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화-이대로 살다가 죽어도 후회가 없는가?>
2022년 7월 29일 금요일 저녁 6:30, 섬진강 자전거 길을 따라 자전거를 타던 중 사고가 났습니다. 헬멧은 부서졌고 옷은 찢어지고 피부는 갈려서 온 몸에 피가 흘렀습니다. 글로써 죽음을 접하는 게 아니라 몸으로 대면했을 때 삶이 어떻게 변했는지 기록해보고자 합니다.
6월 초 왼쪽 발목에 급작스러운 통증이 왔다. 회사도 2주 쉴 정도로 심한 통증이어서 두 달간 달리지도 못하고 자전거도 못 탔다. 통증이 조금 줄어 다시 출근했지만 급작스레 아플까 한 달간 수영만 했다. 2달 정도 격한 운동을 하지 않으니 통증은 거의 없어졌고 무리하지 않는 선에서 다시 달리기와 자전거를 타려고 했다. 오랜만에 자전거를 탈 생각에 참 설레었다. 자전거를 탈 때만 느낄 수 있는 감각이 있다. 허벅지의 근육들이 움직이며 페달을 힘차게 밟아나갈 때 달라지는 풍경과 속도에 따라 온몸을 감싸는 바람의 느낌을 참 좋아한다.
특별한 게 없는 날이었다. 비 오는 날도 아니었고 며칠 동안 해도 쨍쨍해 물 웅덩이도 없었다. 여느 날처럼 왕복 30km, 1시간을 설정하고 자전거에 올라탔다. 온몸에 뻗어있는 혈관에 열심히 피를 공급하는 심장의 요동침을 느끼며 15km 반환점을 돌았다. 날씨가 조금씩 어둑어둑해지기 시작했지만 시야에 문제는 없었다. 다만 10분이라도 늦으면 아슬아슬한 시점이었다. 잡념을 없애기 위해 끝가지 스스로를 몰아붙이면서 오로지 폐와 심장과 허벅지에 집중하던 중 순간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다는 판단이 들었다. ‘나 지금 공중에 떠 있는 건가? 나 이제 땅에 박는 건가? 어?..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인데?’ 어딘가에 걸려서 자전거가 공중에 떠버렸고 덩달아 몸도 1.4초 정도 하늘에 떠 있었다.
모든 일은 ‘어.. 어? 어!’를 떠올릴 3초 사이에 끝났다. 공중에 자전거와 함께 뜬 몸은 그대로 땅에 박았고 왼쪽 머리부터 왼쪽 어깨, 왼쪽 팔, 왼쪽 배, 왼쪽 다리는 시멘트 바닥에 찍히고 갈렸다. 처음에는 충격이 커서 정상적인 사고를 못했다.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나 지금 자전거 타다가 넘어진 건가?’ 쇼크 상태여서 아무런 고통이 안 느껴졌다. 약간의 어지러움만 느껴져서 이 상태로 자전거 타고 집에 갈까도 고민했다. 구급차를 부르면 비용이 상당할 것 같아 자전거 안장에 올라타려고 하니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 헬맷은 깨졌고 아주 약하고 보드라운 피부가 거칠고 날카로운 바닥과 자갈에 갈려나가면서 온 몸에 피가 철철 흐르고 있었다. 상황이 인지된 그 순간, 충격에 감추어져 있던 고통이 뇌에 도달했다.
바로 119에 신고하고 옆에 있는 정자에 앉아 10여분을 목이 터져라 울부짖었다. 지금껏 그렇게 크고 고통스럽게 울부짖은 적은 처음이었다. 살이 바닥에 갈려서 타들어가는 고통은 상상을 초월했다.
몇 분 후 구조요원분들이 오셨다. 찢어진 옷을 벗기고 피와 자갈이 뒤섞인 온몸에 식염수를 뿌렸다. 가벼운 응급조치로 잠시 피가 새어 나오지 않게 하고 곡성의 유일한 응급실로 갔다. 도착하자마자 제대로 된 소독을 통해 눈에 보이는 돌과 이물질을 모조리 빼내고 진물을 흡수할 수 있는 메디폼을 붙이고 붕대를 칭칭 감았다. 2차 감염 우려로 파상풍 주사를 맞았고 타는듯한 고통에 진통제를 맞았다. 대화를 무리 없이 하고, 육안으로 뼈에 이상이 없어 보이고, 금요일 저녁이라서 다음날 남원의 큰 병원에 가서 검사를 받아 보라고 했다. 혹시나 중간에 갑자기 통증이 몰아치거나 너무 어지러우면, 바로 119를 불러서 응급실로 가야 한다는 말과 함께 40분에 걸친 응급처치는 끝났다. 걸을 수 없었기에 택시를 타고 집으로 돌아왔다.
오랜만에 자전거 타고 뜨거운 물로 씻은 후 상쾌한 기분으로 저녁을 먹으려던 계획은 완전히 산산조각 났다. 온몸에 붕대를 감아 잘 움직이지도 못하고 피부가 벗겨지고 진물이 나는 상황 속에서도 배가 너무 고팠다. 무언가 해먹을 수도 없고 시켜먹어야만 하는데 대한치킨민국 만세. 이 시골 동네도 치킨 배달이 된다. 후라이드 반, 양념 반을 시키니 20분 만에 도착했고 허기가 사라질 정도만 먹고 잤다. 급작스러운 통증은 없었다. 하지만 자는 동안 온몸에서 진물이 흘러 메디폼이 흡수할 양을 넘어서버려 이불까지 적셔버렸다.
다음날 아침 아버지가 대구에서 곡성으로 오셔서 함께 병원에 갔다. 공중에 떴다가 전신을 땅에 박았기에 머리 CT부터 어깨, 가슴, 복부, 다리, 발목까지 거의 전신 X-ray를 촬영했다. 검사 결과 다행히 뇌에 출혈이 없고 뼈에도 금이나 부서진 곳이 없다고 했다. 자전거를 탈 때 평균 30~33km/h가 나온다. 내리막이 있어서 사고가 나기 직전 속도는 체감상 35km/h정도였다. 그 속도 그대로 순간적으로 공중에 떠서 땅에 박았는데 화상과 찰과상이 뿐이라니. 정말, 너무나, 소름 끼치도록 운이 좋았다. 자칫 조금만 잘못되어도 큰 사고로 이어질 뻔했다. 핼맷이 부서질 정도로 충격이 컸기에 조금만 각도가 틀어졌더라면 목이나 척추가 손상되어 사지가 마비될 수도, 자전거가 공중에서 배나 가슴 위에 떨어졌으면 뼈가 부서졌을 수도, 특히 클릿슈즈 (자전거와 다리를 고정시켜주는 특수신발)를 신고 있었는데 벗겨지지 않았더라면 발목은 물론 하반신이 뒤틀려 오랜 기간 병원신세를 질뻔했다. (지금 적는 순간 다시 생각해도 끔찍하고 아찔하다) 돌아보면 당시의 느낌이 딱 이거였다.
신이 나에게 “넌 아직 할 일이 더 남아있으니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고 외치는 것 같았다.
운명을 믿지 않는다. 모든 일은 우연이고 그 일을 어떻게 자신이 해석하는지, 즉 주관적 관점이 대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운명이 있다면 태어나고 죽는 것에 존재한다고 믿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고의 시점이 너무 이상했다. 7월이 시작되자마자 이모할머니가 60세라는 굉장히 이른 나이에 1년 반의 암투병 중 돌아가셨고 7월 중순에는 함께 살던 고등학교 친구가 20대 초반의 나이에 통풍과 디스크 판정을 받아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옆에서 지켜봤다. 그렇게 삶과 죽음에 대해 고민하고 또 실제로 나를 둘러싸고 있던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찰나, 이제는 내가 직접 겪게 된 것이다. 마치 나를 시험하듯 “네가 글과 말로써는 죽음에 대해서,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다고 했는데 실제로 그런 것인가?”.
죽음을 마주하면 필연적으로 이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이대로 살다가 죽어도 후회가 없는가?” 긍정적 대답을 내릴 수 있으면 지금처럼 살아가면 될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사는 모습을 바꾸던지, 운명에 순종하면서 살아야 한다. 나의 대답은 “후회 없다"였다. 지금까지 매 순간 최선의 선택을 내려왔고 할 수 있는 건 다했다. 지금 죽으면 아쉽기는 하겠지만 ‘아.. 내 운명이 이곳까지 구나, 뭐 어쩌겠냐’하고 받아들일 것 같다. 하지만 정말 두려운 건 따로 있었다. 죽음은 두렵지 않은데 죽기 전까지의 삶이 의미가 없을까 너무 두려웠다. 그저 접시나 닦으면서, 내가 하고 싶지 않은 일을 하면서, 내 몸에 맞지 않는 옷을 꾸역꾸역 입으면서 이렇게 삶을 살기에는 너무 안타까웠다.
치료를 위해 본가인 대구에서 지냈다. 아침을 먹던 중 아버지가 이야기하셨다. “자존감이 너무 떨어져 보인다. 스스로를 좀 믿어보면 좋겠다”. 내면에서 계속 두렵다고 말하는 것 같다. 또 무언가 시도를 하다가 저 고통의 구덩이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것 아니냐고. 그래서 계속 생각만 하고,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서 이것저것 아주 조심스럽게 찌르면서 살아왔던 것이다.
사고난지 1주일 뒤 곡성에 잠시 왔다. 7월 중순부터 내가 정말로 좋아하는 사람들이 곡성에 놀러 오기로 했는데 미루고 싶지 않았다. 혼돈의 중심에 있던 나를 그들과의 시간을 통해 끄집어내고 싶었다. 붕대는 감았지만 조심스레 움직일 수는 있어서 조금 무리해서라도 갔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며 생각의 세계를 늘렸다가 줄였다가 이리저리 편집해나갔다. 그러던 중 학문적 분야에서 정점의 삶을 살아온 분(한국과학영재학교-카이스트-삼성/이것이 전부는 아니지만 어떠한 것에 최선을 다했고 그 결과물을 만들어냈다는 것이 멋지게 다가온다)과의 대화가 가슴속에 살포시 앉았다.
나는 물었다. “지금 이렇게 제가 하는 공부의 방식, 즉 신문 읽고 궁금한 거 있으면 책 읽고 영화 보면서 공부하는 것이 실제 학교에서도 의미가 있을까요? 주변에서 ‘네가 하고 싶어서 하는 공부니깐 재미있지 시험 치고 학교에서 공부하는 게 잘 맞는지 어떻게 그런 걸로 판단하냐고’하더라고요”
그분은 대답했다.”개인적인 호기심으로 출발해 스스로 다양한 분야를 종횡무진하며 대답을 찾아나가는 방법을 알고, 할 수 있다는 것은 고등교육을 받을 때 분명히 도움이 될 것입니다. 카이스트에서도 비슷하게 진행됩니다. 그 과목을 대표하는 책 한 권을 선정하죠. 하지만 절대 책 한 권으로 그 분야를 공부할 수 없죠. 10여 개의 원서들을 함께 읽고 공부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리고 이건 교수가 시키거나 누군가 해줄 수 있는 것이 아니니 전적으로 개인에 달린 것이죠.”
“특히나 젊은 시절 외국에서 학업을 진행해볼 수 있다면 그 경험은 인생에 실로 중요한 경험이 될 것입니다. 사업을 하거나 완전히 정착하는 것에 비해 적은 돈을 들이면서도 새로운 문화를 경험하고, 또 스스로에게도 어떤 환경에서 살고 싶은지 물어볼 수 있으니깐요. 게다가 그곳이 자신이 평소에 너무나 좋아하고 살아보고 싶었던 곳이라면 각별한 의미가 있지 않을까요?.”
누군가의 말을 계속 빌리는 건 힘이 없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스스로 만족하고 내면을 믿으면 좋지만 객관적인 방법으로 평가해보지 못하니깐 답답해하는 것 같다. 그렇게 스스로를 믿지 못하던 시점 내가 좋아하고 멋지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습니다. 당신이 틀린 게 아닙니다'라는 따뜻한 응원을 받는 게 얼마나 큰 힘이 되었는지 모른다.
상처를 치료하는 3주 동안 씻지 못하고, 씻지를 못하니 이 더운 여름에 갈 곳이 없었다. 시원한 에어컨 바람이 나오는 카페에서 하루 종일 책 읽거나 영화관에서 영화만 봤다. 그 과정에서 스스로와 깊숙이 대화를 나누게 되었고 결국은 이제 새로운 시도와 행동을 할 순간이라는 판단이 들었다.
소설가 무라카미 류가 잘생긴 20대 초반의 F1 레이서에게 “당신도 평범한 남자들처럼 술 마시고 데이트하고, 영화 보고, 파티에 가고 싶지 않습니까?”라고 물었다.
"저도 이성하고 놀고 싶고 그것이 얼마나 즐거운지 압니다. 좋아하는 여자와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건 정말 신나는 일입니다. 다만 그 좋은 기분이 얼마나 길게 이어졌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잠시 계속되겠지만 며칠, 몇 개월, 몇 년이나 이어지지는 않을 겁니다. 그러나 레이스에서 멋진 기록을 내면 정말 하늘을 날 것 같습니다. 그럴 때면, 만약 그랑프리에서 우승하면 어떤 기분일까, 얼마나 기분이 좋을까, 상상해봅니다. 데이트를 하고 인생을 즐기는 것도 좋지만 그런 일보다는 달성하기만 하면 기쁨과 좋은 기분이 평생 이어질 것 같은 뭔가를 해내고 싶습니다. 저는 그걸 F1으로 얻을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여자와 놀고 데이트할 시간이 없는 것을 전혀 고통으로 여기지 않아요."
세상에는 ‘평생 이어질 좋은 기분’ 같은 것에는 관심이 없는 사람도 많다. 하지만 누군가는 ‘평생 이어질 좋은 기분’을 기대하며 자신을 절제하고 강인한 몸을 만든다. 떨리는 마음을 진정시키며 운전대를 움켜잡고 경기장에 진입한다. 누군가는 지루하게 자료를 뒤지고 등장인물에 자신을 이입하며 집에 틀어박혀 소설을 쓴다. 그렇게 책이 만들어지고 챔피언이 탄생한다. 그리고 평생 이어질 ‘좋은 기분’도 남는다.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 - 김동호 지음>
최근 읽은 책과 영화가 나를 이끌어주었다. 탑건의 매버릭도 동료의 죽음에서 무너지지 않고 과거의 실패에서 배운 경험을 토대로 다시 콕핏에 앉았다. 그렇기에 그는 TOP GUN이라는 해군 최고의 엘리트 파일럿이 될 수 있었다. F1 선수들도 경기 중 사고로 50G나 되는 속도로 벽에 처박고 매 순간 생사의 갈림길에 서있다. 그러나 그 고통과 두려움을 품어내고 다시 운전석에 앉기에 ‘평생 이어질 좋은 기분'을 얻을 수 있었다.
과거의 선택을 복기하고 사후 반성하는 이유는 더 나은 선택과 행동으로 보다 만족스러운 결과물을 얻기 위해서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고통이 두려워 선택과 실행을 하지 않으면 죽은 사람과 무엇이 다르고, 실패가 두려워 움직이지 않으면 계획과 사후 반성은 철저하게 쓸모없다는 것을 돌아보게 되었다. 결국은 과거의 아픔과 슬픔을 충분히 추모했고, 무엇을 놓쳤는지 알았더라면 이제는 다시 새로운 게임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대학에 진학하고자 결심했다. 이후 독일 의대에 유학을 가려한다. 드넓은 세상에서 더 많은 것을 배우고 경험하고 소화시켜내고 싶다. 삶과 죽음의 최전선에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삶을 의미 있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지' 질문하고 대답해보고 싶다. 그토록 하고 싶었던 ‘공부'를 하고 이 시간을 토대로 먹고 싶은 거 있을 때 먹고, 여행 가고 싶을 때 갈 수 있고, 하고 싶은 거 있을 때 무리 없이 할 수 있는 그런 능력을 갖추고 싶다. 사람들이 “왜 굳이 의대인가?”라고 물었을 때 완벽하고 치밀한 논리로 대답하지는 못하겠다. 이번에 요리를 그만두고 배운 것이 있다. 스스로 어느 정도 논리적 설득이 되었다면 결국 의미와 이유는 직접 변수들에 대응하고 배우고 성장하는 과정에서 찾아나가는 것이 아닌가 싶다. 요리를 시작할 때만큼 완벽한 논리가 없었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현실은 달랐다. 내 믿음을 실행해보기 전에는 이것이 옳은지 잘못된 것인지 알 길이 없었다.
이제는 스스로 시험해볼 시간인 것 같다. 허공에서 체스를 그만두고 싶다. 세상을 상대로 게임을 해보고 싶다.
내가 어떤 인간인지 깨닫기 위해서는 이렇게 줄을 잘라보는 용기를 내어보는 길밖에 없다. 그런 과정을 겪고 나면, 나는 생각처럼 근사한 사람이 아닐 수도 있다. 혹은 의외로 아주 근사한 사람일 수도 있다. 어쩌면 억세게 운이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지독하게 운이 나쁜 사람일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내 믿음을 실행해보지 않으면 그 믿음이 옳은 것인지 잘못된 것인지 알 길이 없다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만의 철학과 믿음을 갖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시험을 거치지 않은 신념은 ‘카드로 만든 집’ 일 수 있다. 근사해 보이지만 쉽게 허물어진다. 만약 공포에 눌려 신념을 발휘하지 못하는 일이 잦아지면 삶은 악순환에 빠진다. 내 논리적 구조에는 문제가 없는데 나는 내가 누군지 영원히 알 길이 없다.(...)
실패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자신의 생각대로 실현하는 데 성공한다면 그 이상 행복한 일은 없다. 내가 옳다는 것을 입증하고 내 믿음에 바탕을 둔 결과까지 추수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실패한다고 해도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는 낫다. 아무것도 하지 않으면 아무것도 알 수 없지만, 실패한다면 그 실패를 갖고 이론과 아이디어를 개선해볼 수 있기 때문이다. 사업적 성공을 통한 발상의 실현이나 그림을 통한 미학적 성취 또한 투자의 세계와 다를 바 없을 것이다. 중요한 것은, 자신의 생각과 신념을 만드는 데 노력한 만큼 그것들을 실현하고 검증하는 데 과감해지는 것이다. 텅 빈 암흑의 우주 공간에 버려지더라도, 밧줄을 잘라야 할 때는 잘라야 한다.
<나는 나를 어떻게 할 것인가 -김동조 지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