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180, 스페인 세고비아
"할 수 있을까?"
핀란드에 입국할 때 가입했던 자동차보험이 만료된 지 일주일이 지났다. 보험 사무실이 마드리드에 있는데, 공교롭게도 금요일이라 오늘을 놓치면 월요일까지 무보험으로 다녀야만 한다. 유럽에서는 불시 자동차 검문을 꽤 하는 편이고 무보험으로 운전하다 운 나쁘게 걸리면 과태료에 차량 압류까지 당할 수 있다. 바르셀로나 교외의 숙소를 나선 게 10시쯤. 보험사는 3시까지 영업. 남은 거리는 506km. 직원들이 퇴근하기 30분 전까진 도착한다고 치면, 4시간 30분 동안 506km를 달려야 하는 상황이었다.
뭔가 끔찍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방법이 없다. 과속 기준을 아슬아슬하게 넘나들며 휴식 없이 내리 달렸다. 슬슬 다리가 저려올 때쯤 겨우 마드리드에 도착했다. 손에 땀이 흥건했지만, 계획대로 2시 30분쯤 도착해서 겨우 미션에 성공했다. 며칠간 골머리를 썩이던 문제를 해결하니 마음이 좀 놓였다. 운전 실력은 모르겠지만 장거리 운전에는 이제 도가 텄다.
운전을 처음 배울 땐 시속 40km도 얼마나 빠르고 무섭게 느껴지던지. 하지만 고속도로에서 시속 100km 정도를 한번 달리고 나니 속도에 대한 두려움이 사라졌다. 마찬가지로 블라디보스토크에서 처음 운전대를 잡았을 때는 도로는 두렵고 주변의 차들은 괴물 같았다. 교외로 나가 횡단을 시작했을 때는 하루에 400km를 가는 것도 버거워 숙소에 도착해 뻗기 일쑤였다. 그러다 모고차에서 800km를 운전해보니 수백 킬로미터를 달리는 일이 훨씬 쉬워졌고,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하루 1100km를 주파한 다음부터는 운전이 힘들었던 기억이 거의 없다.
삶의 많은 국면에서, 한 번이 어렵지 두 번은 할만하고 세 번은 쉽다. 좋은 일도 나쁜 일도 그렇다. 걸음이 안 떼어질 땐 그냥 달음박질 쳐보기. 생각과 걱정을 내려놓고 무작정 가보기. 그렇게 스스로의 한계를 한 뼘씩 넓혀 가다 보면 생각보다 어려운 일은 많지 않았다.
보험을 갱신하는 데는 2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마드리드를 둘러볼까 하다가, 혼잡한 도심이 싫어서 근교의 작은 도시로 차를 몰았다. 마드리드 조금 북쪽에 위치한 세고비아. 조금 피곤하긴 해서 관광은 내일 하기로. 간단히 저녁을 해 먹고 호스텔의 휴게실 소파에 앉았다. 한 손엔 내가 좋아하는 페퍼민트 차, 무릎 위엔 노트북. 앞쪽엔 아르헨티나에서 온 커플이 손으로 쓴 악보 책을 꺼내 두곤 기타를 치며 노래를 불렀다. 오른편엔 온갖 조합의 여행자들이 모여 어눌한 영어로 나누는 대화가 들려왔다.
남자의 이름은 파코, 그의 애인의 이름은 기억나지 않는다. 그들은 자신들이 나를 방해한다고 생각했는지 연신 내 눈치를 살폈다. 목소리가 좋다며, 기타를 참 잘 친다고 말을 건네자 그들은 함박웃음을 지으며 신청곡을 불러줬다. 나는 노트북을 닫고 차를 홀짝이며 그들과 대화를 나눴다. 밥을 먹고 글을 쓰는 사소한 순간들까지도 여행이 되는 아름다운 나날들. 우리만의 작은 콘서트는 새벽 1시까지 계속되고서야 끝이 났다.