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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잠정폐쇄 Mar 23. 2019

무비패스 (1) - 영화 <우상>의 치명적 결점들

* 무비패스의 지원을 받아 작성되었습니다.

* 스포일러가 있는 부분은 따로 표시를 해 두었습니다.


여기 세 명의 인물이 있다. 나이와 직업은 저마다 다르지만,  이들은 왠만한 위협에는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런 그들의 강인함은 그들이 맹목적으로 쫓고 있는 어떤 우상이 존재하기 때문에 생겨난다. 각자가 품고 있는 우상이 사라지지 않는 한, 그들이 먼저 꼬리를 내리는 일은 없을 것이다. 어떤 사람에게는 그 우상은 권력이고, 누군가에겐 자신의 정체성이며, 또 누군가에겐 도피처다.


맹목적 믿음으로 인해 파멸되는 사람들의 이야기. 바로 <우상>이다.

  


모두 4번타자로 구성된 야구팀. 이것이 과연 득일까?


한석규, 설경구, 천우희. 이들의 연기력에 토를 달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리고 몇 편 되지 않는 필모그라피로 엄청난  주목을 받고 있는 이수진 감독은 또 어떠한가. 그의 차기작을 빨리 보고 싶어했던건 비단, 마틴 스콜세지 뿐만이 아닐 것이다.

 

영화 <우상>


과연 한석규는 한석규대로, 설경구는 설경구대로, 천우희는 천우희대로 소름 돋는 연기를 펼친다. 이로 인해 가장 큰 혜택을 받은건, 다름 아닌 감독일 것이다. 영화의 연기는 그야말로 연기의 신들이 채워주고 있으니,  이제 이수진 감독은 오로지 자신의 작품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었다. 이제와 하는 말이지만, 그동안 이런저런 제약이 많았을 독립영화 현장에서 얼마나 힘들었을까. 그는 이제야 비로서  미쟝센 하나하나, 사운드 하나하나, 조명이나 의상에 이르기까지 드디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을 만들 수 있게 된 것이다. 감독은 얼마나 행복했을까.


모두가 4번 타자들. 그런데.. 밥상은 누가 차리나?


그런데 불행하게도, 그 모든 요소요소들이 하나로 어우러 지지 않는다는게 문제다.  <우상>이라는 커다란 배를 목적지까지 잘 이끌려면 팀플레이가 중요한 법인데, 맙소사. 잔뜩 강타자들만 있다보니 도무지 균형이 맞아 지지가 않는다. 팀플레이를 잘하려면 각자 개성있는 선수들이 다양한 플레이를 해줘야 하건만, 그러질 못하고 있는 것이다.  


결국 <우상>은 에너지 과잉의 영화가 되어 버렸다.



영화 홍보. 꼭 이렇게 해야만 속이 후련했냐하?


본격적인 이야기에 앞서, 이 이야기는 꼭 하고 넘어가야겠다. 사람들이 짜장면이 먹고 싶어 중국집에 갈때는, 우리가 익히 상상하는 그 맛을 기대하고 식당을 찾는다. 살짝 느끼하면서도 달짝지근한 바로 그 맛. 하지만, 일반적인 관념을 벗어나서 주방장이 자신만의 개성을 살린 짜장면을 손님에게 대접한다면, 우리는 당황할 수 밖에 없다. 저기요. 전 짜장면을 먹으러 온건데, 이건 도대체 뭔가요? 생긴건 비슷한데, 맛이 이상해요.


짜장면 맛이 와 이라노? 강호형님 표정 좀 보소.


영화도 마찬가지다. 멜로나 코믹 혹은 스릴러 장르를 보러 갈 때도 엄연히 장르 기대치라는 것이 있다. 아, 내가 오늘 볼 이야기는 대충 이런 느낌일거라는 생각으로 극장을 찾는 것이다. 하지만, 그 기대가 무너져 버리고 당황이 당황을 넘어 황당함으로 이어지면 곤란해진다. 물론 이건 감독의 잘못이 아니다. 앞서 예로든 중국집도 주방장의 잘못이 아니다. 그들은 열심히 일만 했을 뿐이다. 이건 영화에서는 홍보의 문제고, 중국집의 경우엔 미리 손님에게 고지를 하지 않은 식당 사장의 잘못이다.


<우상>은 처음부터 다양성영화에 그 촛점이 맞춰져야 했다. 그래야 최강의 서스펜스니 뭐니 자극적인 문구를 보고 극장을 찾은 관객들의 뒷통수를 때리지 않을 수 있었다. 나는 여기서 단호하게 말할 수 있다. 영화를 보고 이 작품이 가지고 있는 낯설음에 당황했다면, 그건 절대 관객의 수준 문제가 아니다. 엉뚱한 상상과 기대를 품고 오게 만든 홍보사의 문제다. 홍보사님들. 제발 상품에 대한 설명을 똑바로 해줬으면 좋겠다. 그래야 관객이 그에 걸맞은 마음가짐으로 영화관을 찾는다. 과장광고도 물론 문제지만, 그것보다 더 나쁜건 허위광고다.


홍보사의 이 안일한 태도로 피해를 보는건 관객이고, 욕을 먹는건 애먼 감독이라는 걸 알아줬으면 좋겠다.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 알아야 할 세 명의 인물.  (매우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이 작품의 내용 이해를 위해서는 세 명의 인물을 더 알아야 한다. 극 중 인물이 생각나지 않으니, 편의상 그냥 "심부름꾼", "킬러" 그리고 "전남편" 이라고 하자. (영화를 본 후 혼자서 정리해 본 극히 주관적인 내용정리이며, 감독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


우선 "심부름꾼"은 구명회가 자신의 아들이 낸 교통사고의 목격자(이자 생존자)인 최련화를 찾기 위해 고용한 인물이다. 하지만 “심부름꾼"은 유중식에게도 접근해서 이천만원을 추가로 받아 먹으며 폭리를 취한다. 극 후반부에서 최련화가 꼭 받아주겠다는 이천만원이 바로 이 돈이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다. 형사 출신의 능력좋던 그 심부름꾼은 구명회에 의해 죽었으니까.  


그리고 "킬러"는 최련화가 그의 언니 이수련과 함께 한국으로 넘어오기 전, 중국에서 죽인  어떤 사람과 관련이 있는 듯 하다. 어떤 장면이었을까. 최련화는 고해성사를 하듯이 그 중국에서의 살인은 어쩔 수 없는 것이었으며, 나는 그냥 그의 몸통만 잡았고, 목을 자른건 이수련이었다고 고백한 내용으로 짐작해 보는 것이다. 암튼 그 "킬러"는 그들이 했던 것과 똑같이 이수련의 목을 참하고 난 뒤, 이제는 최련화를 찾아 서서히 다가오고 있다. 그리고 이 "킬러"로 인해, 최련화의 잠재되어 있던 봉인이 풀리게 된다.


마지막 인물은 "전남편"이다. 최련화와 결혼은 했지만, (최련화가 한국 국적 취득을 위해 필요한) 혼인신고는 해주지 않았던 절음발이 남자. 아마 혼인신고를 하는 순간, 최련화가 도망갈거라고 생각 했을테지. 비록, 이 절음발이 "전남편"의 아이를 임신했지만, 이 남자와 있어봤자 득될게 없다고 판단했던 최련화는 유중식의 아들과 또 한번 혼인을 하게 되고, 인근의 한 바닷마을 호텔로 신혼여행을 떠나게 된다. 그런데 그 곳까지 이 "전남편"은 쫓아왔다(극 중반 정도에 등장하는 목격자가 봤다는 남자는 이 "전남편"일 것이다. 그 목격자는 분명 절음발이 남자를 본거고, ”전남편”의 존재를 모르는 그는 이를 유중식이라 여긴 것이다) 암튼, 이 "전남편"과 최련화는 몸싸움이 있었을 것이고, "전남편"은 낭떨어지로 떨어져 익사한다. 그리고 중국에 이어 한국에서도 살인을 저지르게 된 최련화는 정신없이 도망치기 시작한다. 잡히면 추방이니까. (CCTV에 잡혔던, 최련화가 도망치는 모습이 바로 이 장면이었을 것이다.)


한편, "전남편"과 최련화가 이 난리블루스를 추고 있을 때, 우리 가엾은 유중식의 아들은 교통사고를 당하게 된다. 아마도, 경찰서에서 유중식이 "내 아들과 최련화를 똥을 눌때도 붙어다닌다."라고 했을 때 구명회의 아들이 웃은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었을 것이다. 저기요, 최련화는 그런 여자가 아니예요, 라는 그런 비웃음.



이 작품의 가장 큰 패착. 절대 공감할 수 없는 3명의 주인공들. (매우 강한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그럼 이제 세 명의 주인공으로 돌아와서, 이들이 지키고자 하는 것. 이들이 이루고자 하는건 도대체 무엇이었는지 살펴보자. 이들은 얼마나 대단한 우상을 품고 있었길래, 파국으로 달리는 열차에서 내리지 않는걸까.  


구명회(한석규)


먼저 구명회. 권력을 향해 달리는 인물이다. 상황이 점점 복잡해지자, 자기 아들을 죽이는 상상까지 하는 이 남자는 지금 (고작) 도지사가 되려고 한다. 그런데, 이 작품 어디에서도 구명회가 (고작) 도지사가 되고자 하는 이유가 납득있게 설명되지를 않는다. 도대체 이 남자는 왜 사람을 죽여가면서까지 (고작) 도지사가 되려고 하는걸까? 단순히 '권력욕이 있다.'는 것만으로 설명이 되는가? 자기 아들을 죽이는 환상까지 보는데?


여기서 잠시. 얼마전 화제를 모았던 드라마 <스카이캐슬>을 한번 생각해보자. 거기서 소 선지 팔던 알콜중독자의 딸, 곽미향은 자신을 둘러싼 모든 현실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신분상승을 꿈꾼다. 그녀는 모든걸 숨기고 서울로 와서 걸출한 의사 집안의 한 남자를 알게 됐고, 그와 결혼을 하게 됐다. 이걸로 끝인 줄 알았는데, 시어머니가 곽미향을 탐탁치 않게 여긴다. 그리고 이런저런 우여곡절 끝에 자신의 과거를 동네사람들도 다 알게 됐다. 힘들게 들어온 상류층인데 쫓겨날 위기에 처했다. 하지만 곽미향은 굴하지 않는다. 웃기지마. 난 그래도 지지 않을꺼야. 너희들 보다 더 잘 살꺼라고. 딸 예서만 의대를 보낸다면. 괜찮아 질꺼야. 3대째 의사 가문만 만들면, 소 선지 팔던 알콜중독자의 딸 나 곽미향도 떵떵거리며 살 수 있을거라구. 그렇게 곽미향은 다짐하고 또 다짐한다. 보라가 죽고, 우주가 감옥에 갇혀도... 미안하다. 나중에 꼭 사과할께. 하지만 난 예서를 꼭 의대에 보내야 해. 그렇게 극심한 내적 갈등을 겪으면서도 곽미향은 자신의 꿈을 접을 수 없다.


곽미향에게는 있고 구명회에게는 없는 것. 바로 "결핍"이다. 결핍이 없으니 구명회의 절박성, 권력욕이 제대로 살지를 않는다. 그러다보니 구명회가 갑자기 최련화를 납치하건, 심부름꾼을 죽이건, 뭘 상상하건 간에 관객은 그 심정에 동의를 할 수 없게된다. 쟤는 도대체 왜 저러는거야? 라는 의문만 남게된다. 한마디로 실패한 캐릭터다.    



유중식 (설경구)


유중식은 어떠한가. 지독한 아들 바보다. 아들의 성욕을 대신 해결해 줄 정도로 아들에 대한 사랑이 각별하다. 영화 초반. 유중식과 그의 아들은 성범죄 이력이 많다는 이야기가 나오는데, 아마도 정상적인 성생활을 할 수 없는 아들을 데리고 윤락업소에 많이 다녔기 때문인 것 같다. 아무튼 섣불리 이해하긴 힘들지만, 그런 유중식이 품은 아들에 대한 사랑은, 곧 그의 정체성과 한몸이 되어간다. 말하자면, 아들이 없으면 자신도 없다, 는 생각. 급기야 아들이 죽은 지금은, 비록 최련화의 뱃속의 아이가 내 아들의 아이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내 손자가 되어야 한다는 그릇된 믿음에까지 이르게 된다. 아마도 아내도 없이 살고 있던지라, 아들에게 과도한 집착이 생겼었나 보다.


그래서 뱃속에 아이를 가지고 있는 최련화가 실종되고 나자, 그는 최련화를 찾기 위해 우리나라에서 제일 높은 인물의 목을 딴다. 이순신 장군의 목을 날려 버리는 것이다. 최련화를 찾고 싶으면 제일 높은 인물의 목을 따라고 어느 무당이 그랬었거든. 그 말을 그대로 믿다니. 그래. 이 남자 분명 정상이 아니다.


이 인물에게 공감이 가는가? 오히려, 자신의 모든 것이었던 아들을 죽인 상대에게 행하는  '복수'가 더 효과적이지 않았을까? 모르겠다. 나는 도무지 이 인물을 이해할 수 없다. 아니 백번 양보해서 조금 이해를 한다고 해도, 아무런 매력도 느끼지 못하겠다. 주인공으로서의 매력말이다.


최련화 (천우희)


그리고 왠지 까게 되면 엄청난 해코지를 당할 것 같은 인물 최련화. 하지만 가스불과 함께 산화됐을테니 마음 놓고 까겠다. 최련화에겐 도피처가 필요했다.  중국에서 사람을 죽이고 도망치듯 한국으로 건너온 이 인물은, 중국으로 가게 되면 보복당할 것을 알기에 한국 국적 취득이 무엇보다 필요하다. 자연스레 한국에서 머물러야 한다는 것이 그녀의 우상이 된다.


그런데 그러면 뭐해. 본인이 넘어가지 않으니까 중국에서 킬러가 넘어오는데. 최련화는 그들이 중국에서 그들이 넘어올 수 있을거라는 걸 상상 못했을까? 한국의 심부름꾼도 그녀를 그렇게 쉽게 찾아내는데?


가장 안타까운건 감독은 이 최련화라는 인물에 대해 아무런 사연도 소개해 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녀에게는 어떤 절박함이 었었던 걸까. 혹시 중국에서 죽였다는 그 사람은 가정폭력의 가해자이진 않았을까?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길래 한국으로 도망와서 윤락업소에서 전전하고 있는 걸까. 그 부분만 조금 더 정성스레 매만져 줬어도, 적어도 이 인물만큼은 조금 더 괜찮아졌을텐데, 정말 아쉽다. 결국 최련화는 설정을 위한 설정만 남고, 디테일은 모두 빠진 빈껍데기 같은 캐릭터가 되고 말았다.


   

도무지 모르겠다. 그래서 나는 일단. 이 영화의 해석을 거부한다.


솔직히 나도 영화의 절반도 이해를 못한 것 같긴 하다. 두번, 세번 보면 더 알 수 있을 것 같지만, 굳이 내 시간과 돈을 들여서 그러고 싶지는 않다. 재미가 없어서가 아니라, 에너지가 너무 강한 영화라 그런지 보면서 기가 많이 빨리는 기분이 들어서 그렇다. 그런데 여기서 한번 생각해 볼 문제가 있다.  그냥 쉬운 말로 하면 되지. 굳이 어렵게 플롯을 꼬으고, 은유과 상징을 통해서 뭔가를 숨기려는 작가들의 의도는 도대체 뭘까? 다양한 이유들이 있겠지만, 크게 봤을 때는 세 가지 이유가 있다고 생각한다.


첫째. 권위를 까야할때. 하지만 시절이 너무 삼엄해서 마치 홍길동이 자기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못하듯, 개객끼를 개객끼라고 하지 못할때 이 방법이 사용된다. 재치 넘치는 작가들은 그걸 작품에 교묘하게 숨긴다. 대부분이 모르고 지나가겠지만, 눈치를 챈 사람은 거기서 희열을 느낀다.


둘째. 가장 많이 사용하는 방법이다. 바로 낯설게 하고 싶을 때. 세상에는 정말 수많은 이야기가 존재한다. 그래서 지금 나온 이야기는 앞선 이야기의 반복일 경우가 많다. 이 세상에 100% 새로운 이야기란 존재하지 않는다. 바로 이 때 조금은 뒤틀기도 하고, 의미를 숨기기도 하면서 익숙한 것을 새롭게 보이게 하고 싶을 때 사용된다.


셋째. 이야기 자체가 너무 재미도 없고 의미도 찾을 수 없을 때. 어떻게든 꼬아서, hide and seek. 그 잔재미라도 주려고 할때.


셋 중에 <우상>은 어디쯤 해당할까?

관객 각자의 판단에 맡긴다.


아무튼 나는 더 이상은 못 보겠다. 

더 강해지고 난 다음에 이 작품을 다시 찾아봐야겠다.


그런데 꼭 다시 찾아봐야 하는 걸까?



그리고, 잡담.


조선족 이미지. 이제 그만 좀 하자. 조선족에 대한 막연한 불안과 공포가 실제로 있다는 건 알지만, 이제 그만할 때도 됐다. 아니, 그만한다기 보다 잠깐 놓아줄 때도 됐다. 조선족을 바라보는 색다른 시각이 있었으면 좋겠다. 너무 반복되니 피로감이 쌓인다.


둘. 분명 다 찍어놓고 편집에서 빠진 분량이 꽤 될 것이다. 그렇지 않고서야 각 인물들의 그 빈공간이 설명되지 않는다. 그래서 어쩌면, 2-30분이 추가된 감독판이 나올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러지 않았으면 좋겠다. 그러지 않는게, 감독의 작품을 지키는 길이라 생각한다. 그냥. 여기서 끝내자. 심폐소생이 불가능한 작품이다.


셋. 구명회 부인. 영화를 보고 난 후, 분노의 폭풍 검색으로 어떤 배우분인지는 찾았으나, 밝히진 않으련다. 다음 작품에서는 조금 더 발전된 모습으로 보면 좋겠다. 배우님. 너무 긴장해서 그러신거죠?


넷. 언젠가 이 작품의 몇몇 장면들이 한국어 듣기평가 짤로 돌아다니지 않을까 싶다. "다음의 대화를 듣고, 주인공의 심리상태로 적절한 것을 고르세요." 블라블라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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