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화
살던 집에서 떠나야 하는 이유는 딱 두 가지 경우다.
돈벌이가 잘 돼 더 넓은 집으로 옮기거나 올라간 집세를 충당하지 못해 옮기거나. 중기는 전자이길 희망하지만, 현실은 두말할 것 없이 후자다. 그가 결혼 후 첫 번째 집에서 이삿짐을 싸야 했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보증금 인상은 당연한 일이고, 불운의 그림자는 따로 있었다. 오십 퍼센트나 보증금을 더 올려 받겠다는 집주인. 그런 돈도 없을뿐더러 그 집에서 살고 싶지 않았던 심각한 이유는 도둑이었다. 지은 지 오래된 빌라들은 이 층이라 하더라도 일 층 같은 높이에 있는 집들이 많았다. 일 층을 가장한 반지하처럼. 중기 신혼집도 그런 이 층이었다. 현관을 들어서면 바로 왼쪽 벽에 커다란 창문 하나가 있고 그 창문 밖으로는 지나다니는 사람들의 다리만 보였다. 그곳에서 쪼그려 앉기만 해도 집안이 훤히 들여다보였다. 언제고 마음만 먹으면 누구라도 침입할 수 있는 허름한 방범 창문. 그런 동네에 도둑의 침입을 막는 시스템이 있을 리 만무하거니와 제대로 된 방범창이 갖추어진 집도 드물었다. 그나마 얇디얇은 알루미늄 봉을 일자로 끼워 넣은 창살 나부랭이가 한 집안의 방범을 책임진다. 초등학생 힘으로도 충분히 휠 수 있는 엿가락 수준에서 말이다.
불청객 침입 사건의 원인은 인터넷 라인 설치 때문이었다. 설치기사가 창문 새시에 구멍을 뚫어 라인을 집어넣지 않고 대충 작업하고 마무리한 까닭이다. 건물이 오래되어 그렇게밖에 작업을 못 한 것인지 결국, 인터넷 라인은 창문에 틈을 만들었다. 즉, 창문을 제대로 잠글 수 없게 해 놓았다. 따라서 항상 창문이 열려있는 상태가 되고 말았다. '별일이야 있겠어!?'라는 생각은 큰 착각이었다.
중기 부부는 퇴근 후 집안으로 들어와 불을 켰다. 순간 무언가 불길한 기운이 느껴졌다.
"오빠! 차... 차... 창문이...!"
중기 아내는 제대로 입을 열지 못한 채 몸이 굳었다. 창문은 열려 있고 가냘픈 창틀은 떨어져 나가 있었다.
"오빠! 바닥, 바닥 봐봐! 신발 자국... 자국이 있다고..."
아내의 다급한 목소리에 중기 시선은 아래로 향했다. 부엌 바닥에는 무수히 많은 발자국이 찍혀 있었다. 발자국은 그곳에만 있지 않았다. 식탁과 방바닥 여기저기에 두려움과 공포를 새겨놓았다. 거뭇거뭇한 운동화 발자국때문에 가슴팍이 두근거리고 둘의 마음속엔 멀미가 일었다. 누군가 자신의 생활공간에 침입했다는 사실이. 온몸에 소름을 돋게 했다. 중기는 잠시 멍했던 정신을 되돌리려 애썼다. 떨리는 가슴을 가다듬고 뇌세포를 재빨리 가동했다. 어디를 먼저 점검해야 할지.
서랍장이었다.
염려했던 서랍장 문은 보란 듯이 열려있었다. 안에 들어있던 옷이 죄다 바깥으로 제멋대로 널브러진 채. 도둑이 이었다. 중기는 서랍장 깊숙이 손을 밀어 넣었다. 딱딱한 결혼식 폐물 상자가 손에 잡히지 않았다. 이리저리 더듬어봐도 부드러운 감촉뿐이다. 그뿐만 아니라 동전 모아 놓은 항아리도 사라졌다. 오백 원짜리 동전으로 족히 몇십만 원은 됐다. 역시나 도둑은 전문가다웠다. 그나마 값비싼 물건이라 꼭꼭 숨겨놓았건만. 중기 인생에서 제일 값진 금목걸이며 반지를 전부 털어갔다. 심지어 현금까지도. 많지도 않은 결혼 예물을 다 털린 것도 모자라 어처구니없는 일은 그치지 않았는데.
떨리는 가슴을 부여잡고 제일 먼저 한 일은 경찰서에 신고 전화를 넣었다. 그때만 해도 미국 수사 드라마를 워낙에 많이 봐왔던 터라 우리나라 경찰에게도 일말의 기대를 품었다. 드라마 형사들처럼 과학적인 조사는 아니더라도 무언가 기댈 수 있을 거라고. 신고 후 십분 쯤 지났을까. 현관 벨이 울렸다. 중기는 문을 열었다. 제복 입은 경찰 두 명이었다. 예상보다 빨리 찾아온 경찰에게 왠지 모를 신뢰감이 들었다. 이미 신고 전화로 대충 상황은 알고 있다며 대뜸 두 가지 방법을 얘기했다. 조서를 쓰러 경찰서로 갈 것이냐, 아니면 여기서 조용히 마무리할 것이냐. 중기는 당황스러웠다. 조용히 마무리 짓자니 도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경찰서에 가면 이런저런 조서를 꾸며야 하므로 피해자가 더 힘들다는 말을 강조하면서. 좀도둑은 귀찮은 존재라는 듯 그들의 본심을 드러냈다. 둘 중 나이 많은 경찰은 은근히 조용히 마무리 짓기를 원하는 눈치였다. 현실의 경찰과 드라마 속 경찰은 달랐다. 드라마처럼 집안으로 들어와서 선명한 도둑 발자국도 찍어가고 초동수사를 기대했다. 사건 현장을 훼손하면 안 되기에 발자국이 지워지지 않도록 최대한 신경 쓰면서. 그러나 경찰들은 집안으로 발을 들여놓을 생각이 아예 없었다. 현관 뒤에 서서 먼 산불 구경하듯 무심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거 어차피 못 잡아요."
미국 드라마처럼 하얀 가루를 뿌려 도둑의 지문을 찾는 시늉은 하지 않더라도 '열심히 잡아볼 테니 걱정하지 마세요.'라는 말이라도 해야 하는 것이 상식이 아닌가. 중기는 도둑을 잡을 의도가 전혀 없는 경찰의 말에 화가 치밀었다. 경찰서에 가봐야 서로 피곤하다는 말. 이 말인즉슨 이런 일로 귀찮게 하지 말라는 뜻이었다. 중기는 어이없어 한숨만 나올 뿐이었다. 경황없고 가슴 떨리는 상황에 경찰에게 아무런 대구도 하지 못하였다. 하찮은 좀도둑을 잡을 여유 따위는 없다는 듯 경찰은 돌아갔다.
그리고 잠시 뒤. 2층에서 떠드는 소리가 들렸던지 4층에 살던 집주인 할머니 할아버지가 내려왔다.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중기는 도둑이 들었다고 했다. 꽁무니 뺀 경찰 대신에 집주인에게나마 무언가 위로의 말이라도 듣고 싶었다. 방범용 창살을 부수고 도둑이 들었다고 재차 말했다. 마른 나뭇가지보다 못한 방범창이 뜯어졌다고. 태연하게 듣고 있던 할아버지 입에서 돌아온 대답은 가관이었다.
"부서진 창살 제대로 고쳐놔요."
단지 그 말뿐이었다. 그리고 휙 하니 계단 위로 올라가 버리는 매정한 노인. 피해를 본 임차인에게 그렇게밖에 말할 수 없는 건지. 위로 올라가는 그 노인의 다리 끝을 쏘아보며 야박, 야멸, 인색, 쌀쌀, 냉정, 매정, 각박. 그런 단어들이 떠올랐다. 그 각각의 단어 뒤에 '한 인간'을 붙이며 몇 번이고 반복해서 말했다. 마음 같아선 눈앞에서 융단폭격하듯이 꽂아 넣고 싶었다. 좀도둑은 잡으려고도 하지 않는 경찰과 집주인의 인정머리 없는 말 한마디. 어쩌면 물건을 훔쳐 간 도둑보다 더 얄미운 존재였을지도. 그리하여 이 집에 대한 정나미가 뚝 떨어지게 되었다. 현실과 티브이 드라마는 확실히 달랐다. 드라마 같은 판타지를 기대했던 사건은 야박한 현실을 일깨워 주었고, 본격적인 중기의 방랑자 이사 인생 여정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