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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맨 May 16. 2023

30년 만에 게임기가 없는 집에서 살게 됐다

좋소기업 대표가 취미와 작별하기

  "82만 9천 원입니다. 기기는 테스트해 보고 이상 없으면 입금해 드릴게요."


  가지고 있던 비디오게임 기기를 매각했다. 책상에 남은 하나의 마지막 게임기도 곧 새로운 주인이 생길 예정이다. 30년 만에 게임기가 없는 집에서 살게 됐다. 학창 시절에는 용돈을 모아서 게임기를 집에 들였고, 대학생 시절에는 장학금을 모아 게임기를 집에 들였다. 새로운 세대로 기기가 업그레이드된다는 소문이 들리면 돈을 모으기 시작했다. 마치 더 넓은 집으로 이사 가기 위해 일을 하고 돈을 모으는 어른들처럼.


  게임은 닿을 수 없는 시공간을 체험할 수 있는 효과적이고 효율적인 여행 도구였다. 게임 속 나는 람보가 되어 총을 쏘거나, 사무라이가 되어 요괴들을 무찔렀다. 중세시대 돌연변이 전사가 되어 세계를 구하기도 했으며, 스포츠 스타가 되기도 했다. 게임 속의 나는 영웅이었고, 방랑자였으며 때로는 무법자였다. 그래서였을까? 초등학교 6학년 즈음, 아버지는 귀한 닌텐도를 친히 때려 부수시며(?) 아들을 현실로 인도하기도 하셨다.


  30년 간의 동거였다. 모두 코로나 시국에 전 세계적으로 품귀현상이 일어났을 때 집에 들였던 게임기들이었다. 그래서 더 애착했다. 마침 세계를 덮친 전염병의 종식 선언이 며칠 전 있었고, 나는 함께했던 게임기들과 작별하기로 했다. 이혼과도 같은 이 행위는 어쩌면 앞으로 평생 게임기가 없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선언과도 같다. 언젠가는 아이가 자라면 함께 게임을 하겠다던 호기롭던 아빠의 욕심(또는 소망)을 포기하는 것과도 같았음은 물론이다.


안녕, 나의 동거인들


  게임에 중독되면 일상에 영향을 끼친다는 판에 박힌 소리 때문에 결정한 건 아니다. 경기가 어렵다고 한다. 앞으로 2년 간은 되도록 일을 벌이지 말라는 우스갯소리도 들린다. 남일 같지 않다.


  헤어질 결심은 지난 주말에 했다. 워킹데드를 보다가 좀비를 때려잡고 싶다는 마음이 들어 게임기 전원을 켰다. 1시간쯤 게임을 하다가 스테이지를 넘어가는데, 로딩이 걸렸다. 암전이 된 TV 액정에 내 모습이 비쳤다. 이러고 있을 때인가? 혼자 읊조렸다. 생각만 했던 말이 입에서 새어 나와서 놀랐다. 책상에는 구매만 해 둔 책들이 어지럽게 흩어져있었다.


  게임을 끄고 베란다에서 박스를 꺼내 게임기를 정리하기 시작했다. 게임팩과 CD들이 있던 책상 자리에는 책들을 정리해 꽂았다. TV 주변에 공간이 생겼고, 멀티탭이 여유로워졌다. 스피커 자리를 옮겼고 턴테이블을 다시 TV 옆으로 옮기기로 했다. 뒤죽박죽이 된 책꽂이를 바라보며 정리할 책들을 눈으로 훑었다. 이번 주말에는 이 책들을 싸들고 중고서점에 가기로 했다. 




  거래처에서 정부지원사업에 컨소시엄을 만들기 위해 회사이력을 적어 달라는 요청이 왔다. 대표자의 이력을 적는 칸이 있었다. 일을 시작한 건 10년, 창업을 한 건 9년 차였다. 지금까지 잘 버텼다는 쓴웃음이 나왔다. 하지만 또 버텨야 한다. 어떤 작가가 쓴 에세이의 제목이 생각났다. 버티는 삶에 관하여. 


  30년 만에 게임기가 없는 집에서 살게 되면서 하나의 취미를 버렸다. 하지만 요즘 새로운 취미가 생겼다. 걷기. 누군가는 걷는 게 취미가 될 수 있느냐고 묻겠지만, 하루에 2시간 이상 온전히 걷기만 하고 매일 8 천보에서 1만보를 걷는다고 답하면 표정이 달라진다. 사실은 달리고 싶어서, 달리기 위해서 걷기 시작했다. 이제 해가 지면 제법 선선하니 달리기 좋은 계절이 되었다. 몸도 적응했을 테니, 이제는 걷기와 달리기를 적당하게 섞을 수 있겠다.


  게임의 목적이 경험의 확장이었다면, 걷기와 달리기는 생존을 위함이다. 여하튼 지금은 생존이 중요하다. 오죽하면 요즘은 스타트업의 혹한기 극복을 위한 기금 조성 캠페인까지 한다고 하니까.


  버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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