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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민 Aug 20. 2024

오늘 내가 버린 이야기

결코 책이 되지 못할 이야기 - part 2

<소년 그리고 마왕>


 동화책은 담벼락에 넌 이불 냄새다. 고양이처럼 몸을 비비며 안겨드는 온기다. 달빛에 반짝이는 조약돌을 따라 동화 속 세상으로 들어갔다. 과자로 만들어진 지붕을 떼어먹고 창문을 갉아먹었다. 탐욕스러운 공주들과 무책임한 왕자들, 제멋대로인 왕들이 사는 세상을 여행했다. 내게 동화는 이국의 풍경이었다. 아주 먼 곳에 있어서 평생 가도 닿지 못할 나라의 이야기였다. 언젠가 어른이 된다는 것도 상상 속의 이야기인 줄만 알았다.  어린 내게 무서운 일이 생길 때마다 커다란 성냥 통을 갖고 가 옥상 귀퉁이에 숨어 하나씩 그었다. 멋진 식탁과 반짝이는 그릇들을 떠올렸다. 게르다가 카이의 심장에 박힌 거울 조각을 내버려 두길 바랐다. 그저 지치고 목마른 여우가 잘 익은 포도를 듬뿍 먹길 바랐다. 인어공주가 왕자의 심장을 찌르고 살아남아 주길 바랐다. 황금알을 낳는 거위가 있다면, 아니 황금알 하나라도 있다면 얼마나 행복할까. 은도끼 하나라도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금도끼나 은도끼는커녕 녹슨 도끼 하나 없었고 도끼를 휘두를 힘도 없었다. 미운 아이였던 내가 우아한 백조가 되어 헤엄치는 날이 오길 바랐다. 그곳은 나를 구원해 주는 유일한 공간이었다. 


 그곳에서 쫓겨났을 때는 봉봉을 한참 타다 맨 땅을 딛는 느낌이었다. 동화 속 세상에서 행복하게 살던 소년에게 선생이 너는 가난한 아이에 불과하다고 말한 날이 있었다. 소년은 도서관으로 도망쳐 책을 읽기 시작했다. 책을 읽는 만큼 마음이 자랐고 책을 읽는 동안 몸도 자랐다. 동화와 현실을 구분하라고 어른들은 말했지만 그들의 현실이라고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랬다면 그랬을 것이다. 분수를 알아야 된다는 그의 얼굴이 행복해 보였다면 따랐을 것이다. 주제를 알아야 한다는 그의 목소리가 거칠지 않았다면 들었을 것이다. 꿈은 어린 아이나 꾸는 거라는 그의 표정이 지쳐 보이지 않았다면 그만뒀을 것이다. 뭐가 되고 싶은지 몰랐지만 무엇이 되기 싫은지는 알 수 있었다. 


 꿈을 포기하지 않던 소년은 어느 날 마왕을 만났다. 도서관에서 집으로 돌아가는 골목. 지는 해를 등지고 그가 걸어왔다. “꿈을 꾼다면 껍질을 깨고 나와야 한단다. 그래야 하늘을 나는 새처럼 자유로워질 수 있단다. 민물장어도 꿈을 꾸고 매미도 꿈을 꾸지. 사람은 꿈을 꾸어야 한다. 그러니 세상의 문 앞에서 망설이지 마.  어디로든 갈 수 있을 테니 걱정하지 마. 네 마음 깊은 곳의 목소리를 따라가. 하나의 목소리, 하나의 숨결로 나아가. 꿈을 위해 모두 태우고 난 후에야 온전한 삶이 태어난단다.” 마왕은 세상을 떠났고 소년은 중년이 되었다. 소년은 오랜 세월 헤매다 동화 속 세상으로 돌아왔다. 많은 일이 있었지만 이곳으로 돌아오기 위한 여정이었다면 납득할 수 있다. 동네 공원으로 가는 길에는 벚꽃 나무가 심어져 있다. 봄이 되면 구름 위를 걷는 듯 발걸음이 가벼워진다. 벚꽃이 지고 초록 잎이 돋아날 무렵이면 딱 한 그루 겹벚꽃나무가 꽃을 피운다. 누군가의 실수가 아닐까 싶지만 뜻밖의 선물을 받은 기분이다. 인생에서 일어나는 일도 마찬가지 아닐까. 잘못된 선택을 한 거라고 생각하지만 꽃이 저마다의 계절로 피어나듯 어디에 있건 그곳은 우리가 와야만 했던 장소일 거다. 이렇게 된 건 이렇게 되어야만 했던 거다. 어디에 피어도 꽃은 찬란하듯이 어디에 있건 삶은 눈부시다. 연꽃은 진흙탕을 탓하지 않고 그곳을 자신이 피어있는 장소로 정의해 버린다. 우리가 가진 생명력이 그보다 못할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는다.  


 부디 인어공주처럼 살 수 있기를 바란다. 혀를 자르는 고통도 칼날 위를 걷는 아픔도 사랑이니까. 어차피 물거품처럼 스러질 인생이라면 파도처럼 밀려들어야지. 부디 허풍선이 남작처럼 살 수 있기를, 우유로 된 바다를 가로질러 치즈로 만들어진 섬에 닿기를. 얼음사탕 초원을 지나 크리스마스 숲으로. 레모네이드 강을 건너고 장미호수를 지나 마리가 기다리는 아몬드 과자 성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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