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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지명 Dec 03. 2019

네 잘못이 아니야. 절대…

내 안에 소중한 것들을 찾아내고 다시 달려갈 수 있게 지지해줘

"절대 선배 잘못이 아니에요. 그 사람들이 비정상이에요"

"다른 생각하지 말고 선배 본인만 생각하세요."     


글썽이며 말하는 후배의 눈을 보니 시야가 흐려졌다. 12년 8개월 동안 지각 한 번 없이 다니던 회사에서 도망치듯이 몇몇 물건들만 챙겨서 다급하게 나왔다. 나를 챙겨주던 후배와의 조촐한 대화 만이 송별의 허전함을 달래주었다. 누군가 우리의 심각한 대화 장면을 본다면, 해고된 노조원의 마지막 인사 장면으로 오해하겠지만,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일 필요 없다. 나는 그저 노동법에 보장된 육아휴직을 사용할 뿐이다. 다만, 이를 받아들이는 사람들과 나의 심정이 퇴사와 비슷할 뿐.


사실 한 번도 내 잘못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었는데, 후배의 말에 왜 눈물이 핑 돌았을까? 지난 2개월간 불합리한 조직의 문제점을 공론화하고 개선방안을 찾으려고 노력했다. 하지만 회사는 조직의 문제점을 찾는 것은 건성으로 하고, 오직 개인의 적응력 부재에만 집중했다. '갑작스러운 조직개편, 기약 없는 근무시간, 지속되는 업무분장 갈등, 편중된 권력, 등' 회사는 어느 것도 특별한 문제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뭐가 문제인데? 뭐가 힘들다는 거야? 너희가 나약해서 그런 거야’ 이런 이야기들로만 귀결되었다. 나는 '밀레니얼 세대가 주도하는 요즘 세상에 이런 조직은 있을 수 없다'며 회사의 불합리함을 주장했고, 회사는 '모든 조직들이 비슷한 상황에서도 최선의 결과를 내고 있다'며 구성원의 적응력 부재를 주장했다. 끝없는 귀책의 힘겨루기가 이어졌고, 변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다만, 굳건하게 버텨서 회사를 변화시키겠다는 나의 의지에는 점점 균열이 왔고, 뜨거운 이상과 차가운 현실과의 괴리만큼의 공간에는 절망이 채워졌다. 지속되는 야근과 긴장에 속에서 쉽사리 회복되지 못할 만큼 지쳐있었고, 출근 시간의 우울감과 퇴근시간의 허탈감은 더 이상 뿌리 칠 수 없는 일상이 되었다. 맑은 정신으로 일에 집중할 수 있는 시간은 점점 줄어들어, 퇴근 때 치워야 할 책상 위에 빈 커피잔들은 늘어만 갔다. 많은 것이 무겁고, 모든 것이 버거웠다.


그런 이유로 나는 우리 본부 남자 직원 중 처음으로 육아휴직을 결심했다. 포기하지 않는 끈기가 필요하다고들 하지만, 때로는 그만두는 용기가 필요할 때도 있었다. 절대 그만둘 수 없는 일은 없다. 쉼 없이 달리는 중에도 내가 어디로 가는지 모르겠다면 잠시 멈추는 것도 방법이다. 넉넉한 경제력, 경쟁력 있는 커리어, 희망적인 비전이 있어서 이런 결심을 한 것은 아니다. 모든 현실들이 녹녹지 않더라도 지금은 멈춰야 하는 때라고 생각했다.


눈물을 숨기느라 대답하지 못했던 후배에게 이제는 이야기하고 싶다.  


"몸이 상하고 마음이 고갈되어 신념을 지킬 수 없다면 그만 멈춰야 한다고 생각해. 스스로를 파괴할 만큼 나를 부축하고 있던 있던, 경제적 안정과 사회적 인정 같은 과도한 갈망도 다시 돌아보고 싶어. 그간 미끄러지거나 뒤처지지 않으려고 오랫동안 긴장했고 그래서 많이 지쳤나 봐. 지금 멈추지 않으면 이 쳇바퀴에서 벗어 날 수 없을 것 같아.


내 안에 소중한 것들을 찾아내고 다시 달려갈 수 있게 지지해줘. 그 길이 무엇인지 지금은 전혀 보이지 않지만, 사소하지만 소중한 것들을 하나씩 실천해간다면 삶의 선명함이 나타날 것이라고 믿어. 무엇보다도 먼저 웃음을 찾고 싶어. 주위에 소중한 사람들에게 미소 지을 수 있는 최소한의 근육을 다시 살리고 싶어.


그리고 미안해. 힘든 시간들 속에서 혼자만 도망쳐와서. 같이 고민하지 못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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