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혜진, <딸에 대하여>를 읽고
인생을 살아갈수록, 누군가와 만나고 헤어지는 일을 반복할수록 더 잘 알게 되는 게 있다면 그건 바로 타인을 이해한다는 말이 가진 완전한 불완전함이다. <딸에 대하여>는 그 사실을 당신에게 정확히 알려주기 위해 쓰여졌다. 그리고 어쩌면 당신이 누군가를 이해하려고 애쓸 때 겪는 두려움과 고통을 미리 보여주면서 당신이 조금 덜 좌절하도록, 조금 덜 힘들어하면서 이해의 말을 건넬 수 있도록 돕기 위해 쓰여졌는지도 모른다.
책의 주인공은 레즈비언인 딸을 가진 중년의 여성이다. 갑자기 사정이 생겨 목돈을 마련해달라는 딸에게 집으로 들어오기를 권유하는 그는 이후 자신에게 닥칠 큰 변화를 알지 못한다. 그녀의 딸은 레즈비언이라는 정체 때문에 자신의 부모에게도, 시간강사로 일하고 있는 직장에서도 비정상적인 존재로 인식되어버렸다. 불안정한 직업을 가진 30대, 가정을 갖고 아이를 낳을 수 있는 '대견한 일' 같은 건 할 수 없는 상대와 사랑하고 있는 여자. 그녀는 자신과 같은 동성애자 강사들을 쫓아내려는 학교의 의견에 반발하며 시위에 참여한다. 시위를 하면서 필요했던 돈을 자신의 파트너와 함께 마련한 보증금에서 가져왔고, 집주인과의 합의가 이루어지지 않아 애인과 함께 엄마의 집으로 들어오게 된다. 별안간 두 사람을 집에 들이게 된 '나'는 그들을 지켜보는 것도, 딸이 사랑하는 '그 애'의 호의를 받는 것도 그저 어렵기만 하다. 무료하고 안전한 생활을 지속하고 있던 '나'에게 이들의 등장은 어쩔 수 없는 변화의 시작이기도 하지만 이 모든 것의 이해로 향하는 첫 번째 사건이기도 하다.
‘나’는 요양원에 일하며 보살피고 있는 ‘젠’의 사건을 통해 변하게 된다. 인권활동가로 세계를 돌아다녔던 '젠'은 화려한 과거를 가졌지만 이제는 몸도 제대로 가눌 수 없는 치매노인이 되었다. '젠'은 그녀를 취재하러 온 사람들에게 아무 답을 내놓지 못했고 더 이상 쓰임 없는 존재가 되어 요양원에서 쫓겨나게 된다. 그때 ‘나’는 '젠'을 본인의 집으로 데려오게 되면서 급작스런 변화에 따르는 수고로움을 감당하려는 주체가 된다. 자신이 꾸준히 지켜왔던 단조로운 삶의 리듬을 제 손으로 직접 깨버린 꼴이 됐지만 이는 사실 ‘젠’이 아니라 ‘나’ 자신을 위한 일이었다. 왜냐하면 ‘나’는 ‘딸에 대하여’ 조금 더 잘 알고 싶었으므로. 세상을 향해 제 몸을 힘껏 던져버리는 딸의 마음을 조금은 이해해보고 싶었기 때문에 '나'는 사건과 직접 부딪쳐보는 경험을 택한다.
타인을 습관처럼 이해하면서도 되려 내가 이해받아야 할 때, 세상의 절반이 싸늘하게 등을 돌려버리는 여성의 서사 속에는 이 글과 같은 고군분투가 존재한다. <딸에 대하여>는 온갖 어려움 속에서도 타인을 이해하기 위해 노력하는 여성들의 태도를 '나'를 통해 아주 잘 보여주고 있다. 딸의 정체 앞에서 고민하고 고통받던 ‘나’가 자신의 딸이 남들이 말하는 '정상적인 삶'이나 '평범한 인생'에 반기를 드는 게 아니라는 걸 깨닫는 순간이 평범하지 않게 느껴지는 건 전혀 이상한 일이 아닐 것이다. 소설의 후반부, ‘나’가 마음속으로 속삭이는 말속에서 우리는 이미 그녀가 자신의 딸을 이해해버렸다는 것을 느낄 수 있다.
“그건 내 딸이 여자를 좋아하는 것과는 아무 상관이 없는 일이잖아요.
난 이 애들을 이해해 달라고 사정하는 게 아니에요.
다만 이 애들이 잘할 수 있는 일을 하도록 내버려 두고 그만한 대우를 해 주는 것.
내가 바라는 건 그게 전부예요.”
그녀는 적어도 자신과 다른 사람을 진실로 이해할 수 있는, 이해를 위해 노력하는 인간이 되었다. 그것이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는 건 우리가 이미 다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