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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토리 Aug 09. 2024

여름, 친구를 만나러 간다

 장마가 끝나고 전국이 폭염으로 익어가는 8월에 긴바지와 초록색 점퍼. 장갑에 모자까지 중무장하고 집을 나섰다. 배낭 안에는 어젯밤에 충전해 둔 액션캠과 삼각대, 간식도 넉넉히 챙겼다. 한 손에는 대포만 한 카메라까지 드니 출발하기도 전에 땀이 맺힌다. 매년 여름, 곶자왈을 방문하는 친구들을 만나러 가는 길이다.    


 지금으로부터 40년쯤 되었을까? 내가 살던 시골 마을은 여름방학이면 활기가 돌았다. 일자리를 찾아 도시에서 정착한 자식들이 방학 동안 자신의 아이들을 고향에 맡기려고 내려왔기 때문이다. 어느 날 골목엔 백화점에서 막 사입은 듯한 예쁜 아동복 차림의 새침한 여자아이들이 보이기도 하고, 다른 날엔 TV에서만 보던 신기한 장난감을 자랑스레 손에 쥔 서울말 쓰는 남자 친구들이 나타나기도 했다. 우리 할머니댁에도 방학 때면 사촌들이 대거 방문해 방학을 보내고 다시 도시로 돌아갔다. 나는 사촌들과 방학 내내 물과 산과 들로 뛰어다니며 정말 최선을 다해 놀았다.      


 그런데 도시에서 온 친척들과 노는 게 즐겁기만 한 건 아니었다. 나름 눈치가 빨랐던 나는 어린 나이에도 어쩔 수 없는 섭섭한 장면들을 자주 목격했었다. 할머니와 할아버지는 눈에 띄게 사촌들을 편애하셨다. 사촌들이 방문하는 방학 때면 할아버지는 평소에 형과 나에게 사주신적 없는 음식들을 시장에서 사 오셨고, 우리에겐 한 번도 보인적 없는 밝은 표정을 지으셨다. 그럴 때마다 알 수 없는 오묘한 감정이 올라왔다. 그 감정이 ‘섭섭함’이라는 걸 알게 된 건 어른이 되어서였다.     


 교회에 열심히 다녔던 어린 시절, 성경에 나오는 이야기 중 가장 기억에 남는 비유가 ‘돌아온 탕자’의 비유였다. 아버지에게 떼를 써서 재산을 물려받고 외지로 나가서는 여색과 술로 모든 것을 탕진했던 둘째 아들이 거지꼴을 하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오자, 아버지는 혼내기는커녕 그 아들을 위해 살진 소를 잡고 마을잔치를 벌였다. 그러자 아버지 곁을 지켰던 큰아들은 섭섭함에 치를 떤다. ‘평생 부모 곁을 지킨 나는 도대체 뭘까?’ 나는 성경의 큰 뜻과는 달리 큰아들이 불쌍하다는 불경한 생각을 했었다. 그리고 고향에 남아 할아버지와 할머니를 봉양하고 있는 우리 부모님을 떠올렸다.      


 농업사회를 지나 1980년대 산업사회가 본격화되면서 부모 곁을 지킨 자식보다 고향을 떠난 자식에게 더 높은 평가가 주어졌다. 고향에 남아있는 자식들은 상대적으로 능력이 없어 떠나지 못한 사람쯤으로 취급되었다. 떠나지 않고 한 곳에 오래 머문다는 것은 서로 익숙해진다는 것이었고, 사람들은 익숙한 것에 존경을 표하지 않는다. 인류의 구원자라 칭송받는 예수도 자신이 자란 마을 사람들에겐 그저 익숙한 ‘목수네 아들’ 일뿐이었으니까.     


 공간의 이동은 인간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우리나라에서 관찰되는 새들 중 약 90%는 계절에 따라 이동한다. 왜 새들은 죽을 각오로 수 천 킬로미터를 이동할까? 인간들처럼 자신의 가치를 높이기 위해서는 아닐 텐데 말이다. 학자들은 풍부한 먹이를 찾기 위해서라고 설명한다. 인간 역시 풍부한 먹잇감(일자리)을 찾기 위해 도시로 이동하니까 새들과 별반 다를 바 없다.      


 인간의 이동이 새들과 다른 점이 있다면 먹잇감 말고 다른 이유들로도 이동한다는 것이다. 그중 가장 대표적인 이유가 바로 여행이다. 생각해 보면 여행은 이동차체가 목적인 이동이다. 이동함으로써 만족을 얻는 행위이다. 편리해진 교통 덕분에 어디든 쉽게 이동할 수 있는 세상이 되자, 사람들은 더 낯설고 더 독특한 것을 찾아 애써 번 돈을 탕진해 가며 이동한다.      


 독특한 화산지형과 비교적 덜 파괴된 자연환경, 게다가 육지와는 다른 섬만의 독특한 문화를 잘 간직한 제주도가 그 대상지가 되는 건 어쩌면 당연한 일일지 모른다. 그래서 너무 많은 사람들이 제주로 몰려들었고, 너무 많은 난개발로 제주 곳곳이 파괴되었다. 인간의 이동이 낳은 파괴다.      


 



 올여름에도 마을 곶자왈 숲에 친구들이 찾아왔다. 새들은 누구보다도 눈치가 빠른 녀석들이다. 시각, 후각이 발달해 작은 움직임도 쉽게 포착한다. 특히 어린 새끼를 키우는 시기에는 더 예민해진다. 멀리서 얼굴이라도 한번 보려면 폭염 속에서도 얼룩무늬 위장막 안에서 꼼짝하지 않고 몇 시간이고 기다려야 한다. 부동자세 때문에 발이 저려오고 모기가 윙윙 날아다니며 곳곳을 물어뜯어도 꾹 참아야 한다. 그렇게 해서라도 얼굴을 한 번 볼 수 있으면 행운이다. 하루 종일 기다려도 허탕치고 돌아오는 날이 많다.


 2019년부터 해마다 마을 인근 곶자왈에서 멸종위기생물들을 관찰하고 있다. 대규모개발사업의 문제점을 알리기 위해 뭐라도 해보자고 시작한 일이다. 개발사업자가 지역대학 교수에게 의뢰해 작성된 환경영향평가조사보고서에는 멸종위기종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단다. 하지만 보고서와는 달리 곶자왈에서는 해마다 팔색조, 긴꼬리딱새, 애기뿔소똥구리, 매 등 멸종위기야생생물들이 수두룩하게 발견되었다. 그럼에도 한 번 승인된 개발사업은 행정의 암묵적인 조력하에 20년 가까이 멈출 줄 모른다.

여름이면 제주 중산간 마을 곶자왈을 찾아오는 팔색조, 긴꼬리딱새, 흰눈썹황금새 등 멸종위기생물들 



 8월은 어미새들이 어린 새끼들을 훈련시키는 시기다. 건너편 나뭇가지에서 아기새들을 부르는 긴꼬리딱새가 보인다. 어미새의 소리를 쫓아 아기새들이 나는 연습을 하는 중이다. 이제 곶자왈을 떠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 어린 새들도 스스로 독립해 먼 거리를 비행해야 한다.  단디 준비해야 살아남을 수 있다. 


 가을이 되어 철새들이 되돌아가면 곶자왈은 직박구리, 곤줄박이, 박새들이 다시 차지할 것이다. '외지 것'이 떠나간 곶자왈에서 텃새들은 어떤 기분이 들까? 시원할까? 섭섭할까? 방학이 끝나 또래 친척들이 모두 도시로 돌아간 후  적막한 골목을 바라보는 헛헛함을 이 친구들도 느낄까? 


 아직 무더위가 한창이지만 남쪽 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길어졌다. 이제 여름 친구들을 보내고 겨울 친구들을 맞이할 준비를 해야 할 때가 되었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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