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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유진 Dec 10. 2023

엄마와 종이봉투, 그리고 100원

지금 우리 집은 잘사는 축에 속하지만 내가 어릴 적만 해도 가난했다. 공무원인 아빠 혼자 외벌이였고, 할머니 할아버지에게 물려받은 것도 없이 작은 단칸방에서 살림을 시작하셨다. 악착같은 엄마는 돈을 모으고 모아 살림을 늘려가는 재미에 사셨다. 


엄마랑 아빠가 생에 가장 기뻤던 날을 꼽으라고 하면 삼천동 주공아파트 분양에 당첨되셨던 일이라고 한다. 그리고 우리 엄마 아빠는 지금의 내 나이보다 딱 2살 젊었을 때 전주 택지를 분양받으셨고 2층 짜리 우리 집을 지었다. 참 열심히 살았던 엄마였다. (당시 돈이 부족해 이모에게 일부 빌렸다고 한다.)     


삼천동 주공아파트에 살 때 엄마는 아끼느라 집에서 종이봉투를 붙이는 일을 하셨다. 당시 라면 1봉지에 120원, 빵 1봉지에 100원, 버스비가 100원이었다. 

아파트에는 주기적으로 장난감 말을 데리고 오는 할아버지가 있었는데 장난감 말을 잠깐 타는데 드는 돈은 딱 100원이었는데 그 100원이 없어서 친구들이 타는 것을 보기만 한 적도 있다.     


어느 날은 엄마가 큰마음 먹고 쭈쭈바를 사 먹으라며 100원을 주셨는데, 바보 같게도 그 100원을 가게 앞에서 잃어버렸다. 그 당시 우리 집은 100원도 귀해서 종이봉투를 붙이던 엄마도 가게로 함께 와서 100원을 찾았던 기억이 아직까지 난다.     

악착같고 뭐든 아끼고 정리 정돈도 최고로 잘하는 우리 엄마는 나와 성격도 정반대다. 나는 모험, 도전을 좋아하고 상상하는 걸 좋아하지만 엄마는 늘 ‘안정’을 추구하는 성격이다.

가정주부였던 엄마는 아빠의 성화에 못 이겨 당시 상가를 분양받아 수입품 판매하는 일을 하셨는데, 보기 좋게 망해버렸다. 그 이후로 그 대출 이자를 갚아야 해서 우리 집은 더 허리띠를 졸라매야 했고 엄마는 더 예민해졌고 보수적인 분이 되셨다.     


그래서 나는 엄마와 늘 싸웠던 거 같다. 그때는 엄마의 예민함과 나에 대한 구속이 이해되지 않았다. ‘사업가’가 되고 싶었던 나와 그런 나를 반대하는 엄마. 아마 엄마는 상가 분양 대출로 이미 가세가 기울었고 우리에게 과자 하나 마음껏 사주지 못했던 게 한이 되셨기 때문에 그런 아픔을 딸들이 반복하지 않기를 바라셨던 거다.     


중학교 때는 이런 일도 있었다. 그때는 PC통신으로 채팅하는게 한창 유행이었다. 피시방도 생겨나기 시작한 때가 그즈음이다.

나는 친구들과 몰려가서 피시방에서 채팅하고 한 오빠랑 펜팔을 시작했다. 그 오빠는 나에게 직접 쓴 편지와 증명사진을 보내왔는데 엄마는 그걸 뜯어서 다 읽어보고 왜 남자랑 편지를 주고받냐고 타박을 준 적이 있다. 그 정도로 보수적인 엄마였다.


대학교 때는 러시아에서 유학하다 온 오빠랑 썸이 있었는데 엄마에게 말했다가 사기꾼 아니냐며 타박만 들은 적도 있었다.

그래서 나는 그 이후로 살면서 엄마랑 친하면서도 내 속마음을 비밀을 터놓고 말해본 적이 별로 없었다.      

성향이 너무 반대였는데 ‘예민하다’는 부분은 꼭 닮은 엄마와 나 살면서 안 싸울 수가 없는 상대였다.

때로는 엄마를 미워한 적도 많았고, 내가 우울증에 걸리고, 내 삶이 다른 사람과 달리 평범하지 않다는 게 모두 엄마 탓인 것만 같았다.     


심지어는 해외살이를 시작했던 2021년에는 무려 5개월 동안 엄마에게 연락을 한 번도 하지 않았다.

사실 2019년에도 해외살이를 시도했다가 엄마의 만류에 무산된 적이 있었기에. 이번에도 엄마에게 전화하면 당장 집으로 돌아오라고 할 것만 같았다.     


그러다가 나는 2022년 덜컥 유방암에 걸려버렸고 삶에 대해 엄마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하게 됐다. 내가 아플 때 내 옆에 있어 줄 유일한 사람이 엄마라는 것을 알게 되면서 어쩌면 내가 엄마를 미워했던 시간 때문에 하느님이 지금 나에게 벌을 주신 건 아니겠냔 생각도 해봤다.     


사랑하는 나의 엄마,

달라도 너무 다른 나와 엄마. 하지만 예민한 것만은 꼭 빼닮아 하루에도 몇 번씩 다투는 우리 엄마.     

지금도 엄마는 내가 유튜브를 하고 싶다, 책을 쓰고 싶다고 이야기하면 허황한 이야기를 한다며 탐탁지 않아 하신다. 그래도 이제 나는 엄마를 세상에서 제일 사랑하고 이런 엄마를 이해한다.     


엄마는 엄마고, 나는 나기 때문이다. 


  

유방암 발병 사실을 알고 치료 시작 전 엄마와 단둘이 놀러간 날
삭발하고 첫 가발을 쓴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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