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에서 막 나와 당연하다는 듯 월세를 구할 때, 그때는 누구도 말해주지 않았어요. 34세 이하를 대상으로한 청년전용 전세자금 대출이 있다는 걸 너무 늦게야 알아버린 거죠. 뭐, 그도 그럴 것이 20대 중반부터 30대 시작 까지는 제 삶에 찾아온 블랙홀 시기가 자리잡고 있었으니까, 달리 뭐 어쩔 도리가 있었겠냐- 허탈하게 머리나 긁적이고 말아요.
매달 숨만 쉬어도 50만원이 증발되는 일상은 매달 170만원 즈음 버는 제게 퍽 커다랗게 느껴졌어요. 50만원을 지출하고도 120만원이나 되는 돈이 남지 않냐고요? 그렇죠 저는 좀 생각없이 씀씀이가 큰 것은 아닐까 싶어요. 월세로 50이 나가는데, 매달 60만원짜리 적금을 만들어 버렸어요.
청년안심전세 대출금의 10%를 마련하기 위해 최대한 돈을 모아야 했거든요. 미래에 대한 생각은 많이 했지만 '저축'이라는 카테고리로는 생각을 거의 해보지 않았는데, 나름대로 재밌더라고요, 저축이라는 것. 통장에 숫자가 차곡차곡 늘어나는 걸 지켜보는 게요.
그러나 간혹 그깟 5.5% 더 받으려고 매달 돈을 묵혀두는 게 참 부질없어 보이기도 했어요. 차라리 그 돈으로 주식을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자주 고민했지요. 그러나 아무래도 주식엔 문외한(다른 모든 경제 관련 분야가 그렇듯) 이기도하고, 롤러코스터 마냥 자주 요동치곤 하니까요. 느리지만 안전한 방법으로 다룰 수 밖에요. 무려 거주할 집을 마련(임대하는 거지만)하기 위한 거니까요.
매달 월세를 입금하고 적금을 부으며 자주 기울어진 저울, 어떤 불균형에 대해 생각했어요. 저는 현재 보증금의 90%를 대출 해주는 정책에 해당되는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극악무도한 서울의 보증금 나머지 10%를 지불하지 못해 아끼고 아껴 살아야만 하는구나. 나만이 아니라 수많은 과거와 현재의 청년들도 그렇겠지. 그렇게 우리들이 반쪽짜리 손톱만한 방에다 매달 5,60만원 월세 내며 한푼 한푼 모아 탑 하나를 쌓는 동안 다른 한편의 누군가는 몇천 만원즘 손쉽게 지원받거나 구해서 대출받아 새로 갓 지은 광야처럼 드넓고 깨끗한 투룸, 쓰리룸에 살며 월 이자로 2,30 만원을 지불하겠구나. 그리고 그렇게 아낀 돈으로 더 좋은 먹거리와 여가활동을 즐기겠구나, 혹은 투자해 돈을 또 불리겠구나. 하는 개풀뜯어먹는 생각을 자주 하곤 했던 거에요. 어떻게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있을까요. 좀 신성모독 같기도 하지만 마더 테레사였더라도 한 톨 즈음은 그런 생각을 하지 않았을까요.
조금만 더 일찍 독립해 자취를 했더라도, 또래 친구들과 함께 학교를 마치고 바로 사회활동을 했더라도 청년안심전세대출이라는 열차의 마지막 칸에 올라타진 않았겠죠? 이제 정책의 마지막 대상 나이인 34살도 코 앞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있으니까, 이 열차가 완전히 떠나간다면 90%를 정부에서 아주 적은 이자로 빌려 줄 일도 더는 없을테니까요. 근 몇일 간은 아직 실현되지도 않았지만 다가올 1월이면 하게될 이사를, 전세로의 전환을 생각하며 좀 많이 들뜨곤 해요. 물론 마냥 들뜨지만은 않지만. 작년에는 전세사기 신고 건 수가 131만 건이었다는 기사를 얼핏 본 기억이 있거든요. 그 수치가 올해라고 별반 다르지도 않을 거고요. 한달 전 부터 전세사기 예방에 대해 아침 저녁으로 들여다 보고있지만, 법은 언제나 고대 상형문자 같더라고요. 차곡차곡 정연히 늘어선 법 조항을 볼 때면 늘 까마득한 거리감을 느끼곤 해요. 법이란 녀석을 볼 때 마다 생각하게 되는 건, 이 글자들은 분명 약자들을 위한 것들이 아니다 하는 것이에요. 물론 아주 가끔 약자를 지키는 경우도 있겠지만, 기본적으로 그런 상형문자와 가까이, 친하게 지낼 수 있는 사람들은 그런 글을 접할 기회와 시간이 많았던 사람들이 아닐까 싶어요. 그리고 저와 같은 보통 사람들의 일상에 법이란 저기 밤하늘 어딘가에, 보이지도 않는 천왕성 같은 것으로 존재할 뿐이니까요. 그저 마땅히 해선 안될 것을 하지 않을 뿐이죠.
그런 사기꾼에 맞서기 위해서 그리고 안전한 매물을 찾기 위해서 벌써부터 시간만 나면 부동산 어플을 들여다 보고 몇일을 보냈어요. 꼭 안전한 보금자리를 찾기 위해 자본주의라는 정글숲을 헤치는 자그마한 새끼 원숭이라도 된 기분이었죠. 자그마한 화면을 많이 봐서인지, 천정부지로 치솟은 값을 자랑하는 서울에서 제 조막만한 동전 주머니에 있는 돈으로 구할 수 있는 집의 상태를 보며 현기증이 오는 것인지 좀 어지러운 나날이었어요. 그런데, 저는 알아요. 앞으로 더 나아질 일만 남았다는 것을. 그리고 설령 상황이 후퇴한다 해도, 이미 한 번 지나 본 길이어서 그다지 어렵지 않을 거라는 것을.
오늘 아침엔 수영을 하고 마라톤을 하며 크로스핏을 하는, 20대의 근력 보다 높은 근력을 가진 65세 남성의 영상을 봤어요. 그는 50대 까지는 직장생활에 잡아먹혀 12시에 퇴근하는 게 보통이었다고해요. 그에게 회식과 야근은 공기 같은 것이었다고 해요. 50대 초반에 했던 건강검진에서 고지혈증과 지방간, 고혈압이 나왔고 더이상 그렇게 살다간 죽을 것 같아 시작한 운동이 10년 넘게 이어진 거죠.
원숭이는 가엾게도 평생을 원숭이로 살다가 원숭이로 생을 마감하잖아요. 다른 모든 종이 다르지 않은데 오직 우리 인간만이 다르죠, 어떤 존재로 어떻게 어디에서 태어났어도 마지막에 어떤 존재로 눈을 감게 될 지 알 수 없어요. 뭐든지 가능하도록 도구를 사용하고, 기술을 배우고 사용하고, 고민하고, 상상하고, 끝내 해내기도 하는 게 인간이잖아요. 50대 초반에 다 죽어가던 사람이 65세 때는 보통의 20대 보다 건강하게 되듯이 말이에요. 그리고 저는 2014년 부터 몇일 전 까지 제 활동 한계가 1km라고, 1.5km라고, 2km라고 믿고 살았어요. 그런데 몇일 전에 4.8km를 달렸어요. 어언 9년만의 일이에요. 물론 중간에 잠깐 쉬긴 했지만- 그렇다 해도 그건 어떤 벽을 넘은 기분이었어요. 또 9년이 지나면 저는 어떤 벽을 넘고 있을까요.내년의 제가 기대되고, 내후년 그리고 5년 후가 기대돼요. 물론 그렇지 못한 시간도 하루 중 반절 이상은 차지할 때가 있지만, 그럼 뭐 어떤가요. 어쨋든 우리는 이미 고양이와 원숭이, 고등어 등 각종 동물들이 탁월한 본능과 감각을 지녔음에도 다루지 못하는 사고와 상상이라는 걸 할 수 있잖아요. 현재는 여기에 이렇게 있지만 미래엔 어디에 어떻게 있을 지를 계획하고 대비하고 상상할 수 있으니까,그것만으로 이미 몹시 감사하지 않은가 싶어요.누구에게 감사한 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이 세상에게 말이에요. 많이 감사해요. 굳이 먼지같은 생명 살려 둔 것도, 살아갈 기반 시설이 잘 닦인 나라에 있는 것도, 그러면서도 꽤나 모순과 부조리가 많아 글을 쓸 수 밖에 없는 환경까지 덤으로 얹어 준 것 까지 말이에요. 글을 즐겨 쓴다는 게 오랜만에 감사한 순간이에요. 이런 순간이 더 많이 삶에 자리잡길 원해요.
글을이어갈 수록 뭔가 대단히 감상적인 기분에 젖어드는 기분이 들어 경계심이 좀 들었지만, 요즘의 저는 이런 것 같아요. 이제 뒤돌아보는 데에 쓰던 시간은 모두 가까운 앞과 저 멀리 앞을 보는 데에 사용하고 싶어요.
-중간에 넣으려다 그냥 빼버린 토막.버리긴 아까운데 글에 넣자니 괜한 뻘소리 같아요.
앞에서 다가와 조금은 예상할 수 있을 줄 알았던 장애물이 갑자기 튀어나온 트럭 처럼 옆에서 삶을 들이 받았어요. 병을 얻고, 그 여파로 희망 없는 지지부진한 삶을 얻었죠. 학교도 더이상 다니지 않았고 원래 막역했지만 우주를 떠돌다 동력이 떨어진 난파된 우주선 처럼 텅 빈 공간을 떠도는 먼지 조각같이 표류하게 되지만 않았어도 내 삶은 많이 달랐겠지 하는 생각을 하느라 지난 20대를 다 썼어요. 아무런 준비 없이 30대를 맞아들인거죠.
허구헌날 과거에 대한 한탄에 여념이 없던 제 자신도 이제 한탄에 질렸는지, 살아나갈 구멍이 보이지 않으니 어떻게든 살려는 건지 삶을 새롭게 바라보게 됐어요. 아직 어떤 것도 이루지 않았고 심지어 90% 전세대출도 받지 않았지만 내일이 기대돼요. 얼마나 그렇다 말하긴 뭐하지만 삶이 희망차고 감사해요. 별 거는 없고, 인간으로 태어나 각종 스트레스를 받으며 살아가지만 그래도 이거 꽤나 감사한 일이라고 생각하게 됐어요. 내가 오늘 점심에 먹은 고구마와 쌀 알은 어디에서 어떻게 태어났던 그저 쌀일 뿐이고, 원하는 일은 커녕 원하는 것 조차 가질 수가 없을 거 잖아요. 가끔 하늘이 흘려주는 물 같은 것이나 받아먹고... (끊어져 중략)