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양이 같은 딸과의 데이트
소소한 울림에 반응할 줄 알고, 작은 감정도 스스로 존중하는
그녀는 토실토실 동글한 랙돌 고양이 같다. 귀여운 자태는 지나가는 동네 어른들의 시선을 사로잡고, 방긋 웃는 미소는 그녀를 본 모든 사람들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랙돌 고양이스러운 자신의 매력을 알기라도 하듯, 그녀는 내 품에 순순히 안긴 적이 없고, 어떠한 나의 제안도 한 번에 받아들인 적이 없다. 내가 먼저 부를 때는 관심도 없는 척하다 자신이 필요할 때는 늘 살갑게 다가와서 나긋나긋한 말투로 애교를 부린다. 미워할 수도 사랑하지 않을 수도 없는 그녀에게 끌려다니는 듯 한 기분은 늘 낯설기만 하다.
6살 아이의 키높이에 맞춰 무릎을 꿇고서 두 팔을 활짝 벌려 그녀의 이름을 부른다.
"혜민아~"
"흥! 아빠 싫어!"
나와 눈이 마주치자 고개를 획 돌리고는 엄마에게 달려가 버린다. 종종 있는 일이지만 늘 새롭게 실망스럽다. 따스한 포옹과 함께 '사랑해'란 말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외출을 했다가 집으로 들어오는 시간은 우리 부녀의 관계를 확인하는 시간이다. 못 이기는 척 슬쩍 안겨오는 것은 평범한 것이고, 선물이나 먹을 것을 사 오는 날처럼 열열하게 안아주는 때도 있다. 그리고 오늘 같이 서운한 감정이 쌓여 있는 날에는 반응이 랙돌 고양이의 파란 눈처럼 차갑다. 이세돌 9단이 대국 후에 복기하듯이 나도 며칠 사이에 있었던 딸과의 관계를 하나하나 복기해 보았다. 어제 오후 까지만 해도 괜찮았는데. 분명 어제저녁에 있었던 일이 문제였을 것이다.
"아빠, 내가 그린 그림 봤어?"
"어, 그거 쓰레기인 줄 알고 버렸는데"
어제저녁 아들 녀석과 보드게임하느라 딸아이의 중요한 질문에 무심하게 대답한 일이 기억이 났다. '본 것 같은데 생각이 안 나네'라고 둘러댈 걸 그랬나. '정말 쓰레기인 줄 알았어'라고 변명을 했어야 했나. 아빠의 무심한 대답도 속상했겠지만 정말 실망스러운 것은 자신이 소중하게 그린 그림을 아빠가 버렸다는 사실일 것이다. 실망하는 딸아이의 표정이 떠오르면서 뒤늦게 후회와 미안함이 물컹 스며 나온다. 그러다 갑자기 입 밖으로 신음 소리가 튀어나왔다. '으앗!' 불현듯 미안한 일이 하나 더 생각났기 때문이다. 오빠랑만 노는 것이 질투라도 나는 듯, 내 무릎에 올라앉아 보드게임을 방해하는 딸아이에게 "금방 끝나. 옆으로 좀 가있어'라고 말하며 밀쳐 냈던 것이다. 아~ 다시 생각해도 나는 나쁜 아빠다.
늦은 밤 잠옷 바람으로 1층에 내려가서 쓰레기봉투 속 딸아이의 그림을 찾았다. 그리고 구겨진 곳을 다리미로 반듯하게 다려서 거실 유리창 잘 보이는 곳에 테이프로 붙여 두었다. 다음날 아침잠에서 깬 딸아이가 나에게 물었다.
"아빠, 이거 왜 여기에 붙여 놨어?"
"혜민이가 너무 예쁘게 잘 그려서 아빠가 붙여 놓았지. 혜민이가 그린 그림인데 아빠가 모르고 버렸지 뭐야. 정말 미안해."
딸아이가 슬며시 나를 안아준다. 따뜻하다. 안도의 미소가 흘러나왔다.
"혜민아 요즘 아빠가 오빠랑만 놀아서 서운했지? 오늘 아빠랑 둘이서 놀러 갈까? 혜민이가 제일가고 싶은 데가 어디야?"
"놀이동산"
"그래 오늘 우리 둘이서 놀이동산 가서 데이트 하자"
딸아이가 어른이 되어서 '난 부모님의 사랑을 충분히 받고 자랐어'라고 이야기할 수 있을지 생각해 보았다. 쉽지 않을 것 같다. 그렇다고 너무 좌절할 필요는 없다. 세상 어디에도 완벽한 부모는 없으니까. 다만 어른이 되어서 자신의 소소한 마음의 울림에 반응할 줄 알고, 작은 감정도 스스로 존중하는 건강한 사람이 되길 바라며, 아빠로서 조금만 더 섬세하게 관심 가시고 존중하기로 다짐해 본다. 늘 어디서나 랙돌 고양이 같이 사랑스럽고 따스한 존재로 환영받길 기대하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