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화
"고객님, 곰팡이 없는 집은 천만 원이 추가됩니다."
"고객님, 바퀴벌레가 없는 집은 오백만 원이 추가됩니다."
"고객님, 햇볕 잘 드는 남향을 원하시면 오백만 원 추가입니다."
"고객님! 고객님!"
"아, 그리고.... 방 두 개에 거실이면 또 천만 원이 올라가네요. 어떤 집을 찾으세요?"
"아! 반지하는 천만 원이 빠지네요."
"신축도 있는데.... 그것도 보시려나?"
복덕방 아줌마의 싸늘한 눈초리가 느껴졌다.
'당신들은 신축엔 못 들어가. 그러니까 고생하지 말고 그 돈이면 반지하야!'
아줌마 눈은 그렇게 사인을 보내왔다. 중기의 초라한 행색에서 그런 낌새를 챘을까. 전문가 눈에는 이 사람이 얼마짜리 집을 구하는지 다 알고 있다는 듯했다. 속사포같이 쏟아진 말 중 바퀴벌레 따위가 인간 세상에서 오백만 원으로 계산됐다. 돈 오백을 더 쓰고서라도 징그러운 벌레를 피할 것이냐, 고민이 시작됐다. 살면서 가장 무섭고 혐오스러운 생물이 바퀴벌레였다. 자다가 얼굴이 간지러워 눈을 떠보면 바퀴벌레가 그의 얼굴을 핥고 있는 경험은 이미 오래전부터 겪었던 일이라. 이보다 소름이 끼치고 치가 떨리는 경험은 중기 인생에 아직까지 없을 정도였으므로. 중기도 이런데 조그만 벌레도 무서워하는 그의 아내는 더 심하면 심했지 나을 리 없다. 이 모든 옵션 중 하나라도 빼고 싶지 않지만, 현실은 무언가 하나를 포기해야 한다. 적당한 선에서 타협을 봐야 한다. 다만 그 상대가 중기 자신과 그의 아내라는 사실. 그들이 가진 돈으로는 좋은 조건을 다 가질 수 없다. 바퀴벌레를 피하는 대신 곰팡이를 선택해야 하거나 햇볕을 포기하고 오백만 원을 아낄 것이냐를 따지는 조건. 최선이 아닌 차악을 고르는 문제였다.
아무래도 중기 캐릭터의 레벨업은 어려워 보인다. 매일매일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며 복덕방 유리창만 바라본다. 유리창 전체를 뒤덮은 A4 용지에는 다음과 같이 쓰여있다. 월세, 전세 문구는 빨간색. 가격표는 검은 매직으로 굵게 쓰여있다. 그 숫자가 눈에 들어왔을 때 머릿속은 '치트키'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치트기를 써야만 이번 스테이지를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show me the money, show me the money'
가슴속으로 몇 번이고 외쳐보지만 소용없는 일이다. 방 두 개, 화장실 한 개. 이 미션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로또 당첨 행운이라도 잡아야 하는 상황. (이때만 해도 우리나라에 로또가 발행되기 전이다). 이 난관을 돌파할 아이템이 중기에게는 없다. 현실은 스타크래프트의 'show me the money'가 실현되는 망상은 이루어지지 않는다.
중기는 다시 다른 동네로 발길을 돌린다. 발품 게이지 칸도 어느새 반쯤 줄어들었다. 발걸음은 점점 무거워지고 속도는 떨어진다. 빨리 뛰고 싶지만 '방 두 개 거실 하나' 아래에 붙어있는 가격표는 중기 캐릭터가 자꾸만 지치고 헐떡거리게 만든다. 중기는 게임을 하다 어려운 스테이지가 나오면 바로 포기하곤 했다. 따라서 게임의 끝을 본 기억이 없었다. 그러나 이 게임은 포기할 수 없다. 일반적인 게임은 로그아웃하고 나오면 그만이지만, 여기엔 로그아웃 버튼이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다. 무조건 임무를 완수해야 하는 자비가 없는 세상이다. 미국 프로레슬링 WWE에서 열리는 이벤트 중 'NO MERCY'라는 슬로건을 본 적이 있다. 홍보 영상을 보면 그야말로 무자비하게 상대방을 두들겨 패주겠다는 의미로 해석된다. 강력한 파워를 자랑하는 챔피언의 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광기(狂氣). 그 난폭한 기운이 복덕방 유리창에 붙은 전세 가격표에서 느껴진다. 챔피언이 도전자를 무참히 짓밟아버리듯 전단에 쓰인 동그라미들의 행렬은 중기 가슴에 자비 없이 강력한 펀치를 날린다.
앞으로 미션을 완수해야 할 시간은 얼마 남지 않았다. 이제부터는 지구력 싸움이다. 일주일 안에 새집 찾기 미션을 끝내지 않으면 곤란한 상황에 빠진다. 매일 저녁 회사 업무가 끝나는 대로 다음 타깃이 있는 동네로 향했다. 저녁 먹을 시간도 없이 조금 더 저렴한 집을 찾아 복덕방 주인 뒤를 따라다닌다. 가진 돈에 맞추려다 보니 새집을 보면 볼수록 허탈감만 밀려온다. 그래도 어딘가에는 딱 맞는 집이 있을 거라는 일말의 기대를 걸어보지만, 예산에 맞는 집들은 죄다 문제투성이라 숨이 턱 막혀온다. 중기의 예산으로 가질 수 있는 아이템(전세)은 이런저런 문제를 안고 있다. 사람들이 공통으로 싫어할 만한 요소는 전부 포함한 집.
지친다. 지쳐간다.
머릿속은 카운터 펀치를 맞은 것처럼 너덜너덜해졌다. 머리는 힘들다고 아우성쳐도 밥 달라고 꼬르륵 소리를 내며 요동치는 뱃속은 배고픔이 먼저다. 이런 고단한 뇌의 사정은 봐주지도 않고 제 말만 하는 위(胃)가 한편으로는 얄밉기까지 하다. 발품의 게이지도 이젠 거의 바닥을 보인다.
지구력에 빨간 불이 켜지려고 할 때, 마침내 이 미션을 끝낼 수 있는 집을 찾았다. 신축, 삼층, 방 두 개, 거실 겸 부엌 하나. 최적의 조건을 다 갖춘 집이다. 대낮에 형광등을 켜지 않아도 좋은 집. 체력과 지구력은 이미 다 떨어져 눈은 퀭하고 입은 말랐다. 더는 움직일 여력도 남아 있지 않았다. 중기는 막힌 숨이 터진 것처럼 크게 안도의 숨을 내쉬며 말했다.
'하아아... 천만다행이다. 치트키 없이도 미션을 끝낼 수 있다니.'
어느새 짠 내 나는 물기가 눈가를 촉촉이 적셨다.
한데.... 한 가지 문제가 발목을 잡았다. 보증금이 싼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는 법.
건물주의 근저당이 심각한 수준이었다. 즉, 은행 빚으로 무리하게 투기한 결과물이었다. 자칫하다가는 보증금까지 날아갈지 모르는 위험을 안고 들어가느냐? 다시 다른 집을 찾아 떠나느냐? 갈림길에 섰다. 위험요소가 있는 만큼 싼 거라는 복덕방 주인의 말은 너무도 당당했다. 자기 몸도 상할지 모르는 양날의 검을 쥐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이쯤 되면 복덕방 사람들이 입버릇처럼 하는 말이 있다.
"지금 계약 안 하면, 내일이면 이 집 없어요."
부동산 업자의 뻔한 상술에 중기는 초조해졌다. 곧바로 쐐기를 박는 업자의 또 다른 기술이 훅 들이닥친다.
"조금 이따가 다른 손님도 이 집 보러 온다고 했어요. 그러니까 빨리 계약하시는 게 좋을 거예요."
집을 구하는 쪽에서는 이런 말에 마음이 심하게 요동친다. 위험을 무릅쓰고 불구덩이에 뛰어들어야 하는가? 내일이면 없어진다는 데. 힘겨운 갈등이 시작된다. 결국, 복덕방 주인의 한 마디가 승부를 판가름냈다. 중기에게는 언제 닥칠지 모를 불확실한 위험보다는 현재 삶의 질이 중요했다. 곰팡이 없는 집, 바퀴벌레로 닭살 돋지 않는 집, 깨끗한 집, 햇볕 드는 집이 그러했다. 이런 집을 구할 수만 있다면 어느 정도 위험 요소쯤은 감내할 마음이 컸다. 무엇보다 신혼집이 갖추지 못한 요소가 많았기에. 2004년 가을 어느 날, 배고픈 저녁, 뒷일은 생각지도 않고 중기는 이 단계 레벨업 미션을 완료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