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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Dec 09. 2023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 우리 할머니

까만 기와집 그리고 집의 두 배쯤 큰 마당, 그 집의 나무 문을 열고 나와 내려가면 마을을 지키는 수백 년도 더 된 수호신 나무와 도랑이 있던 마을 진안군 동향면 자산리.

우리 외할머니가 살던 곳, 내 인생에서 가장 행복했고 사랑으로 충만했던 시절의 기억이 녹아있는 곳이다.


외할머니는 세상에서 나를 제일 예뻐해 주셨던 분이다. 할머니는 이미 손자가 네 명이나 있었지만 내가 할머니의 첫 번째 손녀딸이어서 유독 나를 아껴주셨다. 유치원 여름 방학만 손꼽아 기다리다 방학이 되면 할머니가 사는 동향에 놀러 갔다. 귀뚜라미가 울고 얼룩빼기 강아지 바둑이가 짖던 그 깜깜한 방에서 할머니의 젖가슴을 만지며 자는 것을 나는 좋아했다. 우리 할머니는 농사를 지어 두툼한 손바닥으로 내 얼굴을 가만 쓸어주셨다. 아직도 할머니의 쭈글쭈글한 젖가슴의 촉감이, 두툼한 손바닥의 기억이 가만 눈 감으면 느껴진다.      


할머니가 농사지으러 밭에 갈 때면 나도 따라나섰다. 밭 가장자리에서 할머니, 할아버지가 농사짓는 것을 보고 개울물 따라 흘러가는 곤충과 물벌레들과 놀았다. 어떤 날은 갑자기 대변이 마려워 한쪽에 눴는데 할머니가 풀을 베어 부드럽게 비벼 닦아주기도 하셨다. 할머니는 나를 바람 불면 깨질까 애지중지하셨다. 내가 제일 좋아했던 날은 읍내에서 열리는 장날이었다. 할머니가 농사지은 곡식을 보자기에 잔뜩 싸 들고, 하루에 몇 번 안 오는 버스를 신작로에서 기다려 타고 읍내로 나갔다. 신작로는 도로포장이 안 돼서 버스가 움직이면 풀풀 누런 흙먼지가 날렸는데 도시에서 살던 나는 그 흙먼지가 창문 사이로 날아오는 게 신기하고 좋았다. 할머니가 곡식을 팔고 돈이 생기면 꼭 읍내의 하나밖에 없는 중국집에 가서 짜장면을 사주셨다. 그때는 짜장면이 진짜 귀했다. 입가에 짜장면을 잔뜩 묻히며 먹을 때, 목 막히지 말라고 할머니가 하나씩 넣어주던 그 짭조름한 단무지가 진짜 달았다.      


그곳 시골 마을에서는 참 많은 언니, 오빠들도 사귀었다.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윗집 사는 언니랑 참 많이 놀러 다녔다. 언니는 시골에 살아서 얼굴이 참 새카맸다. 언니의 얼굴이 또렷이 기억나진 않지만, 까맣던 생기있는 피부에 칠흑 같던 생머리는 오롯이 기억난다. 언니네 집에 가서 강냉이도 먹고 고구마도 먹고 독수리 오형제 만화를 보며 놀았다. 할머니는 위험하다고 말리셨지만, 집 앞 신작로 큰길을 따라 걸으며 10분쯤 가면 큰 도랑이 나왔다. 언니가 가지고 있는 검정 고무보트를 타고 도랑에서 물놀이도 했다.      

방학이 끝나면 나는 울며불며 전주로 돌아와야 했다. 유치원에 가기 싫다고 엄마에게 생떼도 부려봤지만 통하지 않았다.      


내가 초등학교에 들어가면서 할머니는 대전으로 이사했다. 외삼촌의 직장과 결혼 문제 때문이었다. 이제 나는 대전에 가기보다 할머니가 우리 전주집에 자주 오셨었다. 아마 외삼촌이랑 같이 살던 할머니는 삼촌이 결혼해 버려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살아야 하는 외숙모를 위해 가끔 우리 집에 방학을 보내러 오신 것 같았다. 내가 유치원에 다니던 그 시절처럼.      

할머니가 전주 우리 집에 오실 때면 만 원짜리 한 장을 꼭 손에 쥐어주고. 엄마 몰래 마트에 가서 사고 싶은 걸 마음껏 사라고 하셨다.     

할머니만 오면 나는 너무 행복했다. 할머니가 쥐여준 돈 만 원으로 엄마는 평소에 사지 못하게 하는 것들을 잔뜩 사곤 했다. 라면 한 박스를 사기도 하고. 종이 인형을 사기도 했다.


그런 할머니와 조금씩 멀어진 건 내가 10대 후반이 되면서부터다. 그때부터 나는 할머니보다 H.O.T.가 더 좋았고, 친구들이 더 좋았다. 20대에 서울로 교환학생으로 오면서부터는 할머니에게 연락하는 일이 더 줄어들었다. 그러다 할머니는 집에서 쓰러져서 돌아가셨다. 할머니가 돌아가셨다고 했을 때 생각보다 눈물이 나오지 않고 덤덤했다.     


그리고 몇 년 동안 에픽하이의 우산이라는 노래를 매일 들었다. 내 인생의 큰 우산이었던 할머니. 할머니가 돌아가시고 내 어깨는 늘 젖어있던 삶이었다. 할머니가 지금까지 내 곁에 계셨다면 나는 우울증에 걸리지도 않고 유방암에도 걸리지 않았을까?     


할머니는 돌아가시고 나서 한 번도 내 꿈에 나온 적이 없다. 미신인지 모르지만, 돌아가신 분은 꿈에 안 나오는 게 좋다고 한다. 할머니는 아마 나를 걱정해서 꿈에 안 나오는 걸지도 모른다. 하지만 나는 지금도 할머니가 느껴진다.


지금도 나는 슬픈 일이 있으면 조용한 밤에 혼자 가만 내 방에 누워 할머니를 생각한다.

할머니가 가만 나를 보고 있는 거 같다. 할머니를 생각하다 잠이 들면 그 두툼했던 손바닥으로 나를 쓸어주시는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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