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차는 합격했으나 2차에서 오랫동안 낙방했던
그 친구는 가보지 못한 길을 향한 미련이 항상 있었다.
나이와 상황에 떠밀려서 입사한 회사에서 관련된 업무를 하지만,
전문직에 합격한 사람들을 마주한 날에는 서글퍼했다.
인생을 책임져야 할 서른 넘은 나이와 현실의 무게 속에서
그 친구는 그렇게 아무것도 정하지 못한 채 시름시름 앓아갔다.
대리직을 단 두 번째 해,
그 친구는 윗분의 강압에 못 이겨,
원하지 않던 직종으로 이동하게 되자,
퇴직 의사를 밝혔다.
늦은 도전인 만큼, 모든 인연을 끊고,
다시 전문직에 도전할 것이라고...,
소문이 퍼지고,
뒤에서 그 나이에 재 도전은 무모하다고 비웃은 이도 있었지만,
그 친구는 개의치 않았다.
마지막 날이라고 사준,
쌀국수를 먹는 그 친구의 후련한 표정을 잊을 수가 없다.
지금 하지 않으면 후회할 것 같다면
나이와 상관없이 반드시 해야 한다는 것,
하지 않고 품기만 한다면 스스로가 썩어 문드러진다고,
그 친구는 늙어버린 나에게 도전의 씨앗을 심어 주고 떠났다.
그 친구의 결심이
내가 고민해왔던 대학원의 원서를 제출하게 했다.
어떤 분은 결혼과 육아를 생각할 나이에 그런 결정을 했냐고 핀잔을 주기도 하고,
어떤 분은 그 돈이라면 주식이나 부동산 투자를 해야지 학력이 밥 먹어 주지 않는다며,
결국 공부 많이 한 노예가 되는 것뿐이라고 내 고민을 일축하기도 했다.
내 늦은 결정에 학교 수업을 못 따라갈까 봐 걱정한 이도,
직장을 병행한다는 게 쉽지 않다고 염려한 이도 있었다.
귀가 얇은 나는 확신을 갖는 데에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나 그런 고민의 시간은 학교에 처음 간 날 모두 사라졌다.
언제부턴가 잃어버린 청춘의 계절이 캠퍼스 내에 가득하고,
희망과 환희에 찬 그들이 푸르게 물들어간다.
늘 성과만 바라던 무미건조한 숫자에서 벗어나,
나 또한 알록달록 물들어가는 것 같아서 싱그러웠다.
마치 초록색 잎사귀가 되듯,
뜨거운 열기에 광합성한다.
시험 기간이 다가올 때는 내 선택을 잠시 후회하지만,
그래도 이제는 남들보다 조금 늦게 가도 괜찮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