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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정폐쇄 Jan 25. 2019

캐릭터 (3)

로그라인을 빼먹었네. 얼쑤.

잠깐 동안 길을 좀 헤맸다. 이게 맞나 싶어서 조금 걷다가 아닌 것 같아서 돌아오기를 반복했다. 각 포지션 별로 설정된 캐릭터를 어떻게 그려야겠다는 큰 틀은 있었지만, 아무리 해도 각 인물간의 케미가 살지를 않았다. 모두 제각각 놀았다. 답답했다. 왜 진도가 잘 안나갈까. 첫 번째. 지난 작품이었던 <손에 손잡고>나 <무악동>은 어느 정도 역사적 사건을 기반으로 하다보니 여기저기서 인용을 할 데가 있었지만, 이번 작품은 순수 창작이다 보니 어디서 뭘 참고해야 좋을지 막막했다. 그리고 두 번째. 주인공 '도균'의 성격을 보여줄 수 있는 직업을 무엇으로 할지가 도무지 떠오르지 않았다. 의사? 형사? 작가? 심부름꾼? 검사? 한국영화에서 지긋지긋하게 보아 온 캐릭터들. 그것만은 좀 피하고 싶었다. 분명 무엇을 하면서 살고 있을텐데. 과연 그게 무얼까. 정말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그렇게 책상 앞에서 키보드는 안 두드리고 멍만 때리면서(사실 틈틈이 스카이캐슬도 보면서) 며칠을 흘려 보냈다.


그럴 땐. 뭐다? 그냥 포기하고 놀면된다. 회사 일도 졸라 빡세 죽겠는데 내가 지금 뭔 지랄을 하고 있는 거야. 포기하면 편하잖아. 기본으로 돌아가는 거다. 내가 뭘 쓰려고 했었지?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은거지? 연말에 어울리는 크리스마스 캐롤 같은 그런 작품이 하고 싶었잖아. 밝고 조금은 따듯한. 그런거. 응. 그래 맞아. 맞아. 그러면 로그라인은? 생각해봤어? ...




아뿔싸. 로그라인을 생각하지 못했었구나. 로그라인은 미리미리 생각해두어야 하는건데, 이제야 로그라인을 떠올리다니. 그러니 계속 우왕좌왕했지. 이 로그라인이라고 하는 건, 투자자에게 내 작품을 설명할때만 사용하는 것이 아니다. 로그라인은 창작을 하는데 있어서 일종의 울타리 역할을 해준다. 그 울타리가 쳐져 있어야 글이 딴데로 새지 않고, 정해진 범주 내에서 깊은 생각을 하게 된다. 그 울타리가 쳐져있지 않으면 내 작품은 갈 곳을 몰라 여기저기 헤메이다 결국엔 달나라까지 갈지도 모른다.  여기서 유의할 점 하나. 처음부터 너무 완벽한 문장의 로그라인을 세우려고 하지 말자. 우리가 흔히 잘 된 작품들의 로그라인이라고 해서 보는 것들은 다듬어 지고, 다듬어 지고, 또 다음어진 로그라인 들임을 명심하자. 지금 당장 내 로그라인이 깔끔한 문장으로 정리되지 않는다고 해서 주눅들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내 로그라인도 그렇게 다듬어 지고, 다음어 지고, 또 다음어 질 것이다. 이런 과정도 없이 캐릭터를 구상하려 했다니. 이건 지도도 보지 않고 등산을 하려는 꼴이자, 메뉴판도 보지 않고 식당에 들어간 꼴이고, 그 날 선발투수도 확인 하지 않고 야구시합에 임하는 꼴이다.




“은퇴 후 소원해진 딸에게 다가가려 노력하는 도균. 한 친구가 그의 용기를 응원해준다. 그런데 그 날 이후, 도균의 기억은 하나 둘 지워지기 시작한다. 기억은 지워져도 세월은 지울 수 없었던 지영이의 아빠 도균의 이야기” / 은퇴? 도균이 은퇴를 했다고? 누구 마음대로? 그리고 무엇보다 저 문장에서는 깐깐하고 오만한 도균의 성격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리고 뭐? 기억은 지워져도 세월은 지울 수 없다고? 이게 뭔 말이야. 무슨 초코파이 광고도 아니고.


“직장에서 해고된 후 소원해진 딸에게 다가가기 위해 노력하는 도균. 한 친구가 나타나 그의 노력을 돕는다. 그런데 그 날부터, 도균의 기억은 하나 둘 지워지기 시작한다. 모든 기억이 지워지기 전 도균은 딸과 화해를 할 수 있을까. 이것은 아빠와 딸의 뒤늦은 화해에 관한 이야기.” / 주인공이 왜 해고 됐는데? 회사 기밀이라도 빼돌렸나? 돈을 횡령했어? 두루뭉술하다. 그러니까 이것도 좋지 않은 문장이다. 게다가 아빠와 딸의 뒤늦은 화해라. 무슨 말인지는 알겠는데, 느낌이 확 오질 않는다.


“꼬장꼬장한 성격탓에 직장에서 해고 된 도균은 관계가 멀어진 딸에게 다가가려 노력하지만 쉽지 않다. 한 친구가 그의 용기를 응원해준다. 그런데 그 날 이후, 도균의 기억은 하나 둘 지워지기 시작한다.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전 딸과 화해를 하고 싶은 도균의 이야기.” / 조금씩 뭔가 정리되는 것 같긴 한데 문장이 너무 길다. 짧을수록 좋은건 교장 선생님 훈화말씀 뿐만이 아니다. 로그라인도 이에 해당된다.


“꼬장꼬장한 성격 탓에 사람들에게 외면을 받아오던 도균은, 자신의 모든 기억이 사라진 후에야 자기 딸과 한 발 늦은 화해를 하게 된다.” / 조금씩 구색이 갖춰지는 것 같긴 한데, “화해를 하게 된다”라는 결말을 미리 노출하는 것 같아서 별로다. 물론 십중팔구 관객들은 이 작품을 보기 전에 아버지와 딸이 뒤늦은 화해를 하겠구나, 라고 예상하겠지만 이걸 미리 로그라인에 못박을 필요는 없을 것 같다. 그건 관객의 상상력에 초를 치는 행동이다. 로그라인을 보고 난 관객들이 마음껏 상상을 할 권리를 침해해서는 안된다.    


그 후 많은 유사품들이 쏟아져 나왔다. “자신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 딸과 화해를 하고 싶은 성격 까칠한 도균의 이야기.” or “자신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 딸과 화해를 하고 싶은 오만하고 까칠한 도균의 이야기.” or “자신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 딸과 화해를 하고 싶은 오만하고 까칠하고 지 혼자 잘난 도균의 이야기.” or “자신의 모든 기억이 사라지기 전, 딸과 화해를 하고 싶은 세상 까칠하고 오만한 도균의 이야기.”




몇 번을 쓰다 지우다를 반복했다. 주인공과 그 주인공이 겪는 사건을 맛깔나게 표현하면 되는건데. 가능하면 딜레마가 느껴지는 문장이면 더 좋겠지. 더 고민해 볼 문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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