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대주, 시한부 인생

10화

by 갸리

중기는 세대주가 되었다.



바로 그 첫날이 신혼 살림집 계약서를 쓰던 날이다. 2002년 9월 하고도 두 번째 날. 아버지 그늘에서 벗어나 드디어 자신이 세대주가 되었던 날. 왠지 진짜 어른이 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의 인생에 진정한 홀로서기가 시작됐다.


그리고 한 달 후. 중기는 이삿짐을 옮기다가 문득 궁금해졌다. 이 건물에는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흘러들어와 그들의 고단한 삶의 흔적을 남겼을까. 건물 일층 현관문의 삐걱거리는 소리를 들었을 때, 외벽이 페이고 이곳저곳 깨진 벽돌이 눈에 들어왔을 때, 주거인의 안전을 책임지는 계단 철제 난간의 용접 부위가 떨어져 나가 대롱대롱 매달려 있을 때, 이 건물이 얼마나 많은 사람을 갈아치웠는지 짐작되었다. 지은 지 18년 된 빨간색 벽돌로 외벽을 다진 다세대 빌라 이층. 각 층에 한 가구씩 총 네 가구가 사는 작은 빌라가 중기의 신혼집이다. 그 집은 신혼이라는 단어와는 어울리지 않는 아주 많이 낡은 건물이었다. 어렵게 마련한 은행 돈으로 얻은 허름한 보금자리지만 그럭저럭 만족했다. 전셋값이 싼 만큼 햇볕까지 바라는 건 욕심이라고 해야 할까. 사방팔방이 빨간 벽돌 건물로 가로막혀 있었다. 한여름 대낮에도 시원한 그늘이 자랑이라도 되는 양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볕은 모조리 차단되는 환경. 이 집에서 하늘을 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창문 밖으로 몸통을 내민다. 목을 90도 가까이 하늘로 돌린다. 눈동자를 위로 치켜뜬다. 그제야 건물 사이에 낀 직사각형 작은 하늘이 보이는 집이었다. 자는 시간을 제외하면 형광등 스위치는 꺼질 날이 없는 집. 안방 창문을 열면 바로 앞 일 미터도 안 되는 거리에 옆 건물 창문이 손에 닿을락 말락 한 거리에 있다. 신혼부부에게 신성하고 아름다워야 할 은밀한 사생활 영역은 고스란히 옆집과 맞닿아 있는 형국이다. 옆 건물 부부싸움 소리도 마치 건넌방에서 떠드는 것처럼 들려왔다. 이렇듯 붉은 벽돌은 방음 기능이 없었다. 사생활 보호는 시각 차원에서만 이루어지는 가림막에 불과했고 돌을 뚫고 나온 비명은 청각 세포를 괴롭혔다. 저녁이면 아이에게 소리 지르는 엄마의 찢어지는 목소리, 술에 취한 아저씨의 고성방가, 시도 때도 없는 갓난아기 울음소리 등등. 인간 만사 벌어지는 모든 잡소리가 벽돌을 뚫고 들어온다. 좋게 말하면 서민들의 삶이 묻어나는 소리지만 현실은 뇌신경 세포를 긁어대는 잡음에 불과했다. 듣기 싫어도 고막을 찢고 파고드는 소리와 소음으로 가득한 곳. 마치 떨어지기 싫어하는 연인처럼 오래된 낡은 주택 건물은 서로의 살갗(벽돌)을 맞대고 서 있다. 이곳이 중기가 첫 번째 삶의 터전을 이룬 동네다. 인간이 질병이나 예기치 못한 사고로 시한부 인생을 산다면, 이 공간에서는 이년을 넘기기 힘든 시한부 거주 인생이 시작됐다.



2년 시한부 인생


대한민국에서 전세로 산다는 것은 이년 주기로 거주지를 옮겨야 하는 숙명이 있다고 말하고 싶다. 월세라면 계속 돈을 내면서 이년 이상도 같은 장소에서 살 수는 있지만, 그 누가 월세살이를 원할까. 월세에 살아도 상관없는 특수한 계층을 빼고는 서민에게는 전세가 답이다. 이렇게 답을 미리 정하고 싶진 않지만 사회 통념이 그런 쪽으로 흘러간다. 서민의 삶에서 전세나 월세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존재다. 기껏해야 이십사 개월을 채우고 삶의 터전을 옮겨야 하는 사회에서 살아간다. 방 두 칸짜리 전세로 살다가 더 작은 곳으로 가기도 하고, 언제든지 월세로 갈아타야 할 상황이 올지도 모른다. 또는 이년도 채우지 못한 채 집주인의 일방적 요구로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 이런 억울한 감정을 헤아려 주거나 받아줄 곳은 아무 데도 없다. 모든 건 자신이 짊어져야 할 짐짝이나 다름없으므로. 그래서 '억울하면 돈 벌어!'라는 말이 괜히 있는 말이 아니다. 예전 MBC 뉴스 데스크 아나운서 최일구 씨가 했던 말 중 “청춘 여러분! 인생 뭐 있습니까? 전세 아니면 월세죠!”라고 했다. 힘든 청춘들의 삶에 도움이 되고자 웃으면서 힘내라고 한 말이었겠지만, 정작 살아보니 '전세', '월세'의 서러움에 있던 웃음도 사라진다. 돈 없는 청춘에게는.



이사...

이삿짐을 꾸리는 일은 중기 인생에서 가장 큰 스트레스로 남아있다. 일본 속담에 이런 말이 있다.


'引越し貧乏’ (일본식 발음 - 힛고시빈보)


이사를 하면 할수록 가난해진다는 뜻이다. 석 달 치 집세를 선불로 주고 들어가는 것이 일본 주택의 일반적인 거래 기준이다 보니 이사하면 할수록 손해를 본다는 개념이다. 즉, 석 달 치는 보증금 형태이고 그중 한 달 치는 받아서 나올 수 있다 해도 집을 옮길 때마다 그만큼 손해라는 사실이다.

그러면 지금 중기의 현실은 어떤가? 중기에게는 이사 비용조차도 만만치 않은 금액이다. 보편적으로 가난한 사람들은 어쩔 수 없이 더 자주 이사를 하게 된다. 따라서 불필요한 지출이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저축이라는 단어는 그의 머리에서 사라진 지 오래. 이사하는 데 돈이라도 모자라지 않으면 다행이다. 어디 그뿐일까. 계약 기간 만료일이 다가오면 스트레스가 서서히 시동을 건다. 또 어디서 돈을 빌려야 할지. 또 얼마나 회사에서 멀어져야 할지. 원금 상환은 못 하고 이자만 갖다 바치는 생활에 빠진다.

이른바 '방랑자 인생'이 시작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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