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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Oct 30. 2022

신전에서 쫓겨난 신에 관해

D+154, 터키 에페소스

    나는 종교가 없다. 다만 대체로 다 믿음직하다고 생각할 뿐 아무것도 믿지 않는 것은 아니다. 종교의 이름으로 자행된 악행들을 공부할 땐 신을 원망하기도 했었다. 그러나 살면서 종교가 사람들에게 주는 위안과 평화, 선에 대한 메시지를, 그리고 그것을 실천하며 살아가는 본받을만한 사람들을 충분히 만나보기도 했다. 정치나 자본이 할 수 없는 오직 종교만이 가능한 영역. 그래서 항상 궁금해하는 편이다.


    어쩌다 보니 이번 여행에서 기독교, 유대교, 이슬람교의 중요한 공간들을 두루 방문하고 있다. 높고 거대하게 쌓아 올려진 성당, 회당, 사원들. 자신의 목숨보다 신을 소중히 여기는 이들의 기도. 그들의 눈빛과 몸짓에서 배어 나오는 신실함. 천년이 넘는 세월 동안 하나의 이름으로 축적된 수많은 사람들의 절실한 마음을 가만히 떠올리고 있노라면, 신의 존재를 믿든 안 믿든 그 자체로 성스럽다는 생각이 든다.


    터키의 에페소스. 한국에는 '에베소'로 알려져 있다. 이곳에는 신과 연관된 다양한 유적이 있는데, 먼저 안티파트로스가 언급한 고대의 7대 불가사의 중 하나라는 아르테미스 신전을 보러 갔다. 그는 바빌론의 공중정원도, 이집트의 피라미드도 이것에 비할 바가 못 된다고 했었는데. 남은 건 딸랑 기둥 하나밖에 없었다. 정말 딱 하나. 잔해라도 남아 있으면 복원이라도 할 텐데 아무것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 기둥들을 온통 뽑아다 인근의 모스크와 교회를 짓는데 썼기 때문에. 신자를 잃은 신은 자신의 신전에서 쫓겨났다. 


아르테미스 신전의 상상도(왼쪽)와 현재의 모습.


    그 빼앗긴 기둥이 있다는 근처의 교회로 갔다. 성 요한의 교회. 십자가 모양으로 지어진 이 오래된 교회의 중앙부에 예수의 열두 제자 중 한 명인 사도 요한의 무덤이 있다. 너무 오래된 일은 현실감이 없어서, 문득 그 실존의 증거를 맞닥뜨리면 어안이 벙벙할 때가 있다. 그의 무덤 앞에서도 나는 어긋난 현실감각을 맞춰야 했다. 작은 기도를 올렸다. 여기도 이제는 잔해만 남았지만 그 거대한 규모가 당시의 위엄을 떠올리게 했다.

교회는 한창 복원 공사가 진행 중이었다. 안에 있는 사도 요한의 무덤.


    이후 에페소스의 고대 유적지를 잠깐 둘러보고, 산길을 굽이굽이 운전해 마지막 목적지로 향했다. 깊은 곳에 숨겨져 있는 작은 집. 예수 사후 사도 요한과 함께 에페소스에 온 성모 마리아가 이곳에서 여생을 보냈다고 한다. 약간의 논란이 있기는 했지만, 가톨릭에서 공식 성지로 선포한 곳이다.


    고요한 숲 속에 위치한 아주 작은 갈색의 집. 개방 시간이 끝날 때쯤 가서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들어가자 왠지 모를 전율이 느껴졌다. 의자에 앉아 눈을 감고 짧은 기도를 하고 있는데, 갑자기 뒤에서 신부로 보이는 사람들이 들어와 앉더니 성경을 꺼냈다. 이윽고 시작된 미사. 이렇게 성스러운 곳에서 진행하는 미사 중간에 나가도 되는 건지 모르겠어서… 결국 30분 넘게 앉아 눈을 감고 기도를 했다. 한마디도 알아듣진 못했지만 덕분에 신기한 경험을 했다. 미사를 마친 뒤에는 괜히 민망해져 도망치듯 나왔다.



    하루 동안 여러 신적 장소를 방문했다. 어떤 곳은 오랜 세월 살아남아 지금도 종교의식이 수행되고 있었지만, 다른 곳은 모두 무너지고 사라져 상상력을 총동원해봐도 필히 화려했을 그 모습을 다시 그리기도 어려웠다. 인간 세계의 다툼과 흥망에 따라 신전도 신도도 사라지는 거라면, 정말 신은 있는 걸까. 잊힌 신은 어디로 가는 걸까. 이렇게 보면, 정말로 신성이란 곧 신자의 문제일 뿐인가 싶은 생각도 든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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