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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맨 Apr 28. 2023

사랑받고 있음에도 죽음을 결심했다

'저는 나아질 수 없어요'라며 고백하던 사람에 관해

  사업을 시작한 이후 멘토링, 강의 요청을 종종 받는다. 3-4년 전에는 진로에 관한 청소년 대상 멘토링이 주였고, 1-2년 전에는 성인 대상 퍼스널브랜딩에 관한 강의가 주였다. 최근에는 영상 제작 관련 동아리 멘토링, 강의 요청이 주를 이룬다. 연령, 성별도 가늠할 수 없다.


  청소년들을 대상으로 하는 강의는 유독 신경 쓸 것이 많다. 강의를 주관하는 담당자들의 푸념과는 달리 요즘 학생들(?)이 영리하고 지혜롭기 때문이다. 특히 원데이클래스의 경우는 신경 써야 하는 일이 더 많다. 주로 3시간 남짓 짧은 시간이 주어진다. 원데이클래스에서는 주로 영상을 기획하고, 구성하는 방법에 관해 강의한다. 기획을 위해서는 자신의 문제의식을 발굴하라고 말한다. 지금 가지고 있는 고민을 '말이나 글이나 아니라, '굳이' 비주얼로 보여줄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인가요?'라고 묻는다. 질문이 조금 어려울 수 있지만, 요즘 청소년들 영리하다. 가끔은 상상할 수 없는 답변을 내놓기도 한다.


  "우울증에 관해 써도 되나요?"

  "그럼요, 물론입니다."


  장래희망, 좋아하는 아이돌이나 자신이 상상하는 판타지적인 세계관을 써보고 싶다는 다른 학생들과는 조금 달랐던 학생의 답변이었다. 어떠한 물음에도 답하지 않고 굳은 표정을 짓던 학생의 표정은 그제야 비로소 누그러졌다. 그는 빈 종이를 깨알 같은 글씨로 채워가기 시작했다.


  "제가 잠깐 봐도 될까요?"

  "네."


우울증을 나아지지 않는 나를 돌봐주는 가족, 이유 없이 사랑해 주는 친구들
내 주변 사람들은 참 힘들겠구나, 지치겠구나
주변인들이 주는 사랑에 보답할 수 없어 다시 우울 속으로 잠식하는 나


  날카로운 글씨체로 쓰인 서늘한 문장에는 슬픔이 서려있었다. 학생을 다시 바라보았다. 병원에 다녀와야 해서 조퇴를 해야 한다는 그의 팔에는 상처가 가득했다. 아마 주변인들의 마음에 보답할 수 없다는 슬픔 또는 좌절로 자신을 탓하며 쌓은 흔적이라고 생각했다. 책상 앞에 쪼그려 앉아 학생에게 물었다.


  "등장인물은 무엇 때문에 힘든가요? 사람들의 마음에 보답할 수 없다는 미안함 때문인가요? 자신은 나아질 수 없다는 자책감 때문인가요?"

  "둘 다요."

  "그렇구나. 등장인물의 감정을 제가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하지만, 저는 사람들에게 배신을 당할 때 종종 마음이 아프고, 우울하다고 느끼거든요. 이유 없이 상대를 미워하기도 해요. 그런데 이 인물은 미안해하네요? 이 인물에게 주변인들이 무언가를 강요하고 있지는 않나요?"

  "이 사람은 깜깜한 곳에 혼자 있고 싶어 해요. 그런데 자꾸 사람들이 불을 들고 와요. 여긴 너무 어둡다며, 자꾸 빛을 밝혀요. 그게 싫어요."

  "밝고 어두움은 옳고 그름의 문제는 아니니까, 밝은 게 옳다는 사람들의 주장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려요. 이런 상상은 어때요? 깜깜한 어둠이 당연한 세상, 그런 세상에서는 빛을 밝히는 사람이 오히려 이상한 사람(?)으로 취급받지 않을까요?"

  이어서 말했다.


  "저는 이 인물이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이 궁금해요. 아마 제가 이 인물의 감정을 완전히 이해할 수는 없을 거예요. 하지만 짐작은 해볼게요. 저도 가끔 그럴 때가 있거든요. 깜깜한 방에 혼자 있고 싶을 때. 궁금해요. 이 인물이 느끼는 마음을 제가 볼 수 있게 그려줄 수 있어요?"

  학생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두 개의 욕조를 그린 그가 설명을 이어갔다.


  "차가운 욕조에 몸을 담그고 있어요. 옆에는 김이 모락모락 나는 따뜻한 욕조가 하나 더 있어요. 차가운 욕조에서 나온 인물은 용기를 내 따뜻한 욕조에 들어가요. 김이 나던 욕조는 조금씩 차가워지고, 살얼음이 끼기 시작해요. 따뜻한 물마저 차갑게 만들어버린 자신을 탓하며, 인물은 차가운 욕조에서 조용히 눈물을 흘려요."


  주변의 공기, 심지어 욕조 속 물마저 차갑게 만드는 것이 괴롭다는 그에게 무엇이 필요할까? 어줍지 않은 위로나 힘을 내라는 격려를 건네는 것은 오만이었다.


  "기분이나 마음에는 옳고 그름, 선과 악이 없다고 생각해요. 누구든 그 사이에서 아슬아슬하게 균형을 맞추기 마련이거든요. 남들처럼 생각하지 못하고, 느끼지 못하는 걸 부족한 것으로 치부할 수 있어요. 하지만 내가 조금 더 예민하고 민감하기 때문에 나는 세상을 조금 더 섬세하게 감각한다고 생각할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저를 믿어주는 편이에요. 지금 느끼는 이 마음과 감정들을 잘 '활용'할 수 있기를 바라요."


  쉬는 시간이 되자 병원에 가야 할 시간이라며 학생은 수업 종료시간보다 조금 일찍 강의실을 떠났다. 집으로 돌아와 샤워를 하며 학생과 나누었던 대화를 곱씹었다. 수전의 방향을 틀었다. 욕실을 채우던 김이 조금씩 사라지고, 샤워기가 쏟아내는 물방울들은 조금씩 차가워지기 시작했다. 아직 버틸만했다.


  할 수 있는 것에 관해 생각한다. 그저 묻고 가만히 귀 기울여 들어주는 것, 할 수 있는 것은 그뿐이었다. 그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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