터의 도착점을 갈아엎었다. 일을 때려치우고 꿈을 이루기 위해 집을 떠나는 결말에서 도시의 은하수 속 한 빛망울의 삶으로. 그리고 타인의 꿈과 목표에 간섭하는 것도 집어치우기로 했다. 꿈을 이루지 못했더라도, 이루고 싶은 꿈이 없을지라도 삶의 이유를 찾는 삶 또한 삶의 이유일 테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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