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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명의 작가 Mar 07. 2018

두 번째 한 달, 제주 서쪽에서


우리는 지금 여기가 아닌 곳에서만 안심한다.
이 세상에 없는 숲의 나날들을 그리워하며.

심보선, <나날들>





제주에 온 지도 벌써 9박 10일째, 

벌써 이 시간의 1/3이 지나가버렸다는 게 새삼스러워지지만

지나간 날들의 사진과 기억들이 모두 설명해주고 있다. 시간은 갔고, 나는 그 안에 있었지.

그것이 나를 편안하게 한다는 사실. 나의 '안도'가 지금 여기에 있다는 것.



나는 왜 다시 제주에 왔을까?


작은집의 '보리'를 끌고 나섰던 3월 4일의 아침 산책길. 



말만 해도 다들 부러워하는 '어딘가에서의 한 달 살이'가 이로써 두 번째, 4년 만에 돌아오게 된 제주 북서쪽.

신비스럽고 아름다운 바닷빛, 어-디 멀-리의 해변에서나 볼 수 있을 것 같은 

키 큰 야자수 길이 있는 여기는 '금능'


4년 전, 배낭여행을 떠나기 위해서 휴학을 하고 꼬박 알바를 했던 날들의 보상으로

금능 바다 옆, 협재에서 한 달을 지내기로 했다. 어느 게스트하우스의 스태프라는 이름으로.


그때 제주도에 집을 지으려던 추언니를 만나게 되었고, 같이 올레길을 걷거나 커피를 마시러 가거나 

가는 봄날을 아쉬워하는 영화를 함께 보기도 하면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어떻게 보면 인연이란 건 참 이상해서, 절대 만날 수 없을 것 같은 사람끼리 만나기도 하고

만날 수밖에 없었던 인연을 찾은 것 같기도 한 순간들이 있고 ...

후자에 더 가까운 인연들을 만들어 나가면서 제주의 나날들은 지나갔다.


내가 제주도를 떠난 후 추언니는 곧 집을 짓기 시작했고, 

다음 제주 여행으로는 <추의 작은집>을 꼬박 꼬박 찾았던 몇 년간의 기억.


여행을 와서 함께 맥주를 마시다가 '언니 이거 들어봤나요' 하며 들려줬던 권나무의 노래가

작은집에서 라이브로 울려 퍼졌던 것도 벌써 2년 전 추석이다.

권나무씨를 공연에 모시고 싶다며, '조용한 팬'을 자처하던 나에게 그와 닿을 수 있는 방법을 묻던 언니의

물음에 두근두근, 페이스북 메세지로 의사를 물었던 기억이 난다. 엄청 떨렸었고 또 기뻤었는데.

꽤 많은 기억과 장면을 공유한 우리 -





어찌 저찌 그렇게, 무엇을 그리워할 마음의 여유나 '훈기'가 없던 1월의 어느 날에 추언니에게서 

연락을 받게 되었다. 지금 일을 하고 있지 않으면, 연수 같은 친구가 와주었으면 좋겠다고.


 

웃음이 예쁘고 마음이 근사한 사람, 이라는 책 제목을 본 적이 있다.



제주도에 오게 된 것이 그 제안 때문만일 리는 없었다.

실제로 떠나는 일을 결정하기 전까지 너무너무 오랜 시간 '지금 떠나는 게 맞는 것인지', 

'떠나고 싶은 이유나 목적이 있는지'를 깊게 고민했었다.

나는 벌써 스물일곱이 되었고, 적당히 만족할 직장 같은 걸 찾아 들어가지 못했으며 

일상적 고민과 살아가는 문제를 전혀 해결하지 못했기 때문에. 

왜 '문제'라고 부르고 싶지 않은 문제들만이 나를 불가능하게 하는지, 너무 이상하게 느껴졌던 나날들.


그리고 아주 슬프게도, 나는 '불행'을 입에 담고 있었다.
아주 오랜 기간을 불행한 마음과 불안한 표정으로
가까스로 추위와 맞서 떨고 있었던, 내가 어색한 나의 모습


100원짜리 동전 18개를 짤랑거리며 동네를 어슬렁거렸던 어느 오후에.



그래서 그 불가능 같은 건 아래로 아래로 묻어두고, 일상에서 조금 멀어지는 선택을 하기로 했다.

'두고 떠나는' 일이 무언가를 해결하는 방법이 되지는 않는다는 걸, 이제는 너무나- 잘 알고 있고

1인분의 삶을 책임질 방도를 어서 빨리 찾아야 한다는 걸 당연히 알고 느끼고 있지만,

나의 불행에 끊임없이 일조하는 그 고민들을 언제까지고 안고 있을 수가 없었다.



우리집에 강아지를 보러 오는 동네 꼬마 경수, 그리고 우리집 '보리'



여기가 아닌 다른 곳에서 지상에 없는 숲을 그리워하는 나날들 !

그렇지만 가까이에 바다와 아름다운 숲의 향기가 있는 제주에서의 나-날-들.

단 한순간에 모든 게 달라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나는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

누군가가 꾼 어젯밤의 꿈 얘길 듣고, 누군가가 지어준 맛있고 건강한 (영양 균형이 알맞은!) 밥을 먹으면서.


더 긴 이야기를 시작하고 싶은데, 사실 너무 늦게 기록을 시작해버린 탓에 머릿속이 뒤죽박죽이다.

조금씩 조금씩 꺼내 놓아야지. 조금 궁금하고 많이 부러워할 수 있도록 ~ !


아, 3월 7일 오늘 제주에는 비가 온다. 우산도 없이 나왔는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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