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확한 사랑을 읽기 위하여
지난 금요일, 십년지기 친구들을 집에 초대해 맛있는 걸 나눠 먹고 시시콜콜 떠들다가 내가 이런 말을 했다.
"나는 연어랑 곱창이 싫어. 그 둘을 서로 완전히 다른 방식으로 싫어해."
그랬더니 친구들이 눈동자를 반짝이며 그 이유를 물어보았다.
"연어는 내 인생에 너무 늦게 도착한 것이라서, 익숙하지 않아서 싫어하게 됐고 곱창은 내 생활 너무 가까이에 존재했던 거라 싫어해. 근데 그걸 싫어하면 곧잘 역적으로 몰린다니까? 연어랑 곱창을 좋아하는 사람들이 너무 많아서 말이야. 내 친구들도 연어랑 곱창이라면 사족을 못 쓰는데, 걔네들 앞에서 그것들이 싫다고 말해야 할 때마다 걸핏하면 뭔갈 싫다고만 말하는 사람 같아져. 뭐, 완전히 아니진 않겠지만..."
이 친구들은 만나기만 하면 너 정말 이런저런 걸 잘한다, 그러니 글을 써 봐, 집 꾸민 걸 어디 올려 봐, 사진을 본격적으로 찍어보는 건 어때, 하며 내가 조금 더 꿈틀거리기를 나보다 더 바라 준다. 이 말인즉슨 내가 '연어랑 곱창이 싫다'는 문장을 뱉는 순간 그들은 벌써 나를 <연어랑 곱창이 싫은데요?>라는 책의 작가로 만들어버린다는 것이다. 싫은 것만 계속 써도 책이 되겠다면서.
그게 중요한 게 아니라고 툴툴거려도 소용이 없다. 그러기로 결정하는 순간 그렇게 불러버리니까!
재밌다며 부추기는(?) 친구들 덕분에 연어랑 곱창이 싫은 나는 그다음 싫은 것을 줄줄이 읊어댔다.
내가 근래 또 싫어했던 건 누구나 다 갖고 싶어 하는(혹은 갖고 있는) 애플 워치다.
나는 평상시에도 핸드폰을 무음으로 해두는 사람이다. 카톡 알림을 다 꺼두고도 어플 위로 뜨는 빨간 팝업이 힘들어 그 알림마저 보이지 않게 해 놓는 무알림의 인간. 사사건건 시달리는 게 싫은데 알림을 보고 그냥 지나치질 못해 언제나 피곤해 하는 류의 그런 사람인 것이다... 그러니 이런 내게 애플 워치라는 물건은...
사실, 핸드폰의 온갖 알림을 싫어하기 때문에 애플 워치를 싫어하게 된 건 아니다. 매 순간 애플 워치에 반응하는 상대방을 보는 게 늘 속 시끄러워서 그렇게 됐다. 그들은 손목에 오는 진동에 매번 반응했고 곧잘 본인만의 시공간으로 옮겨 갔다. 누군가의 바쁜 일이야 내가 짐작하고 마는 것이지만, 나와 함께 있는 시간에 홀로 어딘가로 떠났다 돌아오는 걸 묵묵히 기다리는 건 늘 좀 피곤하게 다가왔다.
내가 그걸 안 써봐서 그런가? 아니면 내 앞에 앉은 저 사람보다 덜 바빠서...? 타인의 메시지에 시달리고 싶지 않은 나만의 마음으로 무작정 상대방을 평가해버리는 건가? 매번 복잡한 기분으로 그 순간을 버티곤 했지만, 결론적으로 나는 손목에 오는 알림에 늘 시달리는 사람과 함께하는 시간이 힘들다. 그래서 싫고, 갖고 싶은 마음도 생기지 않는다.
아무튼 요즘은 매일매일 '싫어하는 것들의 목록'을 작성하고 있다.
무언가를 싫어한다고 이야기하다 보니 그 안에 내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 조금 더 좋아하는 것이 보인다. 애플 워치가 싫다는 건 마주 앉은 사람과의 시간에 집중하는 걸 중요하게 생각한다는 뜻이다. 연어를 싫어한다는 건 우리 가족의 '입맛의 역사'가 나에게로 이어졌고, 그것의 증명이 지금의 나에게 때때로 중요하다는 것(쓰면서 야-악간 끼워맞춘 기분이 들긴 하지만 사실은 정말 그렇다)이다. 곱창이 싫다는 건 내 엄마의 무릎을 닳게 만들었던 온갖 내장들이 밉고(엄마는 10여년간 순대국밥집을 했었다), 더 이상 엄마의 건강을 해치는 것들과는 상종(?)하지 않고 싶으며, 건강한 이대로를 오래오래 보고 싶다는 것이다.
싫어하는 마음보다 좋아하는 마음을 더 많이 말하는 사람이 더 큰 사랑을 받는다는 걸 안다.
하지만 나는 이 이야기를 무척 잘 해내는 사람이고 싶다.
따가운 외피를 모두 벗겨낸 다음에는 그 속의 부드러운 사랑이 조금 더 잘 읽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