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진의 변화
한진은 사라질 대상에 관심을 갖는다. 기억, 감정, 연주 같은 것들을 오래 반복해 관찰한다.
지난해 개인전 <벡사시옹> 이후 어떻게 지냈어요?
산을 자주 오르고 있어요. 아직 코로나19로 조심해야 할 시기라 현장 답사가 원활하지 않지만 가까운 산을
다니며 다음 작업에 필요한 생각을 모으고 있어요. 지난해 개인전을 하면서 더 깊게 연구하고 싶은 주제와
대상이 생각나서 꾸준히 자료 수집과 현장 답사 그리고 작업을 진행하고 있습니다.
전시 <벡사시옹>은 기억의 감정을 다룬 작업이었어요. 그림에 기억에 담긴 감정을 역동적으로 표현하셨죠. 기억에서 감정을 주목한 것은 날카롭고 인상적이었어요. 작가님이 기억을 다루는 이유가 궁금해요.
기억은 감정을 수반하기 때문에 함께 작용해요. 소멸되고 흘러가는 어떤 대상과 감정이 강하게 기억에 붙들리는 이유는 내가 주목한 대상을 오래, 반복적으로 관찰하는 시간을 가졌기 때문이죠. <벡사시옹>이라는 전시명에서도 알 수 있듯이 매우 느리게, 8백40번 반복되어 18시간 이상 소요되는 연주 과정이 작업 과정과 닮아 있어요. 찰나에 일어나는 부재와 변화는 예기치 못한 순간에 사라질 대상과 감각이지만 기억을 수식하는 중요한 단서가 돼요. 이 요소들로 인해 내가 어떤 시간 속에 있었는지 가늠하게 되는 것이죠.
말씀하신 기억, 감정, 음악 외에도 작가님의 작업에서 꾸준히 다루는 주제는 무엇인가요? 이야기나 이슈도 좋아요. 그것을 선택하게 된 연유도 알고 싶습니다.
철자상 표기되나 발음되지 않는 묵음(Silent Syllable)과 같이, 존재하지만 예기치 못한 순간에 사라질 대상과 감각을 시각화하는 것에 관심 있어요. 이들이 영원한 소멸이나 부재가 아닌 다른 움직임으로 간다고 믿기 때문이에요. <흑빙> <화이트 노이즈> <아득한 울림>과 같이 예전 전시명에서도 볼 수 있듯이 눈으로 식별이 어려운 상태, 부재하고 변하는 찰나의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감정의 변화는 음악과 유사하다고 할 수도 있겠네요. 그림에선 리듬과 비트, 멜로디가 느껴져요. 작가님에게 감정과 음악 혹은 소리의 상관관계는 무엇인가요?
사람마다 내재된 자신만의 문법이 있다고 생각해요. 저는 작업 과정에서 음악의 악상 기호와 지시어가 생각나는데, 특히 중요한 기준으로 삼는 음악의 지시어가 두 가지 있어요. 자기만의 속도로 감정을 실어 풍부하게(Andante Espressivo), 극도로 섬세하게(Assai E Con Delicatezza), 특히 극도로 섬세하게는 구스타프 말러(Gustav Mahler) 교향곡 1번 지휘자 악보 자료에서 보았는데, 지휘자마다의 표정과 손가락 마디마디 움직임을 찾아 보았던 기억이 나요. 어떤 장소나 대상에서 느꼈던 감정은 시각 하나로만 형성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청각적 기억도 중요하게 작용해요. 우리가 시각적으로 느끼는 질감이 있듯이 청각적으로 느끼는 질감도 있기 때문이에요. 이는 작품 제목을 결정할 때도 영향을 줘요. 보통은 작품 제목을 국문과 영문 두 가지로 표기하는데 간혹 두 표기에서 오는 청각적 질감을 맞추고 싶을 때는 다른 언어를 선택해요. 예를 들어 ‘오목한 밤’(2017) 작품의 경우 드로잉 과정에서 떠올렸던 스타카토(Staccato)의 느낌과 한글 모음을 발음할 때 입술의 모습, 두 지점을 살릴 수 있는 제목을 찾다가 ‘Una Notte Concava’로 결정했습니다.
기억과 감정이 다층적이듯 그림에서도 색과 기법이 층층이 쌓여 있어요. 작품이 레이어를 이룬 이유는 무엇인가요? 작업 과정에서의 고민과 어려움도 말씀해줄 수 있나요?
작업하면서 유연함 속에 구조성을 찾기 위해 노력해요. 즉흥적인 표현도 어느 지점에서는 그림의 전체 구조에
부합되는지를 생각하고 드러내거나 지우기도 해요. 이 과정에서 음악과 문학 혹은 과학과 수학 등 다른 분야의 개념이나 원리가 떠오르면 결정에 도움이 됩니다. 예를 들어 작품 중에 무수히 많은 선들이 교차하는 그림이 있는데, 특정 음악의 선율이 생각나고 들로네 삼각분할(Delaunay Triangulation) 혹은 보로노이 다이어그램(Voronoi Diagram) 이미지가 교차되어 떠올라요. 그래서 떠오른 선율과 수학 이론에 맞춰 선을 그어 나갈 때도 있어요. 하지만 그림 안에서 수학적, 과학적 원리를 표현하려는 것이 주된 목표는 아니기에 드러났다 사라지기를 반복합니다. 이런 과정에서 그림의 레이어가 형성돼요. 이 과정이 지속적이기 때문에 하나의 작품을 완성하기까지 오랜 시간이 걸려요. 결국 정량화할 수 없는 시간을 견디며 꾸준히 지속해야 하는 거죠. 흥미로운 지점은 전시 때마다 이과 쪽 분들은 수학적, 과학적 원리가 보인다고 종종 말씀해주세요. 그 이유로 그림 안에서 무수히 겹친 선의 시작과 끝나는 지점이 자유로운 것 같으면서도 계산된 영역에 위치한다는 것이었어요. 그림에는 반복적으로 긁어내거나 벗겨진 흔적이 보이는데, 기억된 장면에 대한 시각적 그리고 청각적 질감을 표현해내기 위해서는 연필과 붓 이외의 도구들이 사용되기 때문이에요. 금속공예에서 사용되는 날카로운 끌과 같은 도구 혹은 생밤을 깎는 칼 등 주방 도구도 사용해요. 그래서 재료를 구입할 때 화방도 가지만 을지로나 주방 도구 판매점도 종종 찾아요.
작품 제목이 독특합니다. 제목을 짓는 작가님만의 방식은 무엇인가요?
작품 제목을 정할 때도 비슷한 과정을 겪는데, 관심 있는 대상을 오래 관찰하거나 기억된 장면을 상기할 때 어떤 음악가의 곡 제목 혹은 문학의 한 구절을 떠올려요. 예를 들어 작품 ‘Tone Roads’(2016~2019) 연작은 찰스 에드워드 아이브스(Charles Edward Ives)의 동명의 곡에서 영향을 받았고, ‘뭇-별’(2018~2019)의 경우 현장답사를 다니면서 산성 위에서 올려다본 하늘에 펼쳐진 별들을 보며, 단테(Alighieri Dante)의 신곡 마지막 구절이 떠올라 지었어요. “태양과 뭇별들은 움직이는 사랑이었다.”
작가로서 관객에게 기대하는 것이 있나요?
작가이지만 저 또한 관객 입장에서 어떤 분야를 접하든지 정서(情緖) 하는 시간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이 시간은 능동적 에너지를 필요로 해요.
지금 작가님이 주목하는 이슈는 무엇인가요? 국내든 해외든 어떤 이슈에 귀 기울이나요? 또 그 이슈가 작업에는 어떻게 작용하나요?
내년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국내외 지질학, 물리학 자료들을 찾아보고 있는데 눈에 띄는 빈도수가 높은 단어 중에 임계점과 패러다임을 관심 있게 보고 있어요. 지구의 환경은 이미 임계점을 지나 전례 없는 급격한 변화를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는데, 이는 2016년부터 동해와 남해에 분포한 석호 지형과 해안 절벽을 다니며 자료를 수집하고 작업을 이어간 것과 맞닿아 있어요. 석호는 오랜 침식작용 속에서 해수면이 상승하고 육지의 골짜기로 바닷물이 들어와 만을 이루고 결국 바다와 분리되어 호수와 늪을 형성해요. 이와 같이 경계 지점을 일컫는 장소들의 변화와 움직임을 지속적으로 관찰하고 있어요. 이번 프리즈 서울에서 선보일 ‘해안선 #2’(2017~2018)이 이에 해당됩니다. 함께 전시될 ‘부드러운 대기 속에서 슬퍼했었네’(2017~2018) 연작도 현장 답사를 다니며 라디오 일기예보 시그널에 맞춰 올려다본 하늘의 움직임을 담고 있어요. 4차 산업혁명, 가상현실에 이목이 집중되어 있지만 그에 못지않게 우리 발이 어디를 딛고 있는지 잊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합니다.
곧 프리즈 서울이 열려요. 한국 작가에 대한 세계인의 관심이 높다고 하는데요. 한국 작가로서 체감한 적 있나요?
외국에 사는 지인들 이야기를 들어보면 관심이 많은 것 같아요. 휴가 날짜를 프리즈 서울 일정에 맞춰 한국에
온다는 이야기도 들었어요.
우리는 불확실한 세계를 살아가고 있어요. 불확실한 세계에서 작가님이 감각한 건 무엇인가요?
미로(迷路)와 미궁(迷宮)을 동시에 감각합니다. 미로가 길을 잃도록 설계된 길이라면 미궁은 질서 정연한 카오스. 작업 과정도 두 지점을 오갑니다. 어느 순간 해결점이 보이지 않다가 그림 안에서 나만의 질서가 보일 때, 작업을 마무리해요. 하지만 완성한 작품도 시간이 지나서 좀 더 그리거나 지우고 싶은 부분이 보일 때가 있어요. 더불어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Jorge Luis Borges)의 소설 <미로>를 추천합니다.
최근 발견한 아름다움은 무엇인가요?
날아가는 새의 그림자입니다.
마지막으로 다음 목표는요?
단기적으로는 내년 개인전을 준비 중인데, 이 과정에서 ‘지질학적 시간’과 ‘위상수학’에 대한 조사가 필요해서 진행 중이에요. 모두 전문적인 학문이라 어려움을 겪고 있지만 천천히 깊게 가보려고 합니다.
- 아레나 옴므 플러스, 2022년 9월호에 기고한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