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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양맨 Apr 20. 2023

어느 날 숫자가 세상에서 사라진다면

사람들은 어떻게 만남을 약속할까

마케팅의 성과는 어떻게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는 건가요?


심사위원이 물었다. 창업을 하고 경기콘텐츠진흥원에서 운영하는 스타트업 육성기관의 입주사로 있을 때의 일이다. 입주만 하면 모든 게 끝나는 줄 알았는데, 6개월에 한 번씩 연장평가를 받아야 했다. 평가에서 떨어지면 방을 빼야 했다. 3번의 연장에 성공(?)하고 2년을 채우면 졸업기업이 되어 (마찬가지로) 방을 빼야 했다.


Online - Online 영역에서는 그로스해킹을 하고 퍼포먼스 마케팅 적용을 하기 위해 구글애널리틱스 과정을 이수하고 있으며, Online-Offline 영역에서는 입점 고객(또는 구매 고객)의 유입 경로를 파악하기 위해 클라이언트를 설득하는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운이 좋았는지 3번의 연장평가를 무사히 통과했고, 퇴출 기업이 아닌 졸업 기업으로 방을 뺄 수 있었다. 마지막 입주 기간에는 처음으로 입찰 용역을 수주했고, 지역의 다양한 기관의 업무 요청을 받을 수 있었다. 세금계산서를 발급해 달라는 클라이언트의 요청에 세무서에 가서 무지성 사업자 등록을 한 후 4년 만에 일어난 일이었다. 어쩌다 채용을 했고, 회사는 법인사업자가 되었다.


"숫자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어."

퍼포먼스 마케터에게는 죄송하지만, 브랜딩 또는 마케팅의 정량적 성과를 요구하는 클라이언트들의 요청에 숫자가 사라져 버렸으면 좋겠다는 상상을 한 적이 있다.


숫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만나게 될까? 우선 O월 O일 O시에 만나자는 약속의 말이 사라질 것이다. 내일 아침 해가  뒷 산 언덕에 걸치면 카페에서 보자는 약속을 하게 될까? 동네마다 언덕에 해가 걸치는 시각이 다르니까, 사람들은 기다리는 대상이 올 때까지 마냥 기다리게 될까? 숫자가 모든 것을 객관적이고 투명하게 만들 수는 있겠지만, 반대로 숫자가 사라지면 대상이 반드시 올 거라는 믿음으로 기다리게 될 테니까 오히려 신뢰는 높아지는 게 아닐까라는 상상을 한다.


숫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은 어떻게 사랑을 할까? 사랑을 약속을 기간을 따로 계산하지 않고 (예를 들어 언제부터 언제까지 우리가 사랑을 했다고) 사랑을 하게 될까? 시간은 어차피 흐르는데, 시간을 계산하지 않는다면 오랫동안 변함없이 사람을 대할 수 있게 될까라는 상상을 한다.


좋아서하는밴드의 <10분이 늦어 이별하는 세상>은 시계가 사라지고, 숫자가 사라진 세상에서 사람들이 만나고 사랑하는 것을 상상하는 노래다. 슬픈 노랫말이 아닌데도 슬프고, 언젠가 막연한 약속을 나눴던 사람이 있다면 그 사람이 그리워지는 노래다. 수록된 앨범 이름도 예쁘다. 우리가 계절이라면.


매주 참여하는 모임을 떠나는 사람이 생겼고, 뉴스에는 꽃다운 청춘에 목숨을 끊었다는 아티스트의 이야기가 나온다. 숫자가 없는 세상에서 이별을 기약하지 않고 오래오래 잘 지낼 수는 없을까라는 상상을 한다. 어제보다 오늘 아침의 공기가 무거운 건 어제 마신 막걸리 때문일까, 기분 때문일까.


무산소의 삶에는 유산소가 필요하다며 지인이 러닝을 권했다. 무라카미 하루키도 매일 꾸준히 달리기를 한다고 하니 뭔가 멋진 취미인 것 같다. 새벽 2시 지인에게 선물이 도착했다. <끔찍해서 오늘도 달립니다>라는 책을 선물한 지인은 '유산소가 있는 삶을 살자'라는 짧은 메시지를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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