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여행작가 이지상 May 20. 2019

여행기는 논픽션일까 허구일까

언어라는 기호로 만들어 가는 중간세계 

언어는 중간세계다   

  

 언제부턴가 글에 회의를 느끼게 되었다. 언어의 한계를 보았기 때문이다.

 언어는 결코 현실을 재현하지 못한다. 언어라는 기호가 만들어내는 세계는 ‘리얼’이 아니다. 그것은 중간세계다. 꼭 허구적인 소설만이 아니라 글로 표현되는 모든 것이 그렇게 보였다.

 언어철학자 바이스게르버에 의하면 인식의 대상인 객관 세계와 인식의 주체인 ‘나’ 사이에는 언어의 장막이 있고 그것이 나의 인식의 방식을 좌우한다. 우리는 그 언어라는 장막을 통해 새로운 장막, 즉 중간세계를 만든다. 글을 쓰면서 나는 그것을 많이 느꼈다. 

 자신이 여행 중 겪었던 상황, 보고 듣고 느꼈던 것을 적는다 해도 그 '모든 것'을 다 적지는 못한다. 그중의 일부분을 '언어화' 시킬 뿐이다.  또 글로 표현할 때는 그 '모든 것'을 다 적을 필요도 없고 그것은 불가능하다. 그렇지 않은가? 시시각각으로 닥치는 순간순간을 포착해서 적는다는 것은 불가능하다. 읽는 이들이 그런 것을 원하지도 않는다.  의식의 흐름을 좇거나 눈앞에 펼쳐지는 그 모든 것을 적겠다고 마음먹는다면 시도는 해볼 수 있겠지만 그것은 불가능하고 아무 소용도 없는 글이다. 솔직하게 쓴다고 모든 것을 쓰려고 한다면 그건 병적인 상태다.


 글이건, 말이건 우리가 언어를 통해 표현할 때는 수많은 기억들 중에서 중요하고 인상적인 것을 선택한다. 그걸 통해서 자신의 의도, 메시지를 보여주는 것이다. 즉 기억을 편집하는 것이다. 또 글의 형태에 따라 분위기가 달라진다. 에세이는 감상이 들어간 부연 수채화처럼 나오고, 배낭 여행기는 꼼꼼하게 보여주는 유화 같은 분위기가 된다. 결국 글이란 모든 것을 '있는 그대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선택적 편집에 의해 뭔가를 만들어내되, 사회에서 만든 ‘틀’을 통해 보여주는 것이다.


 글에 미숙한 사람은 자기가 겪은 것을 나열식으로 다 풀어쓴다. 글에 재능이 있는 사람은 초점을 드러내기 위한 선택적 편집을 잘한다. 말도 그렇다. 아무리 재미있는 이야기도 길게 나열식으로 말하면 재미가 없다. 반면에 말 잘하는 사람은 초점을 잡아서 잘 편집한다. 글을 잘 쓴다는 것은 아무 때나 ‘멋진 문장’을 쓰는 것이 아니라, 선택적 편집을 잘한 것을 말한다. 이걸 잘하면 멋진 표현이 없어도 재미있고 감동적인 글이 될 수 있다


 어떤 도시에 관한 여행기를 쓴다면 그 도시에서 겪었던 것을 모두 보여주면 안 된다. 그곳에서 체험한 것 중에서 자신을 지배하는 이야기, 감정, 분위기 등을 중심축으로 해서 풀어나가야 한다. 가령  2박 3일 동안 묵은 그곳에서의 시간이 100% 행복했던 것은 아니었지만 내 기억을 지배하는 감정이 행복감이었다면, 그걸 초점으로 잡아서 글을 풀어나가면 된다. 만약 나를 지배하던 감정이 피곤과 따분함이었다면 그렇게 풀면 된다. 모든 것을 미화시킬 필요 없다.

 문제는 피곤하고 따분했는데, 멋지고 행복했다는 식으로 혹은 멋진 문장을 동원해서 쓴다면 '거짓 글'이고 글도 나가지 않는다. 하지만 내 지배적인 감정이 행복감이어서 그걸 중심으로 편집했는데, 그 과정에서 불쾌하고 안 좋은 일들을 모두 모두 다 보여주지 않았다고 그 글을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

 한정된 지면에 쓰는 글은 이런 과정을 거친다. 즉, 중심 되는 감정, 의도를 지배 축으로 하면서 그 외의 사소한 것들은 많이 생략하게 된다.  세상의 모든 글은 다 그렇다. 한정된 지면에 쓰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어떤 장소, 시간에 대해서 글을 쓸 때 초점을 먼저 생각해야 한다. 나를 지배했던 것이 무엇일까? 그 중심축을 잡은 후에 그걸 중심으로 쓰면 된다. 그림도 마찬가지, 사진도 마찬가지다. 초점이 필요하다. 사소한 것을 지리멸렬하게 나열하는 글은 아주 피곤하고 쓸모도 없다. 특별한 목적이 있다면 물론 괜찮지만.


 가끔 에세이 류의 글, 감성적인 글을 작가들의 글 장난, 과도한 감상으로 폄하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사실적인 글이야말로 진정성이 있다고 생각한다. 대개 촉촉한 감성이 부족하거나 여행을 급하고 빡빡하게 한 사람들이 그런 시각을 갖는다. 하지만 빡빡한 기억을 다 표현한다 해도 자기 체험을 모두 적지는 못한다. 그것 역시 적고 나면 자기 체험의 부분일 뿐이다.


 반면에 과도한 감상, 허구적인 분위기를 마음껏 창조하면서  ‘글을 위한 글’을 쓰는 사람들도 있다. 특히 글에 재능 있는 사람들이 그렇게 한다. 조심할 일이다. 소설이라면 ‘허구적인 이야기, 감정’들을 마음껏 풀어놓을 수 있겠지만 여행기라는 논픽션의 글에서는 위험하다. 현실과 유리된 아름다운 글은 거짓이 된다.

 그것을 보고 그 나라, 그 현장이 정말 그런 줄 알고 가는 여행자들이 있기에 책임이 따른다. 그게 여행기의 어려운 점이다. 더 멋진 글, 더 아름다운 글을 쓸 수 있어도 자제해야 할 때가 있다.

 이런 고민과 과정을 모른 채, 멋진 글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평범하고 담백한 글에 대해 ‘문학성이 없다’라는 식으로 깔보고, 오히려 각색하고 과장한 허구적인 글을 보고 아름답다고 감탄한다. 그리고 정말 그곳의 현실이 그런 줄 믿다가 직접 가서 환상이 깨지는 아픔을 맛보기도 한다. 여행기뿐만 아니라 종교, 정치, 일상에서도 수없이 나타난다. 언어란 필요하지만 정말 조심해야 할 도구다. 


 글이란 것이 이처럼 나와 현실 사이에서, 선택적 편집을 통해 나타나는 중간세계라면 이 세계의 불완전함, 어긋남, 표현되지 못하고 상실되는 것들, 약간의 허구성은 어떻게 처리해야 하는가?

 바로 이 지점에서 나는 언어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었다. 학문을 떠나 그걸 해결하고 ‘언어관’을 확립해야만 전진할 수 있었기에 나에게는 절실한 문제였다.

 이런 얘기의 근원을 파고들면 스위스의 언어학자 페르디낭 드 소쉬르(Ferdinand de Saussure)가 나온다. 그에 의하면 음성 기호(말)든, 문자 기호(글)든 모두 인간이 ‘자의적’으로 만든 것이지 하늘에서 주어진 것이 아니다. 그는 말이나 글자로 표현된 것을 시니피앙[기표, 記票]이라 부르고, 그것의 뒤에 숨어 있는 개념, 뜻을 시니피에[기의, 記意]라고 부른다. 예를 들면 ‘개’라는 기호는 개라는 시니피앙[발음, 혹은 글자]과 그것이 안고 있는 개의 개념, 의미 즉 시니피에가 결합하여 형성된다. ‘개’라고 발음하거나 글자로 썼을 때, 그것이 곧 현실 속의 ‘개’는 아니다. 다만 우리는 ‘개’라는 기호를 통해 개념을 연상하면서 인지한다.


 언어학자 오그덴(C. K. Ogden)과 리차즈(I. A. Richards)도 비슷한 말을 한다. 그에 의하면 기호는 대상과 1:1로 직접 관련되지 않고 기호 뒤에 숨겨진 대상의 개념을 통해서 우회적으로 인지하고 소통한다.          


□ 오그덴과 리차즈의 삼각꼴     


               대상의 개념

     (Thought of reference)         


 상징 -------------------------- 대상

(Symbol)                              (Referent)     

        

 개라고 했을 때 표현된 글자나 말 그 자체가 현실 세계의 개는 아니다. 언어는 다만 상징일 뿐이며 우리는 그것이 품고 있는 개념을 통해 우회적으로 개를 인지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똑같은 언어를 써도 각자 자기 식대로 해석한다. 개라는 말을 듣고 떠올리는 개가 사람마다 다른데 하물며 정의, 선 등의 추상 명사나 형용사, 부사는 말할 것도 없다. 이렇게 우리가 기호로 인지하는 세상은 각자가 다르고, 상대적이며, 불안정하다.


 우린 스스로 보고, 느끼고, 생각한다고 믿지만 사실은 예전부터 언어권에서 형성된 ‘언어라는 굴레’에 갇혀 있다. 언어라는 색안경을 끼고 세상을 보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보면 인간은 언어라는 구조와 굴레 갇힌 막힌 존재가 된다.


 그러나 철학자 폴 리쾨르(Paul Ricoeur) 등의 해석학적 관점에서 보면 다른 것이 보인다. 언어는 추상적인 체계, 구조에 갇혀 있지만 인간은 구체적인 현실 속에서 언어를 통해 대상을 해석하고 의미를 생성한다. 언어는 ‘있는 그대로’의 현실을 잡아내지 못하지만 거기서 발생하는 직관, 상징, 의미가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한다. 이렇게 보면 인간은 언어라는 굴레를 벗어나 더 넓은 세계로 나갈 수 있다.


 나는 여행기를 쓰면서 그런 고민을 많이 했었다. 어떻게 멋진 표현, 멋진 글을 쓸까라는 고민보다 상징적인 기호인 글을 통해서 형성되는 세계는 무엇이며, 이 닫힌 구조 속에서 글을 쓴다는 것은 무슨 의미일까?

 글을 쓰면서도 많은 회의를 했었다.  그러다 해석학적 관점에서 언어를 바라보면 나는 탈출구를 찾았다. 여행기라는 논픽션을 쓰지만 나는 현실을 재현하는 사람이 아니고, 소설가처럼 허구를 생산하는 사람도 아니다. 다만, 내가 여행과 삶에서 느꼈던 것들 예를 들면 해방감, 자유, 사랑, 슬픔 등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서 '상징적인 기호'인 언어를 사용하기로 했다. 상징적인 기호가 내가 의도한 것을 전달하는데 적절했다면 만족하는 것이고, 과도하거나 너무 부족하면 고민이 된다.

 나는 언어를 현실을 재현하는 기호를 넘어서 해석을 통해 의미를 생성하고, 우리의 삶을 풍성하게 하는 ‘그 무엇’으로 보았다. 그때부터 언어에 대해 긍정적인 태도를 갖게 되었다. 글은 현실을 있는 그대로 재현하지 못한다 해도 자기 세계를 만들어가는 소중한 도구였다. 과도한 과장, 장난, 거짓말, 기획성, 상업성 등으로 현실을 왜곡하는 글도 피하고, 현실을 그대로 보고하는 무미건조한 글도 피하면서 중도의 길을 걷기로 했다.


 인간은 언어라는 굴레에 갇혀 있지만, 동시에 언어를 통해 ‘중간세계’를 창조하는 존재다. 중간세계란 과거와 현재와 미래, 객관과 주관들이 모여서 만들어지는 ‘나의 세계’다. 돈벌이의 수단을 넘어서 나의 세계를 만들어가는 재미 때문에 글을 쓰겠다고 마음먹자 힘이 솟구치기 시작했다.



매거진의 이전글 자료를 대하는 태도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