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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Sep 24. 2022

경험만능주의는 왜 비극이 될 수 밖에 없는가

<17화-자기 자신을 너무 사랑할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

영화 [사랑할 땐 누구나 최악이 된다]에 대한 강한 스포일러가 담겨있습니다.



지난달 대전에 놀러 갔을 때 지인이 이 영화를 꼭 보고 싶다고 했다. 처음 제목을 접했을 때는 평범한 ‘청춘 일상 로맨스 영화'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상영이 끝나고 영화관을 걸어 나오는 나의 모습은, 들어갈 때의 모습과 완전히 달랐다. 머릿속에 폭탄이 하나 터진 듯한 느낌이었다.


주인공의 행동과 말투 그리고 사고관에서 내 모습이 너무나 많이 투영되었다. 우유부단, 사랑에 휘둘림, 꿈을 찾아 삼만리, 본인이 누군지 모름. 나와 똑같은 주인공의 모습과 그 결과를 보고 나니 자기 전에도 아침에 일어나서도 도무지 머릿속에서 영화가 떠나질 않았다. 한번 더 보고 싶었고, 봐야만 했다.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알고 싶었다. 도대체 왜 그녀가 그런 결과를 맞이할 수밖에 없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렇지 않으면 나도 그녀와 똑같은 결말을 맞이할 가능성이 농후했으니.


두 번 보고 내린 결론은 이것이다.


“자기 자신을 제대로 모르고 이것저것 찝쩍거리면서 인생을 살다가는 얼마나 꼬일 수 있는지 적나라하게 보여주는 영화. 내가 나를 잘 모르면 나도 힘든데 주변 사람도 졸라 힘들구나”

주인공 율리에는 자기 자신을 모른다. 가장 많이 사용한 단어가 ‘모른다' 아닐까? 무엇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어떤 사람을 좋아하는지도 모르고, 아기를 가지고 싶은지도 모르고, 막상 아기가 생기니 낳고 싶은지도 모르고, 결정적으로 자기 자신이 어떤 인간인지 모른다. 모든 인간이 백지의 상태로 태어나기에 무지가 나쁠 수 없다고 생각한다. 또한 본인이 어떤 사람인지 알기 위해서는 필연적으로 경험을 통해야만 한다. 경험해보지 않고 알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이상과 현실은 다르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이렇게 줄을 잘라보는 용기를 내어보는 길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나면, 나는 생각처럼 근사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혹은 의외로 아주 근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어쩌면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지독하게 운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을 실행해보지 않으면 그 믿음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철학과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험을 거치지 않은 신념은 ‘카드로 만든 집’ 일 수 있다. 근사해 보이지만 쉽게 허물어진다. 만약 공포에 눌려 신념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 삶은 악순환에 빠진다. 내 논리적 구조에는 문제가 없는데 나는 내가 누군지 영원히 알 길이 없다.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동조 지음]


그렇다면 율리에는 무엇을 놓쳤던 건가? 그녀만큼 필사적으로 다양한 경험을 추구하는 인간도 (거의) 없는데? 대답을 찾기 위해서는 그녀가 걸어온 길을 돌아볼 필요가 있다. 최상위권 의대생이라는 위치를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던져버린다. 과를 바꿔 심리학을 전공하지만 다시 그만두고 이제는 사진작가를 지망한다. 하다 보니 또 적성에 안 맞는지 끝에는 서점에서 일한다. 자신의 직업(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행위)을 끝없이 바꾸듯 자신과 가장 가까이 있는 사람(인생에서 가장 많은 시간을 할애하고 있는 사람)도 끝없이 바꾸었다. 의대생을 던지며 함께 하던 남자 친구와 헤어지고, 심리학을 배우며 교수와 잠시 사랑을 나누고, 사진작가를 하면서 만난 모델과 사랑에 빠져버린다. 그러다 파티에서 우연찮게 만난 만화작가를 사랑했다가, 일상의 연속성에 염증을 느끼던 찰나 또다시 파티에서 새로운 사람에 중독되었다.


문장으로만 봐도 심란한 과정 속에서 주변 사람들은 그녀에게 끊임없이 묻는다. “너는 무언가를 원하는 것 같은데, 너는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은데 도대체 그게 뭐야?” 그런데 율리아의 대답은 소름 끼칠 정도로 일관적이다. “나도 모르겠다!! 나도 나를 모르겠어!!!!” 그들의 심정은 답답해 미칠 것이다. 문제를 알아야 도와주든 말든지 할 수 있는데 문제 자체를 모른다. 사랑하는 사람이 출구가 없는 소용돌이에 휘말려 갈피를 못 잡는걸 그저 지켜봐야만 하는 건 얼마나 고통스러울까.


눈앞에 아주 맛있는 음식이 끝없이 펼쳐져 있다. 자기가 원하는 만큼 얼마든지 먹을 수 있다. 그렇다고 이걸 전부 다 먹으려고 욕심부리면 소화시키지 못하고 체해서 죽는다. 마찬가지로 자신의 그릇 크기는 고려하지 않은 채 경험을 쏟아부으면 흘러넘친다. 그렇게 발이 닿지 않는 깊은 경험의 바닷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다 숨 막혀 죽는다.


누군가는 ‘당신은 뭐길래 그렇게 잘 안다고 단정하나요?’라고 생각할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딱 율리에 같은 인간이었다. 스무 살이 되기 전 했던 경험들이다.  30여 개국이 넘는 나라를 혼자 다녔고, 키르기스스탄에 위치한  4000m 고산을 등반하고, 수십만 원짜리 식사를 수십 번 하고, 미슐랭 레스토랑에서 수습하고, 철인 3종을 혼자 준비해 완주했다. ‘기회라고 판단되면 망설이지 말고 잡아라. 떠난 기회는 다시 오지 않는다’가 삶의 신념이었다. 물론 이 경험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지만, 절벽 끝으로 몰아붙인 원인이기도 했다. 수많은 경험 속에서 허우적거리며 비대한 자아를 형성했고 에고라는 적은 ‘비합리적 신념’으로 삶을 임하게 했다. 스무 살의 소년이 소화시키기에는 너무 막대한 경험이었고, 너무 빨리 먹은 나머지 체해서 정신병원에 입원까지 했다.


대다수 인간은 경험을 통해서만 배울 수 있다. 경험은 ‘일단 해본다'는 단순한 의미가 아니라 자신의 행동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행동에 어떤 대가가 따라오는지 깨닫는 걸 말한다. 경험에서 깨달음은 ‘사전 준비- 실행 - 사후 반성'의 과정에서 온다. 여기서 중요한 건 실행이 아니라 사전 준비와 사후 반성이다. 교육은 이 과정을 가르치는 것이다. 여행을 많이 다녔는데도 경험이 피상적이고 깊이가 없다면 사전 준비와 사후 반성의 과정이 없기 때문이다. 트레이딩 역시 ‘사전 준비- 실행- 사후 해석’ 이 필요하다. 하나라도 빼놓은면 실력은 늘지 않고 결과를 운에 맡기게 된다.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 -김동조 지음]


경험을 해야만 한다. 하지만 첨예하게 소화시켜야 한다. 이 과정에는 필연적으로 깊은 사고와 긴 시간이 수반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계획을 하고 실행을 한 후 결과를 받아들이고 이를 사후 반성하면서 무엇을 배웠고 어떤 것이 남았는지 정리해야 한다. 이걸 토대로 강화해야 할 장점과 보완해야 할 단점을 파악해야만 더 나은 선택, 더 나은 계획, 더 나은 실행, 더 나은 결과, 더 나은 사후 반성을 할 수 있을 것이다. 함께 따라온 불순물을 침전시키고, 경험을 잘근잘근 씹어 제대로 소화시켜 삶의 자양분으로 만들어 나가야 한다. (불순물을 제거하고 소화시키는 행위로 글쓰기만큼 좋은 건 아직 못 찾은 것 같다) 하지만 율리에는 그저 ‘새로움’에 빠졌다. 그것이 사람이든 직업이든 신비롭고 매력적인, 아주 섹시한 무언가 옆에 나타나면 거절할 수 없는 달콤함에 빠져 버린 것이다.


경험을 많이 하게 되면 자기 자신이 대단한 인간이라도 된 듯 착각한다. 자신의 글을 읽고 칭찬하는 애인에게 율리에는 도리어 쏘아붙인다. “그래서 너는 책을 얼마나 읽어길래? 나는 너랑 달라. 너는 평생 커피만 나르다 죽겠지만 나는 더 큰 걸 원한다고!” 본인도 서점에서 남들 책이나 찾아주는데 뭐가 잘 났다고 상대의 가슴에 비수를 꽂는가? 주변 사람들이 도와주려고 해도, 너는 충분히 멋진 사람이라고 응원해줘도 그들의 의견을 묵살하고 오히려 그들을 깎아내린다. (실제로 율리에는 정말 멋진 사람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무엇을 하고 싶은지 찾고 실행하는 인간은 굉장히 드문 것 같다. 능력이 없으면 새로운 걸 시도하고 싶어도 못하지 않는가?)


선구적인 CEO 해럴드 제닌은 에고티즘을 알코올 중독에 비유하기를, “자기중심 주의자는 무엇에든 망설임이 없으며 무엇이든 뚝딱 해치워버립니다. 말을 더듬거나 침을 흘리지도 않죠. 점점 더 거만해지고, 어떤 사람은 자기의 그런 태도 아래에 무엇이 까려 있는지 알지 못한 채 자기의 거만함을 자신감이나 강력함의 표현이라고 착각합니다”라고 했다. 이 말처럼 자기중심 주의자들은 자기 자신에 대해서 착각하고 자기들이 앓고 있는 질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한다. 자기 손으로 스스로를 죽이고 있는 것이다.

[에고라는 적-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이 부분을 보면서 정말 많이 반성했다. 한 달 전 내가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똑같은 짓을 했기 때문이다. 수능을 준비하기 위해 가족의 도움이 필요했는데 유일하게 수능을 쳐본 동생이 나에게 몇 가지 조언을 해주었다. 현실이었지만 불편했고 듣기를 거부했다. 그리고 동생에게 비수를 꽂았다. “삼수생이 뭘 안다고 그러냐. 내가 너보다 경험을 많이 하면 훨씬 더 많이 했지.” 경험을 많이 하면 뭐하는가. 자기만 잘 난 줄 알고, 타인을 존중할 줄 모르는데. (이 글을 빌려 다시 한번 반성한다. 너무 미안하다)


결국 율리에는 혼자가 된다. 옆에는 남자 친구도, 아이도, 가족도 없고 그저 카메라 한대만 손에 남아있다. 그렇게 그녀의 열정은 꿈을 찾는 열정으로 시작되었지만 자기중심주의자의 공허함으로 끝난다.


영화 패왕별희를 보면 인간들은 끝없이 예술을 탄압한다. 예술을 말살하려고 하고 문화를 학살하려고 한다. 하지만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건 인간이 아니라 예술이다. 이후 "예술은 왜 살아남는가?”라는 질문을 품고 있었는데 이번 영화를 통해 대답할 수 있었다. 바로 ‘인간에 대한 이해’라고 생각한다. 내가 아니면 살아볼 수 없는 인생을 소설과 영화와 미술 그리고 음악을 통해 간접경험하는 것이다. 이를 거쳐 아주 미세하게나마 타인을 이해하게 되고, 스스로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된다. 안과 밖 즉 세상에 대한 통찰력을 키워주었기에 인간들은 끝없이 예술의 힘을 빌렸고, 그렇게 예술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믿는다.


영화의 평점은 그리 높지 않다. 영화를 보고 누군가 떠오르는 사람이 있다면 인생영화가 될 수 있겠지만 도대체 주인공의 사고방식과 행동이 이해가 안 된다면 아무런 감흥이 생기지 않을 것 같은 영화다. 특히 북유럽의 개인주의적 성향이 강하게 묻어나는 영화가 집단을 중시하는 전체주의적 사회인 대한민국에서 이해가 안 되는 건 어찌 보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


학교 잘 다니던 서울대 의대 수석이 어느 날 의대를 때려치우고 사진작가를 하겠다고 말하면 한국에서는 총장까지 내려와서 말리지 않을까?

영화를 안 보신 분 중에 이 글을 끝까지 읽으셨다면 한 번쯤 봐도 후회하지 않을 영화다. 노르웨이가서 그 언덕을 한번 걸어보고 싶다.


우리는 보다 나은 사업가나 운동선수, 혹은 인생의 승리자가 되고 싶어 한다. 우리는 보다 나은 방식으로 정보를 제공받고 싶고 재정적으로도 보다 여유롭고 싶다. 아울러 지금까지 몇 번이나 말했듯이 위대한 일을 하기를 원한다. 그런 마음을 가지는 것은 바람직하고 실제로 그래야 한다. 나 역시 내가 그렇게 하고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러나 다음 것들 역시 인상적인 성취이다. 보다 나은 사람이 되는 것, 보다 행복한 사람이 되는 것, 균형 감각을 가진 사람이 되는 것. 또한 만족하는 사람이 되고 겸손한 사람이 되는 것, 자기중심적이지 않은 사람이 되는 것. 혹은 나아가 이 모든 것을 동시에 이루면 더욱 좋은 일이다.

[에고라는 적-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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