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how me the money

12화

by 갸리

'show me the money!'라고 외치면 요즘 세대는 아마도 랩 배틀이 가장 먼저 떠오르겠지만 중기에게는 다른 의미로 남아있다.


show me the money


IMF 시대에 떠오르는 게임이라면 블리자드 사의 '스타크래프트'만 한 것이 있을까? 뭇 남성들을 피시방으로 끌어모았던. 하물며 점심시간에도 그곳에 가면 직장인 남자들로 북적였다. 이십 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게임 방송 채널에서 중계하는 것을 보면 게임계의 명백한 베스트셀러다. 그다지 게임을 좋아하지 않던 중기도 그 게임만큼은 꽤 즐겼던 이유는 단 한 가지다. 처음 시작은 좋아서 했다기보다는 회사 동료들과 함께 하는 집단의식이 그 밑에 뿌리를 뒀다. 회사의 남자 동료들 전부 그 게임에 빠졌을 때 중기 혼자만 빠지면 왠지 쓸쓸했기에 그 무리에 함께 했다. 게임에 대해 하나하나 알아갈 무렵 이 게임의 진정한 매력을 의외의 곳에서 발견했다. 화수분같이 써도 써도 줄지 않는 광물 자원을 얻는 방법이 있었다. 이른바 '치트키'라 했다. 게임 중 화면에 'show me the money'라는 문구를 키보드로 타자하면 자금이 순식간에 채워졌다. 일확천금의 심리를 교묘히 이용해 개발사가 고안한 아이디어였다.


바로 이것이 이 게임에 빠지게 된 이유다.


회사와는 전혀 다른 세상. 뼈 빠지게 노동하지 않아도 공짜로 돈이 생기는 세계. 자금이 떨어질 염려 없으니 게임 초보자였던 중기는 마음 놓고 게임을 즐기면 된다. 흔히들 말하는 현질(현금으로 아이템 구매)은 필요 없다. 현실에서는 만져볼 수도 없는 막대한 자금을 축적하는데. 마치 신이 된 것처럼.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돈을 찍어댈 수 있는 시스템. 조금 과장해서 돈이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카타르시스가 느껴졌다. 게임도 재미있었지만, 돈이 늘어나는 묘미가 마약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프로가 아니었기에 치트키를 써서라도 상대방을 이기고 싶은 마음이 앞섰고 더욱이 컴퓨터 따위에는 지고 싶지 않아 웬만하면 치트키를 이용했다. 현실에서도 돈이 떨어지면 'show me the money'를 외치고 싶었을 만큼. 말만 하면 누군가가 돈 가방을 툭 던져 놓는다면 그보다 좋은 일은 없을 텐데. 그 게임에 한참 몰두했던 시기에 누구나 한 번쯤은 이런 헛된 공상을 하지 않았을까.




이제 현실에서도 게임이 시작됐다. 안타깝지만 이 게임은 속임수가 통하지 않는다. 중기가 가진 돈으로 집을 찾아야 하는 어려운 게임이 예상된다. 중기는 자신이 고른 캐릭터 이름에 '중기'를 적었다. 딱히 기발한 아이디가 떠오르지 않아 그냥 실명을 사용하는 고리타분한 아저씨다. 이 게임에서 중기는 레벨 1을 겨우 뛰어넘었다. 레벨 2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마지막 무대가 남아있다. 레벨 1은 첫 번째 집(신혼집) 계약서를 작성하는 순간 이미 도달했다. 2002년 그의 이름으로 도장이 찍힌 전세 계약서는 이 게임에 로그인해서 첫 번째 미션에서 얻은 아이템이었다. 이제 중기 캐릭터는 복덕방 방문한 횟수 30회를 넘긴 상태. 다음 단계로 진입하기 위해서 저예산으로 좋은 집 찾기 미션이 주어졌다. 이 단계의 가장 힘든 점은 지구력과 인내력 그리고 초라함을 견디는 탄탄한 내구성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하늘에서 돈이 떨어지지 않는 이상(스타크래프트 치트키 같은) 캐릭터의 강인한 체력만이 이 난관을 헤쳐나갈 유일한 희망이다. 다행스러운 건 현재 '발품' 레벨 게이지는 녹색을 나타내고 있다. 하지만 앞으로 적어도 복덕방 방문 오십 회 이상을 견뎌내려면 초강력 스팀팩(기력 회복 아이템)이 필요할지도.



기어코 올 것이 왔다. 계약 기간 만료 경고 메시지가 떴다. 전혀 반갑지 않은 알림이다. 이내 스트레스 게이지에도 빨간 불이 깜빡인다. 이천만 원을(당시 보증금의 반) 올려주고 지금 집에 이 년 머무를지 다른 집을 구해야 할지 선택하라는 알림이다. 중기 현재 레벨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어려운 미션이다. 아이템 창고에서 쓸모 있는 카드가 있는지 찾아본다.


'협상' 카드가 보인다.


주인집 마스터에게 어려운 사정을 얘기해보지만 어림 반푼 어치도 없는 소리다. 이 집을 원하는 다른 캐릭터들이 줄 서서 대기할 정도로 수요가 공급을 한참 넘어섰다는 답변만 돌아온다. 아무래도 이번 무대는 협상의 여지가 없어 보인다. 주인집 늙은 살쾡이 마스터는 단호하다. 삼일의 여유 시간을 줄 테니 생각해보라고 선심 쓰듯 말한다. 칠십이 시간 아무리 머리를 싸매고 궁리를 해봐야 그 많은 돈을 마련할 구멍이 보이지 않는다. 이럴 때 치트키는 정말 간절하다. 그러나 이 게임에서는 그럴 수 없으니 속만 타들어 간다. 중기는 마스터의 배를 채워줄 돈을 마련할 수 있다 하더라도 더는 이 집에서 머무르고 싶은 생각은 없다. 벽지를 시커멓게 먹어가는 곰팡이와 싸우기도 싫고, 결혼 예물도 남김없이 가져간 불한당 무리도 싫고, 날씨 좋은 오후 집안으로 스며드는 햇볕도 그립고, 인정머리 없는 고약한 주인집 마스터는 더 싫어서다. 이 구역을 떠나야 할 이유는 차고 넘치는데 불행히도 이번 미션은 난이도가 높다.


방 두 개에 화장실 하나 거실 하나가 있는 집을 찾아야 한다.


깨끗하고 곰팡이가 없는 집. 바퀴벌레의 기름진 등껍질과 징그러운 더듬이가 보이지 않는 집. 중기가 가진 예산으로 복덕방 문을 힘차게 두드릴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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