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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맨 Mar 20. 2023

고객님, 마중물이라는 이름은 저희가 붙이겠습니다

마중물이라는 미명으로 단가를 후려치는 고객과는 일하지 않겠다는 선언

"을의 일이라는 게 꼭 시장에서 콩나물 파는 것 같아요. 자꾸 덤으로 뭔가를 더 줘야 돼요."


  몇 해 전 함께 1인창조기업 마케팅 지원사업의 수행기관으로 활동했던 대표가 우스갯소리로 했던 말이다. 디자인물을 납품하기로 계약하면, 꼭 대금을 치르기 전에 덤으로 무언가를 요구하는 클라이언트들이 있다고 했다. 로고디자인만 의뢰를 받았는데 명함을 디자인하고 제작해 달라는 요구는 이미 너무 흔했다. 계약 전에 협의를 했으면 충분히 가능했을 일인데 잔금을 치르기 전에 요구를 하면 거절할 수가 없다. 같은 돈을 받고 일을 하지만 기분은 다르다. 전자는 (사실상) 강요이고, 후자는 협의다. 을의 일이란 그렇다. 강요를 기꺼이 감내해야만 하는 것.


"기획이 부족한데요."


  영상 제작을 업무 분야로 두면서 종종 듣는 클라이언트의 피드백이다. 예산의 제약이 있다는 클라이언트의 요구로 견적을 일부 수정한 경우가 대체로 이에 해당한다. 보통 사전 제작단계에 있는 '기획' 비용을 삭제하고, 본인들이 직접 영상을 기획하겠다고 하는 경우다. 유튜브가 전 국민이 사랑하는 플랫폼이 되었기에 가능한 일이다. 기업 또는 제품, 서비스를 소개하고 알리는 영상을 '유튜브 콘텐츠'의 관점으로 기획하겠다는 제안이 역으로 놀랍고 참신하게 느껴질 때가 있다. 본업도 바쁘신 분들은 대체로 기획안을 전달하는 시간으로 계약기간을 전부 쓰시기도 한다. 부랴부랴 계약을 연장하고 촉박한 납기일에 맞춰 장면을 구성하고, 촬영하며 편집을 하고 납품을 한다. 빨리빨리, 시간이 급해서라는 갑의 앓는 소리에는 이미 면역이 된 지 오래다. 빠른 시간 안에 납품이 된 것은 오직 본인의 기획력 덕분이라고 생각한다. 그간 메일로 주고받았던 각자의 피드백은 잊은 것 같다. 기획이 부족하다는 게 결국 본인이 작성한 기획안에게 하는 말이라는 것은 진작에 잊으신 것 같으니 물어서 무엇하리. 사실 우리가 기획하지 않은 결과물은 우리 포트폴리오라고 어디에서 자랑하지도 못한다. 촬영과 편집을 위한 도구로 소모된 것은 우리가 창작한 것이 아니니까.


  덤을 요구 받든, 촬영과 편집만 하는 도구로 기능하게 되든 모든 문제는 결국 예산 때문이다. 제한된 예산에서 어떻게든 업무를 추진하고 성과를 내야 하는 담당자들은 을을 쪼는 것이 '일 잘하는 것'으로 여기기 때문이다. 사실 주어진 예산에서 어떻게든 효과를 내고 효율적으로 일하는 것은 을의 숙명이다. 하지만 단순 계산하더라도 최저입금보다 못한 과한 요구는 이제 거절을 해야 한다. 그런 제안을 당연한 것으로 여기는 문화도 개선되어야 하고.



'저희랑 거래하는 마중물이라고 생각하시고, 이번에는 이 정도로 맞춰주시면 어떨까요?'


  10년 전 창업을 했을 때는 이 말에 눈이 반짝였다. 계약서에 도장조차 찍지 못하고 우리의 포트폴리오라고 소개할 수 없던 일들만 하던 때의 일이다. 계약서에 도장이라도 찍을 수 있는 '을'이라면 차라리 나았을 거다. 당시의 나와 우리 회사는 '병' 또는 '정'의 일을 했다. 계약서라고는 오직 입에서 입으로만 전해지는 구두계약만이 전부였다. 다음에 또 오시면 정성을 다해 모시겠다던 선의들은 무참히 짓밟혔다. 마중물이라는 단어에 노이로제가 생겼던 것도 이때부터다.


  창업한지 6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을의 일을 하게 되었다. 10년차인 지금은 입으로 쓰는 계약서보다 인감도장을 날인하는 계약서가 더 많아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덤을 요구하고, 마중물을 볼모로 하는 클라이언트들을 만나곤 한다. 이제는 정중하게 이야기한다. 마중물이라는 이름은 저희가 붙이겠습니다라고. 마중은 나가는 것이지 오는 것이 아니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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