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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케빈 Dec 31. 2022

스스로에게 얼마나 큰 선물을 하고 있는지 깨달을 거예요

<22화-곡성포레스트를 마치며>

2022년 1월. 도망치듯 떠난 독일에서 3개월이 흘러 다시 한국에 돌아왔다. 귀국 후 나를 반기는 건 코로나와 또 다른 실패였다. 당연히 합격할 것이라고 믿었던 건명원에 탈락했다. 기대치가 컸던 만큼 후폭풍은 더 거대했다. 겨우 진정시켜놓았던 호수가 막무가내로 요동치기 시작했고 그 일렁이는 표면에 주변에서도 돌을 마구 던졌다. ‘아니 나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겠는데 뭘 어쩌란 말인가?’


설을 지내고 바다를 보러 포항에 갔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어머니가 “지난겨울에 아빠랑 함께 곡성에 갔는데 식당이랑 벼농사랑 책방을 같이 운영하는 곳이 있더라 한번 가볼래?” 물어봤다. 23간 쌓인 잡다한 데이터가  신호를 받아들일 , 순간 '이건 기회다'라고 인식했다. 굉장히 단순한 사고과정을 거쳐 곡성에 가보기로 결심했다. 아니 단순할 수밖에 없었다. 망망대해에서 표류하고 있었는데 눈앞에 작은 섬이 보이는 것이다. 탈진해 물에 빠져 죽을  같은데 ‘..  섬은 어떤 섬이지? 저기에는 무엇이 있을까? 내가 가도 괜찮을까?’라고 고민하는 사람이 어디 있는가. 일단 섬에 가서 숨부터 쉬고 살고 봐야 했다.


어머니랑 함께 곡성에 갔다. 식당에서 점심을 먹고 대표님이랑 이야기하면서 정말 큰 힘을 얻었다. “혹시 일해볼 생각이 있으면 함께 해봐도 좋겠다”라는 말에 이력서를 제출하고 면접보고 3월부터 일하기로 했다. 일할곳은 정해졌는데 지낼 곳이 마땅치 않았다. 부동산 앱은 무용지물인 데다가 6군데의 원룸 주인들에게도 연락해봤는데 공실이 없다고 한다. 그러다 군청에서 청년대상으로 운영하는 셰어하우스가 있다는 소식을 듣고 관련 부서에 연락하게 되었다. 마침 지금 자리가 남았고 공고를 올려줄 테니 지원하라고 했다. 혹시나 다른 사람들이 지원하면 어떻게 하지 마음이 조마조마했는데 혼자 지원해서 혼자 확정되었다. 3명이 산다고 명시되어 있었지만 집 구조상 2명까지 살 수 있는 집이었다. 처음에는 다른 한 명이랑 함께 살았는데 1달 뒤 그분은 곡성을 떠났고 남은 시간 혼자 살게 되었다.


자본주의는 심리 게임이거든? 있는 사람은 극복할 수 있지만, 없는 사람은 못하는 감정이 있어. '상실감'. 잃을 수 있어야지만 더 큰돈을 만질 수 있어. 더 많이 리스크를 걸 수 있는 사람이 이기는 거니까. 난 말이야, 모든 걸 잃어도 이런 집만 있으면 처음부터 다시 시작할 수 있어.

[ 드라마 '작은 아씨들' 중]


9개월간의 곡성 생활을 끝 마쳤다. 돌아보니 좋은 집의 영향이 엄청났다는  새삼 느끼고 있다. 도심에서는 상상할  조차 없는 크기의 넓은 마당과  티비까지. 마당에서는 수많은 작당거리를 했고 거실에서는 끊임없이 과거에 대해 반성하고, 삶에 대해 고민하고, 미래에 대해 고찰했다.


이런 집만 있으면

아주 고운 면포로 덩어리를 걸러내는 것처럼, 어떤 경험을  문장으로 나타낸다는 것은 거르고 걸러야지만 나오는 정수라고 생각하기에 종종 사람들에게 묻는다. “당신이 가진  경험을  문장으로 표현한다면 어떻게 하시겠어요?”.  곡성에서의 삶에 대해  질문을 던졌고 이런 대답이 나왔다. 인생의 희로애락이 담긴”. 살면서 느껴보지 못한 수많은 감정들을 느낀 시공간이었다. 곡성에 가게  계기부터 입사하고, 내외적으로 갈등을 겪고, 퇴사를 결심하고, 이모할머니가 돌아가시고, 친한 친구가  병을 앓고, 자전거 사고가 식물인간이  뻔하고, 멀리서 친구들이 찾아와 주고, 다시 새로운 시작을 준비하고, 수많은 친구들이 하늘의 별이 되고, 대입이라는 새로운 꿈을 품고 떠난 공간.


설렘, 기쁨, 좌절, 방황, 슬픔, 분노, 희망, 허망, 새로움, 사랑, 동료, 새싹으로 표현될 곳이다. 4개의 문장에 곡성에서의 사계절을 오롯이 담아낼 수 있었다.   


원하는 결과를 도출시켜낸 시간

깎고  깎은 시간

삶의 일부, 20대에 자연과 더불어 지낸 경험

첨예한 고독




[원하는 결과를 도출시켜낸 시간]


지푸라기를 잡는 심정으로 곡성에 갔다. 내가 무엇을 해야 하는지, 무엇을 하고 싶은지, 무엇을 좋아하는지, 무엇을 잘하는지 궁극적으로 어떤 사람이고 어떻게 살고 싶은지 몰랐다. 스스로를 알아야만 했다. 또한 다시 기회를 주면서 정말 요식업이 맞지 않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었다.


이 시간과 과정에서 ‘아 나는 요식업과 결이 다른 사람이구나’를 깨달았다. 내가 지니고 있는 성질과 주방에서 요구되는 성향에서 큰 괴리감이 존재했다. 혼자, 조용히, 천천히, 글 쓰는 걸 좋아하는 인간이지만 요식업은 함께, 시끄럽게, 빠르게, 서비스를 제공해야 한다. '이전에는 왜 몰랐는가?' 곱씹어 보니 요식업과 내면에 대한 이해도가 모두 부족했다. 한마디로 관찰하고 생각하는 힘이 부재했던 것이다. 중학생 때 진로를 결정하다 보니 충분한 시간을 들여 스스로에게 질문하고 스스로를 관찰하지 못했다. 내가 어떤 사람인지, 나는 어떤 길을 어떻게 걷고 싶은지 명확히 인지하지 못하니 그 지점에서 엇갈림이 생겼던 것이다.


내게 ‘원하는 결과를 도출해낸 시간’이란 뜻은 ‘나란 인간은 누구인가? 앞으로 어떻게 살고 싶은가?’라는 질문에 스스로 타당하다고 여기는 대답을 가지고 나온 것이다. ‘어떻게 대답을 찾았는가?’로 곱씹어 보면 시간이 흐르고 그 속에서 행동하고, 질문하고, 기록하고, 돌아본 이 모든 행위들이 단 하나도 빠지지 않고 맞물린 끝에야 이루어진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시간이 흘러야만 했다. 내가 누구인지, 어떤 사람인지 찾는 모든 행위들에서는 시간이 걸렸다. 정말 운이 좋게도 나는 그 시간을 오로지 나에게만 사용할 수 있었다.


행동해야만 했다. 요식업이 맞는지 확인하기 위해서는 다시 요식업에 뛰어드는 수밖에 없었고, 무엇을 좋아하는지 알기 위해서는 다양한 경험을 통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을 다층화시킬 필요가 있었다. 주방에서 일하면서, 꾸준히 운동(달리기, 수영, 자전거)하고, 열심히 신문 읽고, 피아노 학원에 등록하고, 텃밭에 농사짓고, 이를 수확해 장아찌를 담그고, 좋은 책들을 많이 읽고, 수많은 글을 쓰고, 좋은 영화들을 왕창 봤다.


기록해야만 했다.  모든 행위들을 관통하는 태도가 있었다. ‘나는 무엇을 좋아하고, 어떤  하고 싶고, 앞으로 어떤 삶을 살아가고 싶은가?’.  순간을 이런 자세로 임했고,  행동과 질문들을 모두 기록했다. 사진도 찍고, 영상도 남기고, 글로도 기록했다. 글쓰기가 특히나  힘이 되었다. 글쓰기는 타인과 입으로 하는 대화와 다르게 스스로와 내면에서 대화해야 한다. 혼자 생각하고 혼자 편집하고 혼자 마침표를 찍어야만 한다.  과정에서 필연적으로 스스로를 많이 돌아볼 수밖에 없었다. 자판을 많이 누르고, 그만큼 다시 지우고, 다시 읽고 쓰고 지우기를 반복하면서 하나의 글이 완성되어 갈 때 그 순간 알게 모르게 수많은 것들이 체화되고 있었던  아닐까 싶다.


기록


깊이 생각해야 한다고 해서 무엇이든지 무분별하게 생각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모든 것을 깊이 생각하는 것은 비효율적이다. 그러나 누구에게나 긴 인생에서 깊이 생각해야 하는 때가 몇 번 있게 마련이다.  예를 들어 나의 아버지가 경험하신 것과 같은 생활상의 위기가 다른 사람에게는 절대로 일어나지 않는다고는 이야기할 수 없다. 자신이나 가족들 중에서 죽음을 택할 정도의 심한 과오를 범해서 상심에 빠지는 일이 결코 없을 것이라고도 할 수 없다.

어려움이란 누구에게나 일어날 수 있는 일이며, 이때야말로 깊이 생각하는 힘이 요구된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손을 써야 좋을지 전혀 알 수 없을 때, 혹은 다시 일어설 수 있는 가능성이 전혀 없을 때, 의지할 수 있는 것은 자신의 깊은 사고력뿐이라고 생각한다.  후지모토와의 대화에서 배운 깊이 생각하는 힘을 나는 내 인생에서 활용해 왔다. 파스칼은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고 말했다.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없다. 그런데 ‘지금이다’ 하는 바로 그때에 더욱 깊이 생각할 수 있는 힘, 그러한 소양을 키우는 것은 부모님 곁을 떠나기 전에 반드시 길러야 하는 일이다. 우리가 공부하는 목적 중의 하나도 사실은 이런 사고력을 기르는 데 있는 것이다.

[학문의 즐거움-히로니카 헤이스케 지음]


돌이켜 보면 화룡점정은 결국 균형이었다. 원래도 내면과 대화를 많이 했지만 이번에는 돈을 벌고 삶을 이어가면서, 타인들과 교류하면서 그 와중에 확실하게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단순히 생각만 하지 않고, 단순히 삶만 살지 않고 그 미묘한 선에서 균형이 시의적절하게 잘 맞아떨어졌다.


그래서 결심을 했다. 1년의 시간을 통해 학교를 가야겠다고. 대학에 가서 고등교육을 받고 싶고, 받을 것이다.


[깎고, 또 깎은 시간들]


21살에서 23살 사이의 기간을 '일을 잘못하여 뜻한 대로 되지 아니하거나 그르친 시간', 즉 실패라고 생각한다. 실패가 끝을 의미하는 않는다. 하지만 실패를 정확히 인지하지 않고 어영부영 넘어갈 때, 그래서 회복이 어려운 더 큰 실패를 불러일으키면 그건 끝을 의미할 것이다. ‘도대체 어디서부터 어떻게 잘못되었는가?’를 되짚어 보니 찾으려고 하지 않으면 절대 볼 수 없는 내면 깊은 곳에 패착의 원인이 자리 잡고 있었다. 바로 ‘과도한 자의식’이었다.


3 만에 돌아간 주방에서 일한  얼마   시점에 지금껏 느껴보지 못했던 크기의 자괴감이 다가왔다. ‘지금 내가 여기서  하고 있는 거지?’ 흰색의 공허한 벽을 마주하고 설거지를 하면서 별의별 생각을 다했다. 세상 사람들  1%  되는 극히 드문 삶이라고 하는데,  시대에 가장 적절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하는데,  세계를 다니고, 수많은 도전을 하고 여러 가지 것들을 해본 인간인데  나는 고작 9,000 밖에 안되는가?’ 그때의 모습을 ‘자아분열보다  정확하게 표현할 단어는 없을 것이다.


지금도 이 생각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어느 정도 체념한 것 같기도 하고, 아니면 그저 시급 9,000원 받으며 전전긍긍하면서 사는 게 싫어서 이토록 삶의 궤적을 틀어버린 것 같기도 하다. 주방을 퇴사한 후 놀이공원에 일하면서도 그런 모습을 싫어했다. 그런데 지금 이게 내 현실이라면 이것을 부정해서는 나만 힘들다는 걸 ‘뼈저리게' 느꼈다. 그리고 지금의 내 모습이 오롯이 나의 선택으로 이루어졌다면 더욱이 그 모습을 인정하고 받아들여야만 했다. 마냥 비관적인 것도, 마냥 낙관적인 것도 아닌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힘이 필요했었다.


만약 싸워야 한다면 싸워야 하는 것이고, 비굴하게 기어야 한다면 기어야 하는 것이고, 화해해야 한다면 화해해야 하는 것이다. 모든 결정은 혼자 책임져야 한다. 이런 걸 학교에서 배우지 못한 아이는 사회에 나와서도 배울 수 없다.

[모두 같은 달을 보지만 서로  다른 꿈을 꾼다 -김동조 지음]


놀이공원에 일하면서 참 좋았던 부분이 여유 시간에 마음껏 책을 읽을 수 있었다. 틈틈이 책을 읽으면서 과거의 내 모습을 발견했다.


 어떻게 이럴 수가 있을까? 방금 전까지만 해도 거인의 어깨 위에 올라서서 의기양양하게 세상을 내려다보고 있는 것 같았는데, 그다음 순간에 자신 안의 많은 것들이 모두 무너져버린 것이다. 게다가 그 폐허 속에서 스스로를 추스리기 위해서 부서진 조각들을 애써 주워 올리는 일을 해야 한다면, 당신은 이런 상황이 상상이 되는가?

실제로 나는 거인의 어깨에서 순식간에 저 밑바닥까지 추락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이로써 한 가지는 깨달을 수 있었다는 것이다. 내가 일 중독자라는 사실이었는데 그것은 단순히 ‘이 사람은 일을 너무 많이 해’ 정도의 차원이 아니라 ‘당장 청소든 뭐든 하지 않으면 일하다 오늘밤 죽을지도 몰라’와 같은 심각한 상태였다.

어린 나이에 성공할 수 있게 했던 끝없는 충동과 강박이 나를 그런 상태로 몰아넣고 있었다. 나는 내 머릿속에 끔찍하게 갇혀버렸고, 그 안에서 고통과 좌절이 끝없이 단조롭게 반복되었다. 그런 상태에 놓여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나는 다른 사람들과 같은 비극적 결말을 맞이하고 싶지 않았다. 어떻게든 해법을 찾아야 했다.

[에고라는 적 - 라이언 홀리데이 지음]


비대해진 자아를 내려놓는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현실을 벗어나기 위해 발버둥 치는 게 아니라 현실을 받아들이기 위해 발버둥 쳤다. 고통스럽지만 이 과정 없이 다시 태어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에고라는, 두껍고 질긴 자의식의 벽을 뚫고 나와야지만 세상을 제대로 인식하고 바라볼 수 있었던 것이다. 지금도 이것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장담하지 못한다. 하지만 이 시간을 통해서 최소한 패착의 원인이 무엇이었고, 비대해진 자아는 왜 그토록 위험한지 알아채고, 스스로를 이해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진 것만으로도 인생의 엄청난 행운이라고 생각한다.


나를 과대 해석해서 균형을 잡지 못한  뒤뚱뒤뚱거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축소 해석해서 위축되어 이도저도 아닌 삶이 아니라, 특별함에 매몰되지 말고 자유로운 마음으로 훨훨 날아갈  있기를 바란다.


[삶의 일부, 20대에 자연과 더불어 지낸 경험]


곡성에서 5년, 10년은 못 살 것 같다. 파트너가 있거나 가정을 꾸린 상태라면 다른 이야기겠지만 지금과 같이 20대 초반에 혼자 농촌에서 산다는 건 마냥 좋은 것은 아니었다. 가장 크게 느낀 게 생애주기 전반에 걸쳐서 꿈꿀 수 있는 기회의 폭이 현저하게 좁은 것이라 생각한다. 예를 들어 학창 시절에는 주변의 환경과 어른들을 보면서 자신은 어떤 어른이 될 것인가 꿈꿀 수 있고, 어른이 되면 어떤 동료들을 만나고 그들과 함께 새로운 걸 작당해볼 수 있을지 고민하고 행동할 수 있는 것 말이다. 그런데 농촌 도시 특성상 삶의 다양한 경로를 접할 기회가 현저하게 줄어든다.


이 세 가지 특징은 모두 그 동네에 사는 성인들과 관련이 있다. 대졸 이상의 학력을 가진 성인들은 대체로 똑똑하고 유능하다. 양친이 있는 가정에서 함께 사는 아이들은 대체로 안정적인 가정생활을 한다. 인구조사 응답을 제출하는 성인들은 대체로 시민사회에 활발하게 참여한다. 이러한 결과는 아이들이 보고 자라는 성인들이 그 아이들의 삶의 성공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도 있음을 뜻한다. 물론 어느 동네에서 성인들의 자질과 아이들의 삶의 성공이 상관관계를 지닌다고 해서 성인들이 그 성공의 원인이라는 것이 입증되지는 않는다. 하지만 체티와 동료 연구자들의 후속 연구에 따르면 동네에서 한 아이가 보고 자라는 성인들은 그 아이들에게 아주 유리하게 작용할 수 있다. 실제로 좋은 성인 역할모델은 좋은 학교나 경제적 번영보다 아이들에게 더 큰 영향을 끼치는 것 같다.

[데이터는 어떻게 인생의 무기가 되는가-세스 스티븐스 지음]


이런 취약점을 제외하고도 뉴욕과 파리 그리고 서울을 선망했던 소년에게 곡성은 9개월 동안 엄청난  남겨주었다. 자연과 더불어 산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번이라도 경험해본 것이 참으로 소중했다. 곡성에 도착해 창문을 내리고  공기를 마셔보면 느껴지는 감각이 다르다. 도시에서 마시는  둔탁함이 없는 아주 순수한 공기의 상태, 마셔본 사람은   것이다. 게다가 반경 5km 안에 시야를 가리는 높은 건물이 없고, 계절의 변화를 시시각각 체감할  있다.


 도시는 계절이 변한다고 아파트의 색깔이 변하지 않는다. 하지만 농촌에서는,  대자연은 모든 것이 순리대로 변한다. 하늘의 청명함부터 대지의 색깔까지. 겨울철 회색지대였던 흙은 봄에 푸르른 옷을 입었다가 여름에 진한 녹색으로 갈아입고 가을에는 황금빛으로 물들었다가 겨울에는 다시 흙으로 돌아가는 과정을 살아간다. 자전거를 타고 출퇴근하면서 논과 밭을  때면,  앞마당을 걸으면서 감나무들을  때면  살아있구나. 이게 살아있음이구나라는 생각이 절로 든다. 자전거와 도보로 생활반경  이동이 모두 가능했고, 배달 오토바이의 광란한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고, 해가 지면 모든  껌껌해지는, 철저히 자연의 관습에 순응한 인류의 본질에 맞춘 생활패턴이었다.


대자연

텃밭 농사를 지어본  또한 잊을  없는 추억이다. 돌이 무수하게 박힌 땅에 삽질을 통해 돌을 골라낸다. 그렇게 좋은 토양을 준비한  두둑을 세우고 모종과 씨앗을 심는다. 그리고 태양과 비와  그리고 시간과 우주가 도와주면 이들은 뿌리를 내리고 새로운 생명을 맺는다.  위에서 봤을  제대로 크고 있는지 근심 가득한 심정으로 바라보지만  , 인간인 우리가   없는 곳에서 그들은 뿌리내리기 위해 엄청나게 고군분투하고 있다. 마치 우리네 삶처럼.  과정을 직접 보고 겪으면서  많은 위로를 받았다. 철이 들기 위해서는 이토록 수많은 것들이 뒷받침되어야 하구나. 대지의 양분, 태양의 따뜻함, 바람의 서늘함, 폭풍의 매서움, 그리고 밤의 적막까지.  모든 것들이 모이고 시간이 흘러야만 하나의 생명체가 ‘   있구나.


생명


시골에서 자란 아버지를 보고 컸기에 농사와 가까워졌듯,  경험도 단순히 나의 인생뿐만 아니라 미래의 가족들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을 것이다.  생명의 경이로움을,  수확의 행복함을, 철이 든다의 심오함과 신비로움을 그들과 공유해보고 싶은 마음에 벌써 설렌다.


[첨예한 고독]


우리 모두가 갖고 있는데 나만 없을 , 인간은 심리적으로 불편함을 느끼며 강한 want 만들어 낸다. 게다가 와이프 앞에도 ‘우리 붙이는 한국인은  세계 제일의 공동체 의식을 지닌 나라다. 그렇기에 우리는 무언가를 강하게 원하는 마음이  때면  한번 멈춰 서야 한다. 이것을 좋아해서 자연스럽게 원하는 건지, 아니면 모두 갖고 있는데 나만 없어서 원하는 건지. 시간이든 돈이든 에너지든, 자원에는 한계가 있다.  제한된 자원 안에서 합리적인 소비를 해야 한다면 1 뒤에 놓아버릴 풍선 같은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그렇다면 like 어디서 찾을  있을까? 힌트는 고독이다. 내가 정말 좋아하는  우리 속에서 발견할  있다. 오롯이 자아만이 존재하는 상황, 타인의 시선이 없는 곳에서도 혼자 당당하게 좋아할  있다면 그게 정말 Like 아닐까.

[적정한 -김경일 지음]


철저하게 혼자만의, 혼자였던 시간이었다. 일 끝나면 혼자 달리고, 혼자 수영하고, 혼자 책 읽고, 혼자 밥 먹고, 혼자 글 쓰고, 혼자 영화 보고, 혼자 생각했다. 깊숙한 내면과 마주할 수 있는 시간임과 동시에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고 그 안에만 갇혀있다 보니 정신건강에 참 위험할 수도 있겠다는 경각심이 들었다.


고독


곡성을 떠난  1달이 지난 지금 그때를 회상해 보면 앞으로 인생에서, 아니  인간의 인생에서 이토록 고독할  있는 기회가  번이나 있을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고독은 파도가 높이 솟구치고, 폭풍우가 치고, 아름다운 섬이 있는  망망대해를 항해하기  ''라는 배가 어떻게 만들어졌고, 어떤 강점을 지녔고, 어떤 취약점을 보이는지 확인하고 그걸 바탕으로 대항해는 준비하는 것이었다. 실제 항해에서는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무수히 발생하겠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배를 점검하고 스스로 알아갈  있었다는  자체가,  방황의 시간을 가질  있었던  자체가 엄청난 행운이었구나를 새삼 느낀다.


지난 5  멋진 친구가  통의 문자를 보내주었다. 매일 많은 일을 하고 많은 것을 배우면서도 자신을 들여다보기를 게을리하지 않고 숭고한 노동으로  흘리는 지금의 시간으로 스스로에게 얼마나  선물을 하고 있는지 천천히 알게  거예요.”  글을 쓰면서 9개월의 시간을,  나의 23살을 돌아봤다.  때문에 ‘천천히 알게  거예요라는 단서를 붙인 것인가? 이것이 그가 말한 ‘인생의 선물이었던 것인가.


선물


문자 한 통과 함께 책 한 권을 소개해주었다. 헨리 데이비드 소로가 지은 월든. 그 책의 구절을 끝으로 곡성포레스트를 마치고자 한다.


나는 숲에 들어갈 때처럼 충분한 이유가 있어서 숲을 떠났다. 내가 살아야 할 삶이 몇 가지 더 남아 있어서, 숲 속에서 사는 한 가지 삶에 더 이상 시간을 할애할 수 없다고 느꼈기 때문이다. 우리는 자신도 느끼지 못하는 사이에 너무도 쉽게 어떤 길로 접어들어, 그 길을 직접 밟아 다져서 일종의 관례로 만들어버린다. 내가 숲에서 산 지 일주일도 지나기 전에 내 집 문 앞에서 호수까지 내 발에 밟혀 길이 생겼다. 그 길을 마지막으로 밟은 지 5~6년이 지났건만 그 길은 아직도 뚜렷이 남아 있다. 다른 이들도 그 길을 지나다녔을 것이고, 그래서 길이 계속 남는 데 이바지했을 것이다.

지표면은 부드러워서 인간이 밟으면 자국이 남는다. 정신이 다니는 길도 마찬가지다. 그렇다면 세상의 간선도로들은 얼마나 닳아빠지고 먼지투성이일까. 전통과 순응은 얼마나 깊은 바퀴자국을 남겼을까. 나는 선실에 틀어박혀 여행하는 선객이 되기보다는 차라리 세상의 돛대 앞과 갑판 위에서 일하는 선원이 되고 싶었다. 거기서는 산을 비추는 달빛을 가장 잘 볼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이제 나는 갑판 밑 선실로 내려가고 싶지 않다.

나는 체험을 통해 적어도 다음과 같은 것을 배웠다. 자신의 꿈을 향해 자신 있게 나아가고 자기가 상상해온 삶을 살려고 노력하면, 평소에는 기대하지도 못했던 성공을 거둘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그 과정에 어떤 것들은 지나간 일로 잊어버리고, 눈에 보이지 않는 경계를 넘어서게 될 것이다. 새롭고 보편적이며 더 진보적인 법칙이 주변과 내면에 확립되기 시작할 것이다. 낡은 법칙은 확장되어 좀 더 진보적인 의미에서 그에게 유리한 방향으로 해석될 것이고, 그러면 그는 더 지위가 높은 존재의 인가를 받아 살아가게 될 것이다. 생활을 단순화할수록 우주의 법칙은 그에 비례하여 간결해질 테니, 고독은 고독이 아니고 가난은 가난이 아니고 약점은 약점이 아닐 것이다.

[월든- 헨리 데이비드 소로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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