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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윤달 Oct 30. 2022

여행과 관광은 동의어가 아니다

D+164, 불가리아 산단스키

   주변 마트에서 사 온 유럽 돼지고기와, 한국에서부터 공수해온 김치를 넣고 펄펄 끓여 만든 김치찌개. 밥과 여행용 김을 꺼내 호호 불며 점심을 먹는다. 나는 분명 '여행' 중이지만, 어제와 오늘 이틀 내내 잠깐 마트를 들른 것 외에는 에어비앤비 숙소 바깥으로 나가지 않았다. '내가 너무 게으른 건가'라는 반성이 뇌리를 스치지만, 이내 삶에 '꼭 해야만 하는 것'은 그리 많지 않다고 합리화하고는 배를 두드리며 소파에 눕는다.


    터키를 빠져나와 북마케도니아와 코소보, 알바니아를 거쳐 이탈리아로 넘어갈 계획이었다. 그런데 배를 타기로 한 알바니아 항구도시에서 2주 전에 큰 지진이 발생했고, 이후에도 여진이 계속되고 있어 다소 위험한 상황이라는 소식을 들었다. 결국 다시 그리스로 내려가 배를 타고 이탈리아로 넘어가기로 했고, 이로 인해 이틀이 비었다. 불가리아-그리스 국경 도시인 산단스키(Sandanski)에 자리를 잡고 오랜만에 주말 같은 하루를 보냈다. 이게 얼마만인지.


파란 별이 산단스키, 빨간 별이 이구메니차다.


    여행과 휴양은 동의어가 아니다. 사실 여행자에게도 나름대로의 할 일이라는 게 있다. 여행자는 여행을 해야 한다. 정해진 시간에 맞춰 출퇴근하며 상사의 짜증을 참아내야만 하는 친구들에겐 미안한 말이 될 수도 있겠지만. 어쨌든 무언가를 보고, 모종의 감상을 느끼고(느껴야) 하는 일들. 비싼 시간과 돈을 지불하고 여기까지 와서 하루를 허투루 쓸 수 없다!라는 일종의 여행자의 강박 같은 게 존재한다. 볼거리가 가득한 유서 깊은 도시일수록 더더욱. 그 외에도 지출을 정리하고, 다음 여행지를 조사하고, 교통편이나 입장권, 숙소를 예약하는 자질구레한 일들이 따라붙는다. 자동차 여행자라면 이동에 필요한 수백 킬로미터의 운전과 각종 까르네(통행권), 국경검문소에 대한 조사는 덤. 짧은 여행엔 부과되지 않거나 출국 전에 처리할 수 있는 것들이, 오랜 여행엔 필수적인 부산물처럼 따라온다. 꽤 피곤한 일이다.


    그러다 보면 여행이란 무엇인가, 묻지 않을 수 없게 된다. 하루 종일 낯선 곳을 돌아다니며 알 수 없는 것들 (읽을 수 없는 간판과 파악할 수 없는 행간 같은 것들)에 치이다 보면, "내가 왜 이 고생을 하고 있지"라는 물음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그럴 때마다 되새기는 말. 여행과 관광은 또한 동의어가 아니다. 인간 살림살이의 역사와 문화를 좇지 않더라도, 관광 안내서에 적힌 '반드시 가봐야 할 곳' 리스트를 모두 채우지 않더라도, 여행은 여행이다. 마음길 닿는 대로 그저 흘러가 보는 일. 내 고통의 흔적을 잔뜩 머금은 공간과 사람을 잠시 치워두는 일. 옛 허물들에 가려져 보이지 않던 새롭고 사소한 나의 구성요소를 발견하는 일. 생각이든 감정이든, 시시한 찌질함이든 의외의 취향이든. 그렇게 생각하면 에어비앤비의 침대에 나자빠져 있어도 여행은 여행이다. 인생이 곧 과업의 명단은 아닌 것처럼, 여행도 곧 관광지의 목록으로는 설명될 수 없는 것이다.


    그렇게 이틀을 푹 쉬고 다음날 배를 타기 위해 그리스의 항구 이구메니차로 450km를 달렸다. 나는 사실 이런 날이 좋다. 하루 종일 운전만 하면 되는 날. 운전석에 앉아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생각들을 스쳐가는 풍경에 흘려보낸다. 게다가 오늘은 서쪽으로 가는 날이라, 저녁 내내 붉게 물들어가는 하늘을 눈앞에 두고 달릴 수 있었다. 들리는 것은 엔진 소리뿐인 이 고요함. 이런 날엔 운전도 여행이 된다.


카페리를 타러 온 그리스 이구메니차의 항구

    여행의 말미에 와 있다. 러시아를 횡단하던 중 중앙아시아와 터키를 루트에서 제외했었다. 얼른 한국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이 들어서. 그런데 유럽 어딘가에서였을까, 여행을 좀 더 오래 하고 싶어 져 다시 터키로 방향을 틀었다. 서쪽으로 직진해야 하는 횡단과는 전혀 상관없는 잠깐의 일탈. 덕분에 터키를 반 바퀴 돌며 알지도 보지도 못했던 많은 것들을 느끼고 간다.


    그러나 여행은 언젠가 끝나야 한다. 유목을 하던 나도 다시 정주민으로 돌아가야 한다. 그러니 일탈도 여기까지만 해야겠지. 이제 남은 한 달은 정직하게 서쪽으로만 가야 한다. 마지막 목적지인 호카곶을 향해 다시 횡단을 시작한다.




본 여행기는 지난 2019년 6월 30일부터, 2020년 1월 22일까지 떠났던 여행의 기록입니다.

동해항에서 배에 차를 싣고 블라디보스토크에 도착해, 그곳에서 여행을 시작했습니다.

러시아를 횡단했고, 북유럽과 동유럽, 중부 유럽과 발칸 반도를 거쳐 남유럽까지 여행했습니다.

그러곤 터키를 한 바퀴 돌아 다시 서유럽의 해안도로를 따라 포르투갈 호카곶에서 여정을 마쳤습니다.

이후 이스라엘과 이집트, 터키를 경유해 한국으로 돌아왔습니다.


총 여행일수: 207일

총 주행거리: 34,888km

여행 국가: 러시아 등 22개국

여행 루트: 러시아 → 핀란드 → 노르웨이 → 스웨덴 → 덴마크 → 독일 → 폴란드 → 리투아니아 → 헝가리 → 크로아티아 → 몬테네그로 →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 세르비아 → 불가리아 → 그리스 → 터키 → 이탈리아 → 프랑스 → 스페인 → 포르투갈 → 이스라엘 → 이집트 → 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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