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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여행작가 이지상 May 30. 2019

영화'기생충'을 계급적 관점에서 보니

사회 계급적 관점에서 보게 되면... 

동네 극장에서 혼자, 영화 기생충을 보았다. 

9시 상영인데 거의 다 꽉 찼다. 혼자 오는 사람들이 꽤 많다. 아니, 이 시간에 영화를 보러 오는 젊은이들, 중년 남녀들은 뭐지? 나야, 그렇다 쳐도.

영화의 스토리 소개는 그만 두자. 스포일러가 되고 싶지는 않다. 나는 영화 평론가도 아니고 영화를 자주 보는 사람도 아니다. 그러니 영화평도 그만둔다. 다만 관객으로서 이야기할 뿐.  재미있고, 빨려 들고, 배우들 연기 다 잘한다. 그러니까 황금 종려상을 받지. 당연한 것이다.

그런데 봉 감독의 작품들, 살인의 추억, 괴물, 설국열차를 보고 이번 작품을 보니 역시, 봉 감독의 개성이 드러나는 작품이란 생각이 든다. 전번과 다르면서도 또 같은 점들이 와 닿는다.

일반 관객으로서 영화를 즐겼지만 대학원에서 사회학을 전공했던 나는 영화 속의 에피소드들, 대사들에서

계급, 사회현상에 대한 풍자, 비판을 본다. (사회학을 전공한 봉 감독도 그런데 관심이 있는 것 같다.

 설국 열차도 그렇고, 괴물, 살인의 추억에서도 그런 것이 보인다.  아마 이 영화를 보고 또 많은 논란, 이야기들이 무성해질 것 같다.)


처음에는 웃고 보다가 나올 때는 착잡했다. 다른 사람들도 그런 것 같다. 조용했다. 계속 여운이 남았다. 끔찍한 사건이 있어서만은 아니다. 생각을 자꾸 하게 만든다. 생각을...


영화 '설국 열차'도 생각을 많이 하게 했다. 프롤레타리아, 부르주아지들을 양극으로 갖고 있는 열차에는 칸마다 다른 계급들이 다른 환경에서 견디고 있다. 국 밑바닥 층의 사람들이 들고일어나 투쟁을 벌인다.

나는 내내 보면서 결말이 궁금했다. 결말은 열차 자체의 파괴. 즉, 낡은 패러다임의 파괴. 이분법적, 계급론적, 틀에 씌워진 세계의 파기, 그 세계관으로부터의 탈출로 여겨졌다. 


여기서도 그런 스토리가 읽힌다. 이 영화는 없는 자, 있는 자 혹은 어느 정치 성향의 사람이 보아도 불편할 수 있다.  영화에 나오는 못 사는 이들은 열심히 살다가 망한 사람들이다. 실업자에 백수들이지만 그래도 반지하 방에서 피자 박스를 접으며 살아간다. 그렇다고 정의롭거나 불쌍하게 보이지는 않는다. 자기들의 생존을 위해서 거짓말, 사기 등을 벌이고 문서 위조에 거짓말을 하면서 돈을 버는 아들을 '자랑스럽게' 여긴다. 그들의 거짓, 사기 행각이 코믹하게 그려져서 나쁘게 보이지만은 않지만 윤리적으로 정당하지는 않다. 결코 심정적 지지를 보내고 싶어 지는 상황은 아니다.


거기다 집주인 부자 가족이 집을 비운 사이 또 다른 빈자들이 등장하고 '빈자들끼리' 엎치락뒤치락 싸우는 가운데 한쪽에서 북쪽 아나운서 흉내를 내고, 동영상을 주인에게 날리겠다고 협박하며 휴대폰 버튼을 핵미사일 버튼과 비교하는 가운데 벌벌 떨며 손들고 있는 또 다른 쪽의 모습은 매우 코믹하면서도 우리의 현실에 대한 풍자로도 다가온다.(딱 맞아떨어지는 것은 아니지만...)  

허약하고 위선적이지만 단순하고 여유 있고 착해 보이는 부자의 모습을 부러워하는 없는 자들의 모습은 측은하면서도 초라하게 보인다.


 그런데 상황은 여기서 끝이 아니다. 부자들은 편안하고, 착하고, 온순해 보이지만 꼭 그렇지만도 않다.  부자로 나온 이들은 섹스를 하면서 마약 하고 싶다고 말한다. 여주인은 딸의 가정교사 수업을 깐깐하게 참관하고, 남주인은 운전 중에 컵에 든 커피가 흔들리지 않는 것을 보면서 운전 테스트를 은밀히 한다. 그들은 똑똑한 것 같으면서도 허약하고, 잘 속고, 당한다.

자식들에게도 휘둘리는 분위기다. 또한 자기들 이익, 괘락, 가족에 집착한다. 겉으로는 온화해 보이지만 

타인을 진정으로 이해하고 사랑이 넘치는 모습은 아니다. '냄새'... 반 지하방에서 나오는 그 '냄새'를 경멸한다.

평화롭고, 온순해 보이고, 교양 있어 보이는 그들은 '냄새'를 풍기면서 살아가는 '없는 자'들을 이해할 수 없고, 거리를 두고, 경멸을 한다. 전혀 다른 세계를 사는 것이다. 결국, 그런 것이 누적되어 사건은 비극적으로 끝난다.


봉 감독의 메시지는 뭘까? 영화를 보면서, 또 보고 나서 계속 생각했다. 없다, 없는 것 같다. 비관적이다. 암담하다. '괴물'에서는 살아남은 송강호와 아이가 밥을 먹으며 발가락으로 텔레비전을 끄고  밥인가, 라면인가를 먹는다. 그 따스한 식사 한 끼, 새끼를 위하는 마음 그것이 따스하게 와 닿았다.


설국열차에서는 기차를 정지시키고 빙하의 세계로 나아간다. 막연하지만, 생명이 살아나고 있는 풍경을 보여준다. 계급 이데올로기, 그 프레임을 깨고... 그게 뭔지는 모르지만, 아무것도 없는 그 여백의 땅에서 뭔가를 새롭게 시작하는 기운... 그게 약간의 희망으로 다가왔다.


그런데 '기생충'에서는 그게 없다. 다만, 아들이 갇힌 아버지를 구출하기 위해 좋은 대학, 좋은 직장... 그런 게 목표가 아니라 돈, 돈, 돈... 을 무조건 벌어서 그 집을 사야겠다고 독백을 한다. 그런데 대학도 못 간 아들이 그 엄청난 저택 같은 집을 산다는 것이 우리 현실에서 가능한 것인가? 봉 감독이 그렇게 믿고, 그걸 메시지로 던졌다면 어처구니없겠지만 봉 감독이 그걸 모를 리 있겠는가? 결국 '이룰 수 없는 꿈'을 '독백' 할 수밖에 없는 우울한 현실을 보여준 것이 아닐까?


그리고 나는 점점 우리의 현실이 그 '돈' 너머의 세계를 볼 수 없는 상황이 되어감을 본다. 프롤레타리아든, 부르주아지든, 그 중간의 어디쯤이든 그 이상의 세계관을 갖지 못하는 현실 상황이 마치 벗어날 수 없는 그물처럼 느껴져 우울해진다. 

봉 감독에게 왜 메시지가 우울하냐고 뭐라 할 수는 없을 것 같다. 지금 현대에서 누가 시원한 메시지를 보낼 수 있겠는가? 누가 해답을 알고 있겠는가?

'거짓 희망'이 난무하는 이 세상에는 차리라 솔직한 게 더 좋아 보인다. 영화감독으로서 그런 상황을 잘 보여주고 멋진 작품을 만들었으니 박수를 보내고 싶을 뿐.


다만, 관객으로서 나는 우울했다. 영화가 끝나고 나니 11시 20분쯤. 근처 콩나물 국밥집에서 4천 원짜리 콩나물 국밥을 먹었다. 싼 메뉴를 먹는, 혼자 온 손님에 친절한 아줌마들, 돈 받을 때마다 공손한 표정을 짓는 젊은 주인, 그리고 따스한 콩나물 국밥. 모두 따스하고 고맙다.

영화는 영화고... 또 한 달, 한 달을 버틸 생각을 하며 속절없이 흐르는 시간과 다가오는 막막한 노후를 걱정하며 집에 돌아와 블로그에 글을 쓰고 또 나의 글을 쓰며 살아갈 궁리를 한다.


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어느 계급도 아니다. 여행하고, 글 쓰는 사람, 여행작가다. 출판 세계 자체가 무너지고, 사람들이 책을 거의 안 읽는 상황에서 어떻게든 살아보자고 노력하지만, 매달 수입의 관점에서 보면 프롤레타리아보다도 못하고, 분위기, 이미지로 보면 돈 많은 한량, 부르주아지다. 하여, 나는 영화 속에 나오는 이야기, 인물들과 별 관계가 없다.

그래도 여전히 우울하다. 이 우울함과 약간의 슬픔은 빈자에 대한 동정, 나 스스로의 측은함 때문이 아니다. 그렇게 내 감정과 생각을 정리하면 너무 단순해진다. 그 감정은 아주 복잡 미묘하다. 인간 자체, 사회 자체가 끝없는 슬픔을 간직하고 있기 때문이다.


 반 지하방에서 살며 빈곤에 시달리는 사람들 청년 실업자들, 노후가 막막한 중년, 노년들, 무너지는 중산층... 살기 위해 없는 자들끼리 사기를 치는 이들, 혹은 없는 자들을 위한다면서 그들로부터 자기들 이익을 뽑아 먹는 위선자들... 그리고 이런 시급한 상황에서 구름 위에서 노닐며 세상이 어떤지 심각성을 모르는 이들, 타인을 깔보는 이들... 그런 가운데 덮쳐오는 먹구름 같은 현실, 서로가 느끼는 부러움, 좌절, 거짓, 시기, 분노, 탐욕, 경멸... 이런 감정으로 엎치락뒤치락하다가 전체 사회의 파멸이 올까 봐 기분이 우울하다.


이 영화를 이분법적인 프레임으로 바라보는 것은 지적으로 게으른 태도 같다. 어떤 계급이든, 어떤 상황에서든 인간은 다 추잡스러우며 동시에 미덕도 갖고 있다.


없는 자들이 항상 정당하고, 있는 자들이 비난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고,

있는 자들이 항상 관대하고, 없는 자들이 경멸받아야 하는 것도 아니다.


어디에든, 수많은 악, 불결함, 추잡함이 들끓고 충돌하는 게 세상이다. 

그리고 바퀴벌레와 기생충들은 득실거린다.

이것들은 인간의 본성에서 오는 것이지만 사회 구조도 큰 몫을 한다. 어느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면 다른 게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것들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충돌하고, 들끓는 게 세상인 것 같다.


여기서 어떻게 벗어날 것인가? 인간, 사회 그 자체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한다.

너무도 뻔한 현실, 해답 없는 상황 자체를  이야기에 잘 녹여서, 재미있게, 그러나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영화라는 작품'으로 만든 감독의 힘, 배우들의 힘, 스태프들의 힘 때문이라는 생각이 든다.


어찌 된 일인지 '가족 영화'라고 홍보가 되고 있고 '정치적 성향'에 따라 보지도 않은 상태에서 '지레짐작으로'

벌써부터 찬성하고 혹은 반대하는 상황을 보면 좀 어리둥절해진다. 사실, 그런 사람들은 보고 나면 뒤통수를 맞은 느낌이 들 텐데... 자기들 예상이 아닐 것이다. 어느 하나에만 초점을 맞추면 다른 게 보이지 않는다. 수많은 것들이 각기 다른 상황에서 충돌하고 들끓는 게 세상이다.


나는 사회적인 상황을 담고 있는 이 시대의 묵시록 같은 느낌이 들었다. 요즘 프랑스사, 프랑스 대혁명사 같은 것을 집중적으로 읽다 보니 더 그렇게 보이는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황금종려상을 받은 이유는 단지 재미있어서가 아니라, 많은 나라 사람들이 이 영화에 나오는 빈부 이야기가 '자기 나라' 이야기라고 할 정도로 세계적인 보편성의 문제이기 때문인 것 같다.

나는 벌써부터 봉 감독의 다음 작품이 기대된다. 영화의 예술적 측면보다 그가 보는 사회, 세계, 삶... 그리고 메시지들이 궁금해서다.

 많은 대사들이 웃음을 나오게 하고, 또 연민을 느끼게 한다. 그날 밤, 엄청난 사건을 저지르고, 또 집에 물이 엄청 들어서 체육관에서 수재민이 된 송강호에게 아들이 묻는다.


"아버지 계획이 있어요?"

"없어... 계획 중에 가장 좋은 것은 무계획이야. 계획을 세우면 세상은 계획대로 되지 않아. 그래서 좌절을 하지... 그러니 계획이 없으면 그런 게 없어."


대략 이런 뜻의 말을 했지만 그 무계획의 삶이 행복하던가? 송강호의 수심 깊은 얼굴에는 계획을 세울 수조차 없는 허약함, 무기력, 체념이 엿보여서 페이소스를 느끼게 한다. 


나도 종종 아내에게 그런 이야기를 하다. 물론 먹고, 살기 위해서는 계획을 세우고 노력한다. 그러나 이 고령화 시대애 병들고, 노쇠해지는 상황에서 문득 사방이 함정이라는 생각이 들 때, 도망칠 곳이 없다는 느낌이 들 때... 계획이 없어진다. 모든 걸 운에 맡기고, 하늘에 맡기고 그냥, 하루하루를 사는 수밖에. 오늘 하루도 무사하게... 염원하면서.

그래서 행복하냐고? 원, 무슨 그런 말씀을. 그냥 그렇게 해서라도 견디는 것이 인간의 일생인가 하여 그런 거지.


사실, 사회적인 문제보다 이 나이쯤 되면 노화, 병, 생명, 존재론적인 문제가 더 암담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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