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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기혐오를 학습시키는 사회

생산성과 자기 학대 그 사이에서

by 두솔

더 나은 사람이 되어야 한다는 믿음. 처음 이 믿음에 균열이 간 건 내담자에게 조급함을 느끼는 나를 알아차리기 시작하면서였다. 나아져야지, 당연히 앞으로 나아가야지, 시간이 없는데, 이렇게 노력을 했는데.


알아차리고 보니 이 믿음은 나의 삶 그 자체였다. ‘여기에 멈춰있으면 안돼‘ 라는 생각은 나에게 너무 섬세히 스며들어있어서 의심할 수도 없을 만큼 당연한 명제가 되어있었다.


그런데 주위를 둘러보니 나뿐만이 아니다. 모든 것이 빠르게 변화하는 환경에 노출되어 살아가는 우리가 어떻게 땅에 두 발을 붙일 수 있겠는가. 나도 모르게 더 나아져야 한다는 급류에 휩쓸리며 살게 된다. 하지만 이 당연해보이는 전제에 균열을 내지 않으면, 우리의 마음은 병들어간다.


사람은 1초 마다 사라지고 있는 현재를 산다. 하지만 그 현재를 손에 쥐고, 머무르며 느끼고, 누리지는 못한다. 뿌리를 조금만 깊이 파보면 ‘나는 부족한 사람‘이라는 자기 혐오가 있다. 그러니 1초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로 존재할 수가 없는 것이다. 우리에겐 부족한 나를 견딜 수 있을 만큼의 깡이 없다.


지금의 나로는 견딜 수 없으니, 한시라도 빠르게 더 나아지고 싶다는 발버둥. 어느 날 그 발버둥에서 힘을 빼고 고요히 나를 놓아봤다. 딱 5분의 시간이었다.


그 순간 내 마음이 처음으로 숨을 쉬었다. 살아온 시간의 모든 날에 정장만 입던 사람이 처음으로 자세를 흐트린 것 같은 느낌이었다. 해방감이었을까? 아니. 내가 느낀 감정은 그보다는 안도감에 가까웠다. ‘아, 힘 주어 정장 속에 갇혀 있지 않아도 되는구나. 그래도 되는구나.‘


나는 이러한 자기 혐오적 시선을 사람들이 스스로 만들어낸 것이라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자기 혐오를 ’학습‘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이러한 믿음에 한번쯤 돌을 던지고, 균열을 내고 싶다. 나 뿐만 아니라 다른 사람의 발버둥에도 금을 내주고 싶다.


하루 딱 5분만 나를 돌보자는 아이돌 모임이 이렇게 시작됐다.


17명의 사람들이 모였다. 15일 동안 매일 5분의 자기 돌봄 시간을 확보하고 서로에게 알렸다. 자기 돌봄이라고 표현했지만 돌아보면 ’아무 것도 하지 않는 나를 버티는 모임‘ 이었던 것 같다.


우리는 두 가지를 느꼈다. 첫째, 잠깐 멈춰 나를 돌보는 건 정말 쉽다. 피아노 치기, 좋아하는 야구 보기, 노래에 가사를 들어보기, 동료와 담소를 나누기 등. 나에게 맞는 너무나 다양한 방법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잠깐 눈만 감고 있기만 해도 충분하다.


둘째, 하지만 어렵다. 단 5분이라도 있는 그대로의 나를 허용하는 게 어렵다. 우리의 시선은 자꾸 미래로, 과거로 간다. 자꾸만 학습된 자기 혐오를 반복한다. 멈춤이 역행이기 때문이다. 역행을 위해선 급류를 거스른 채 버틸 수 있는 근지구력이 필요하다.


나는 잘 버텨보고 싶다. 있는 그대로의 나를 조금은 받아들여주고 싶다. 그래서 상담자로 내담자를 만날 때 함께 버텨주고 싶다. 딱 5분만이라도 좋다. 나를 만나는 사람들이 처음으로 숨을 쉬어봤으면 좋겠다. 그래도 괜찮다.




[마음실험기 : 초보 심리상담사의 기쁨과 슬픔]

초보 심리상담사의 성장 과정을 담고 있어요.
좋은 상담사가 되기 위해 마음을 들여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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