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화 - 영화는 팝콘 먹으면서 보는 오락거리만이 아니다!>
매우 주관적인 경험이며 영화에 대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있습니다.
올해 들어 영화에 대한 시각이 완전히 바뀌었다. 이전에는 책과 비교할 수 없는, 그저 팝콘이나 먹으면서 시간 보내기 좋은 오락거리라고 여겼다. 하지만 이는 완벽한 오판이었다. 능동적으로 모든 감각을 집중하고, 생각하면서 영화를 보기 시작하니 지금껏 보지 못한 세계가 펼쳐졌다. 영화의 뼈대가 되는 시나리오부터 배우들의 연기, 촬영 방식, 음향 편집, 배경 연출 더 나아가 극장 산업까지 수많은 사람들의 열정과 시간과 재능이 모여야지만 완성되는 예술이었던 것이다. 책이 곧 진리이고, 책이 곧 최고의 매체라고 여겼던 과거의 모습이 부끄러웠다. 책이 전해줄 수 있는 지적 쾌락을 열심히 느끼고 영화가 전해주는 미적 쾌감을 열심히 즐기면 됐는데 왜 하나만 콕 집어서 우위라고 생각했던 것일까.
영화에 대한 인식의 변화와 더불어 4개월 넘게 최소 한 주에 하나의 영화를 보던 7월의 어느 여름날, 헤어질 결심을 알게 되었다. 신문을 읽다 칸 영화제에서 [브로커]의 송강호 배우가 남우주연상을, [헤어질 결심]의 박찬욱 감독이 감독상을 수상했다는 내용을 접했다. ‘오.. 칸 영화제.. 거기서 수상한 영화는 무엇이 다를까?’라는 작은 호기심을 품고 먼저 개봉한 브로커를 보러 갔다. 이때 헤어질 결심 포스터가 영화관을 가득 채우고 있었지만 첫인상은 ‘응? 왠 모나리자?’라는 생각뿐이었다. (이때만 해도 탕웨이 배우의 매력을 알아차리기 전이니..) 개봉하면 봐야지, 개봉 첫날 바로 보러 간다는 기대감 혹은 설렘은 전혀 없었다.
곡성에도 극장이 있지만 탑건만 상영하고 헤어질 결심은 단 한 번도 상영을 안 해주었다. (아니! 이게 말이 되나?!) 일 마치고 친구와 함께 차를 타고 광주까지 가서 헤어질 결심을 처음 보게 되었다.
[첫 번째 관람/22.07.14/ 광주 상무 CGV]
예술을 가까이하면 조금 더 풍성한 삶을 살 수 있을 것이다. 예술에서만 느낄 수 있고, 경험할 수 있는 감각들이 존재한다고 믿는다. 이 영화야 말로 예술이라는 수식어가 완벽하게 맞아떨어지는 작품이었다. 몇 가지 단어들이 떠오른다. 마침내, 파멸, 죽음, 사랑, 붕괴, 죽음. 위대한 영화들을 볼 때면 떠오른 질문이 있다. ‘도대체 저 사람들은 무엇을 먹고, 무슨 생각을 하고, 어떤 대화로 삶을 채우기에 이런 걸 만들어 낼 수 있을까? 우리에게 없는 무엇이 그들에게 있어, 이것들을 가능하게 하는가?’. 굉장히 궁금한 삶의 스킬이다.
멜로가 결국 인간의 감정을 건드리는 것이라면 이 영화는 멜로의 대명사라 할 수 있지 않을까? 형사와 피의자. 한국인과 중국인, 남자와 여자, 남편과 아내 이 모든 것들이 뒤섞여 사랑이란 한 점의 수채화를 그렸지만, 고유의 색을 잃지 않고 뚜렷하게 묻은 각각의 붓질처럼 섞이되 섞이지 않고 우리의 상상 그 이상을 보여줬다.
2시간 18분이 이렇게 빨리 끝났다는 것에 흠칫했다. 처음 영화를 보고 나왔을 때 그 여운과 도저히 헤어질 수가 없었다. 마치 죽음과 형사라는 느와르적 스릴에 사랑과 파멸이라는 인생의 긴장감이 더해지니 몰입감에 압도당했던 것이다. 다시금 그 몰입감 속에 들어가고 싶었고 완성도 높은 예술 작품을 경험할 때만 얻을 수 있는 쾌락을 느끼고 싶다. 일주일 뒤 휴무날 아침, 바로 영화관으로 달려갔다. 두 번째에는 이야기의 전개보다 이야기를 구성하고 있는 요소 (배우, 배경, 음악, 대사)들에 초점을 맞추어서 보려 했다.
[두 번째 관람/22.07.19/ 광주터미널 CGV]
첫 관람에서는 영화가 압도했지만 두 번째에서는 두 눈 똑똑히 뜨고 낱낱이 파헤치려고 했다. 이전에는 보지 못했는데, 해준은 ‘한 인간이 누군가와 깊은 사랑에 빠졌지만 도무지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지 모를 때' 나오는 시선과 말투 그리고 행동을 하고 있었다. 서래를 바라보는 눈빛, 서래와 대화하면서 사용하는 단어, 서래와 교감할 때 사용하는 어투. 천문학자 칼 셰이건이 말했듯 정녕 우리같이 연약한 존재가 이 삶의 광대함을 견디는 방법은 오직 사랑뿐일까.
이것이 예술작품이 아니라면 무엇을 예술작품이라 할 수 있을까? 시각, 청각, 경험, 상상력을 이루는 모든 요소들을 하나하나 아주 섬세하게 관찰하고 나눈 후, 다시 이것들을 가지고 매우 고혹적으로 빚어낸 조각품 같다. 로맨스 영화의 대명사인 [비포 선라이즈]의 제시와 셀린의 사랑이 싱그럽고도 풋풋한, 아주 상큼한 레모네이드 같은 느낌이라면 [헤어질 결심]의 해준과 서래는 잘 익은 곡물을 뒤섞여 제대로 숙성시킨 위스키에서 나올만한, 그런 삶의 체취가 뿜어져 나온다. 덜 영근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사랑과 자신의 삶을 억척같이 살아내고 있는 인간들이 만들어내는 사랑에는 필연적으로 차이가 있지 않을까?
전체적인 흐름을 알고 보니 ‘이해'에서 벗어나 ‘관찰'이 되었다. 이전에 보지 못한 해준의 눈빛과 서래의 웃음이 다가왔다. 두 번이나 봤는데도 너무 재밌었다. 한정된 시간 안에 수많은 정보를 담아낼 수밖에 없는 영화의 특성상, 한 번에 모든 걸 파악하고 경험하기란 쉽지 않았다. 그렇기에 다시 봐도 재밌다는 건 엄청나게 함축된 영화가 아닐까.
영화의 골수까지 빼먹겠다는 심정으로 3번째 관람을 했다. 하지만 늦은 저녁에, 너무 힘을 주고 영화를 보니 중간에 피로도가 올라왔다. ‘3번째 보는 거니 이 영화의 모든 것을 빼먹겠어!’라는 황당한 의지가 자아낸 실망이었다. 영화는 잘못이 없었다. 영화를 대하는 나의 태도가 달라졌다. 스스로에게 크게 데고 나서 ‘이제는 더 볼 일이 있을까?’ 싶었는데 마지막 선물이 남아있었다. 바로 각본집. 태어나서 각본집이라는 걸 사본적도 없고, 살려고 생각조차 해본 적 없다. 하지만 이 영화만큼은 구석구석, 남김없이, 모든 향과 맛을 음미해보고 싶었다. 각본집을 예약 주문해서 읽어보니 완전히 다른 세상이 열렸다. 영화 속에서 배우들의 말과 행동으로 구성된 장면을 활자로 정연하게 설명해주고, 특히 편집된 부분까지 모두 나와있었기에 파편적이고 평면적인 이해가 총체적이고 입체적인 이해로 다가왔다. 마치 이전에는 아이폰 미니에서 240P로 영화를 봤는데 각본집을 읽으니 영화 시설이 잘 갖추어진 아이맥스에서 영화를 보는 느낌이랄까.
[네 번째 관람/22.08.04/ 대구 CGV]
‘왜 헤어질 결심을 4번이나 봤을까?’를 스스로에게 질문해보았다. 성향이 그대로 녹아난 사례라고 생각한다. 한 가지에 꽂히면 끝을 보고 싶어 한다. 요리로 치면 한 가지 재료에 빠져들면 생으로도 먹어보고, 튀기고, 굽고, 삶고, 데치고, 말려서도 먹어보면서 재료가 가진 모든 것을 경험해보고 싶어 하는, 골수까지 빼먹으려는 인간이 아닐까 싶다.
영화에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장면은 해준의 경우 마지막 바닷가 장면, 서래의 경우 해준에게 중국어를 시키는 장면이다. 해준은 바닷가에서 서래를 찾기 위해 이리저리 뛰어다닌다. 자신이 도대체 언제 서래에게 “사랑해요"라고 했는지 모른다. 그 답을 찾기 위해 음성파일을 다시 듣는다. 자신의 목소리를 들은 그의 표정은 마치 삶의 번뇌를 깨달은 사람이었다. ‘이거였어?’라는 허탈함에서 나오는 웃음과 서래를 사랑했다는 사실을 마침내 ‘스스로’ 인지했는데 더 이상 송서래를 만나지 못할 때 나오는 슬픔이 범벅될 때 나오는 표정이었다.
서래가 해준의 방에 붙은 사건 사진을 떼어내던 중 해준이 못 떼어내게 막으면서 넌지시 “그래도 예뻤어요”라고 말하니 갑자기 서래의 표정이 변한다. 얼굴에 미소를 띠며 (그 미소는 웃음보다 ‘호오.. 이 사람이 나를 이만큼이나 좋아한다는 거지?’라는 걸 느꼈을 때의 미소) 중국어로 “중국어로 해봐요. 방금 한 말"을 해준에게 던진다. 해준은 인정해서는 안되지만 인정할 수밖에 없어 조심스럽게 던진다. 이를 보면 어떻게 서래가 팜므파탈이 아닐 수 있을까.
해준이 왜 그렇게 고통스러워했는가 돌이켜보면 자신의 삶을 자신의 손으로 붕괴시켰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살아가는 이유이자 삶의 정체성이었던 직업에 대한 자부심을 목숨에 대한 협박도 아니고 그저 사랑이라는, 그것도 피의자에 대한 사랑이라는 감정에 무너졌다는 사실에 괴로워 못 견딘 것 아닐까? 해준은 붕괴되었고 서래는 영원히 떠났음에도 서래는 해준의 마음속에서 영원히 미결 사건이 되어, 해결하기 전까지는 절대 떼어낼 수 없는 사진처럼 그를 장악하지 않을까?
이 글을 쓰기 위해 지난 관람기들을 정리하면서 4번이나 본 이유에 대해 스스로 곱씹어봤다. 내가 내린 결론은 “영화를 너무 잘 만들었고, 질문하고 생각하고 파고드는 걸 좋아하는 관객들에게 아주 적합한 영화였고, 결정적으로 이 영화가 담고 있는 이야기 즉 사랑에 큰 관심이 있는 시점이었기에"였다. N차 관람하는 이유 중 하나가 박찬욱 감독의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이라면, 표면적인 관람보다 그 영화의 바닷속 깊은 곳에 빠져 자신만의 보물 세계를 발견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작년에 크루엘라도 5번 본 적이 있는데 그때는 ‘세상을 향해 엿 먹어라!’고 외치고 자신의 재능을 꽃피워 가는 것이 관심분야였다면 올해는 이 사랑이라는, 한 사람을 천국까지 올려주었다가 죽음까지 파멸시킬 수 있는 이 애틋한 감정이 관심분야(?)여서 이 영화를 더 좋아하게 된 것 같다.
영화 촬영지인 송광사와 삼척 부남 해변에도 갔다 왔다. 가는 장소마다 ‘한국에 이렇게 아름다운 곳이 있구나' 싶었다. 송광사에서 해준이 서래를 진심으로 사랑했다는 걸 확신했다. 사랑하지 않았더라면 이 아름다운 것을 보여줄 일 없고, 사랑했더라면 어떻게 이 아름다운 것을 보여주지 않고 배겼을까.
나 홀로 걸어가는 안개만이.
자욱한 이 거리.
안개 속에 눈을 떠라.
눈물을 감추어라.
최근 [헤어질 결심]을 집에서도 구매해서 볼 수 있다고 하는데 아직 안 보신 분이 계시면 한 번쯤 봐도 좋은 영화라고 추천드리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