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화
사실 중기도 오늘 이 자리가 두 번, 아니 세 번째 방문이다.
이자가 적은 만큼 이 서민 전세자금 대출은 까다로운 조건이 하나 더 따라붙는다. 다른 기관에서 발행하는 허가서를 갖춰야 한다. 이른바 구청에서 인정하는 영세민 자격증이다. 구청에 찾아가 다시 한번 가난한 삶을 검증받아야 하는 절차를 빼먹었다. 영세민증을 발급받아 은행으로 가져가야 비로소 신청할 자격이 주어진다는 것을 알지 못했다. 애초에 필요한 서류를 다 알려줬다면 이런 생고생을 하지 않았을 터인데. 중기는 똥개가 된 것 같았다. 마구 집어던지는 뼈다귀를 물어와 주인의 발 밑에 뱉어놓는 충직한 개. 서류를 가져와 그의 앞에 풀어놓지만 정작 중요한 물건이 없다. 다시 뒤돌아 달려가야 한다. 중기는 그렇게 은행 직원의 똥개가 되었다. 물어오라고 공을 던지듯이 서류가 부족하다고 차디찬 말을 집어던진다. 알고 있으면서도 말해주지 않는 고약한 주인. 모든 건 중기가 꼼꼼히 살피지 않은 까닭이다. 그런데도 중기는 그가 야속하고 얄밉다. 그 불친절함이. 필요한 서류가 무언지 뻔히 알면서도 모르는 척하는 무관심이. 그리하여 몹시 짜증 나고 자기 자신이 초라해지는 은행 창구에 다시 오게 된 이유다.
누군가에게 돈을 꾼다는 것은 어깨에 힘이 들어갈 일은 아니다. 오래전 돈을 빌려달라고 했던 친구가 문득 떠오른다. 마치 자신이 맡겨놓은 돈을 내놓으라는 양, 오히려 힘을 주어 말하던 친구. 그 친구는 돈을 빌릴 때도 떳떳했다. 어쩌면 그렇게 자신만만할 수 있는지. 그런 그와 비교하면 중기는 전혀 다르다. 돈 없는 죄인이라고 어깨가 천근만근. 어마어마하게 큰 바윗덩이가 얹어진 느낌이랄까. 중기에게는 영세민의 딱지 표가 붙어버렸다. 오로지 제일 낮은 금리로 돈을 빌릴 수 있을지 없을지에만 온 신경이 곤두섰다. 대한민국에서 돈 없는 서민이 삼 퍼센트 이자로 은행 돈을 빌리기 위해 갖추어야 할 서류는 너무 복잡했다. 그 기준에 맞추기 위해서는 이 나라에서 가장 빈곤한 시민이라는 증명을 해야 한다. 삼 퍼센트를 위해서 자신의 밑바닥까지 모든 것을 까발려 증명하는 작업이 이루어진다. 예컨대 자동차는 있는지, 월급은 얼마인지, 부양가족은 몇 명인지, 자기 명의로 집이 있는지, 배우자의 수입은 얼마인지 등등… ‘나’라는 인간의 신용을 증빙하기 위해 모조리 털어낸다. 이렇듯 돈 없는 사람은 돈을 쥐고 있는 집단의 규칙에 따라야 한다. 이 작업이 끝나면 자기 자신이 이 사회에서 어느 위치에 서 있는지 바로 판가름이 난다. 그동안 살아온 인생의 성적표가 발표된다. 수우미양가에서 '양', '가'만 표기된 채로. 영세민의 타이틀을 거머쥔 것을 기뻐해야 할지 울상을 지어야 할지. 결국은 초라해진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이제 중기의 신분은 양파 껍질 벗겨내듯이 까발려졌다. 영세민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서다. 이런 중기에게 직원의 친절한 상담을 기대했다가는 큰 오산이다. 날 선 눈초리로 서류 한 장이라도 빠졌는지 이 잡듯이 뒤적거린다. 만의 하나라도 빠지면 단박에 단칼이 날아온다. 인정머리 없는 직원의 대응에 다음 손님의 차례로 이어진다. 좀 자세히 가르쳐주면 좋으련만 창구 직원도 업무에 치어서 그런지 부족한 서류에 대해서 말하기 싫어하는 눈치다. 그런 직원의 응대가 중기 귀에는 다르게 번역되어 들어온다.
'돈은 당신들이 빌리니 필요한 서류는 알아서 잘 챙겨 오세요.'
지난번 빠진 서류를 준비해서 가져가면 이번엔 또 어떤 서류가 빠졌다고 바로 퇴짜를 놓는다. 그들의 눈에도 융자받으러 오는 사람들이 대수롭지 않게 생각이 드는 건지. 아니면 가치 없어 보이는 사람이라고 막 대하는 건지. 제대로 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결론적으로 중기가 정확히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일지도. 십오 년이 지난 지금이야 은행 대출 창구에 가면 친절하게 맞아주지만, 그때만 해도 돈 빌리러 가는 사람에게 쌀쌀맞게 대응했던 그 차가운 얼굴에 대한 기억이 지워지지 않는다.
앞사람의 상담이 다 끝나고 드디어 중기 차례가 왔다. 핸드폰 액정을 쳐다보니 시간은 어느덧 다섯 시를 훌쩍 넘겼다. 보통은 상담이 끝나면 바로 다음 대기자를 불러 일을 처리한다. 그런데 담당 직원의 입에서 나와야 할 말이 나오지 않는다.
'다음 손님'
이 말을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던가. 다음 손님은 바로 중기이거늘. 하지만 번호를 부르지 않고 다른 사무만 계속 보고 있는 직원. 중기 속에서는 천불이 나기 시작한다. 기다림에 지칠 대로 지쳐 짜증이 확 밀려오는 것을 억지로 참으며 부르기만을 기다리는데. 주인이 먹이를 주기만 기다리는 똥개처럼 부동자세로 앉아 있는 중기. 그에게 중기는 안중에도 없다.
'다음 손님'
하는 목소리가 나오기만을 바라며 직원의 입만 쳐다보지만 딴짓만 하는 창구 직원. 각진 얼굴에 광대뼈가 유난히 튀어나온 40대 후반으로 보이는 남자. 꼴 보기 싫은 까칠함까지 무장한 대출 상담 아저씨. 오늘 마지막 순번인 중기 혼자만 남았다. 사람을 무시하는 건지. 바로 앞에 앉아 있는데도 딴청을 부린다. 중기는 성질을 내고 싶었어도 그럴 수 없다. 괜스레 성질을 부렸다가 이득 될 게 없다는 생각에 가까스로 화를 가라앉힌다. 그러고도 삼십 분이나 지루한 시간이 흐른 뒤에야 마지못해 중기의 번호를 부른다. 사람을 대놓고 무시하는 그의 태도에 열이 머리끝까지 오른다. 어떤 일이 있어도 중기로서는 서류가 무사통과해야 하므로 억울해도 분을 삭여야 하는 시점이다. 다행히 서류는 오늘만큼은 완벽했다. 비로소 구로동에 신혼 단칸방, 전세 하나 마련하기 위한 자금을 약속받았다.
답답했던 마음이 한결 가벼워졌다. 은행의 일반 업무는 이미 끝난 시각. 세계 시간을 알려주는 전자 디지털 숫자판에서 한국은 PM 5시 55분이 표시됐다. 정문 옆의 조그마한 철문을 열고 나오니 들어올 때보다 거센 빗방울이 쏟아졌다. 고개를 들어 올려 위를 쳐다봤다. 빗발치는 물줄기에 가려 하늘이 희뿌옇게 보였다. 묵직해진 빗방울처럼 기간 내에 갚아야 할 원금과 이자는 중기의 양어깨를 짓누르며 속으로 스며들었다. 빚으로 시작하는 새로운 인생의 첫발은 쓰라린 기다림이었다. 홀가분하지도 가볍지도 않은 시작점. 초라한 자화상까지 드러내며 전세금을 마련했지만, 오래된 다세대 빌라에서 중기 지분은 단 1%도 안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